후덥지근한 날이었다. 홍콩이니 당연했다. 오늘 일정은 홍콩 오션파크다. 홍콩은 우기라 소나기가 쏟아지고 그치고를 반복하는데 그걸 익스프레스 열차 위에서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뭘 막아볼 틈도 없이 온몸은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었다. 이렇게 예고 없는 소나기는 처음이라 황당하기 전에 웃음이 났다. 모두 세팅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흘러내린 화장이 멋졌다. 두고 온 일들 때문에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연수였는데 잠시나마 마음이 가벼워졌다.
익스프레스 열차에서 내려 다른 사람들의 귀중품을 챙겨주며 내려왔다. 그리고 한참을 놀다가 모임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집합장소로 갔다. 그때 내 손에 내 최애 선글라스가 없어진 걸 알았다. 아마도 익스프레스 열차에 두고 온 것 같다. 아주 순간 내 잘못이니 두고 갈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큰 맘먹고 산 선글라스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스트레스받던 날 거금을 주고 샀던 선글라스였다. 분홍색 벨벳 케이스에 삐죽 솟은 안경테가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인 내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줬었던 걸 생각하니 발이 동동거려 참을 수 없었다. 더 지체되기 전에 익스프레스 열차에 다녀오겠다고 하고 그 먼 거리를 급하게 다녀왔다. 아니나 다를까 오션파크 직원들이 선글라스를 나에게 건네준다. 반가움과 동시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관광버스에 타자 맨 뒤에 있던 차장님들이 "찾았어?" 하신다. 내 것도 챙기지 못하면서 남 걸 먼저 챙겼다며 애써 웃었지만 속은 어찌나 민망한지. 선글라스 때문에 10분 정도 일정은 딜레이 되었다. 자리에 앉아 내 스트레스와 맞 바꾼 소중한 선글라스를 꼭 쥐었다. 그러고는 또다시 다음 일정 속 김치찌개에 정신이 팔려,선글라스 일은 잊었다. 다음 일정, 다음 일정을 정신없이 소화하고 밤에는 스텝들끼리 몰래 빠져나와 만둣국도 먹고 호텔에서 맥주도 마셨다. 밤은 누가 훔쳐간 듯 짧았고 또다시 정신을 차려야 하는 아침은 어김없이 왔다. 그렇게 홍콩연수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동안 없어진 시간을 채우느라 여독을 풀 시간도 없이 일했다.
가끔 나 자신도 챙기지 못하면서 남을 배려할 때면괜시리이 일이 떠올랐다. 물에 젖어 정신없는 가운데 내 것이나 챙기면 되지 다른 사람 귀중품부터 챙겼던 그 일 말이다. 직장에서 스텝의 업무를 하다 보니 생긴 직업병이긴 해도 내 것도 챙기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챙길 것 까진 없었다. 사실 물리적으로 챙겨주는 건 괜찮다. 그런데 마음까지 다른 사람을 더 배려할 때가 있다는 거다.
뒤 돌아보니 직장에서 관계가 틀어지기 싫은 마음에 다른 사람들의 뾰족한 말과 행동에도 내 몸을 움츠려가며 맞출 때가 있었다. '내가 뭔갈 잘못 했나봐'라고 생각하며 '나를 배려하지 않는 사람들'을 배려했다. 그렇게 내가 상대에게 맞추고 나면 상대는 '그래, 내 말이 맞지?'라며 뾰족한 가시를 묘하게 더 부풀렸다. 아주 조금씩 부풀려지는 통에 나를 찌를 때까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른 사람도 느낄 만큼의 가시가 되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동안의 나도 가시를 부풀리는데 동의를 한 셈이다. 내 마음도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나를 배려하지 않는 사람들'을 배려했던 거다.
여러해 겪고 보니 직장이든, 관계에서든 나 자신의 마음을 잘 챙기는 게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도 내가 선글라스를 잘 챙겼으면 모두 10분을 기다리게 하는 일은 없었을 거다. 관계에서도 상대가 가시를 꺼내 들었을 때 '그 가시, 기분 나쁘네요'라고 신호를 주었으면 상대가 관계를 망칠 만큼 선을 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배려한다'는 핑계로 상대에게 신호를 줄 타이밍을 놓쳤는지도 모르지. 지나고 보니 내 마음 먼저 잘 챙기는 것이 사람을 잃지 않는 방법이라는 걸 알았다. 이제 서로를 위해 나부터 잘 챙기고 다른 사람을 챙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