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Gaming Monthly

5 - 비-사랑의 몸짓

비디오 게임에서의 성행위 재현에 관해

by 이선인

요사이에 티 응우옌을 자꾸 거론하는 것은 그다지 힙하지 않다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몇 가지 주제에서는 계속 건드려보고 싶어지는 면이 있다. 그것은 응우옌이 아주 쉽게 정리한 ‘행위성을 저장하는 매체’라는 개념을 의도적으로 비껴나가거나 위배하는 경우와 마주칠 때 그렇다. 물론 그런 경우가 꼭 게임적 조건이나 전제에 의거한 결과라고는 할 수 없다. 게임 역시 사회적 자장의 내부에 있는 매체라고 한다면 어떠한 풍토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떠한 행위들이 불명확하거나 편향적으로 재현되는 것도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번엔 누군가의 입장에선 조금 불편한 행위에 대해 건드려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과연 비디오 게임은 ‘섹스’라는 행위를 어떻게 재현하는가. 구태여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 뭔가 도발적인 인상을 주려 한다거나 썩 진보적인 척 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실제로 그 재현 양태라는 것이 꽤 우스꽝스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아타리 2600의 「엑스맨」같은 게임들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이 게임이 ‘결과적으로는’ 섹스를 화면에 모사하긴 하더라도, 결국 이 게임을 ‘섹스 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요소란 아무것도 없다. 왜냐면 플레이에서 주도하는 ‘행위’는 가위를 피해서 미로를 돌아다니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섹스 게임’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을 시뮬레이트 하는가? 보상 체계로서의 섹스씬 묘사가 로라 멀비적 편향이라는 재현의 문제를 건드리는 것 이전에, 이들은 근본적으로 ‘섹스 게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떠한 기재조차 없다. 차라리 ‘섹스 보상 게임’이라는 단어를 만드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타리 2600으로 발매된 「엑스맨」


그런데 이런 경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위시」를 필두로 하는 퍼즐 베이스의 성인 게임들 역시, 결국은 어떠한 다른 행위의 결과로서 섹스를 ‘출력’하는 보상 회로를 작동시킨다. 이것이 섹스의 시뮬레이트라고 한다면, 모멘텀 게임즈가 생각하는 섹스란 고도의 두뇌 활동이라는 것인가? 당연히 그럴 가능성은 없고, 이 또한 응우옌적 정리에 의거하자면 결코 ‘섹스 게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Steam에는 그러한 게임이 수백편 도사린다.


이 장르의 대표적 국가인 일본의 게임 역사를 뒤진다면 어떨까. 대체로 8~90년대 성행했던 게임들은 텍스트 어드벤처의 형태로, 어떠한 텍스트의 미로의 도중 또는 끝에 서사적 필요 또는 불필요를 위해 출력하는 방식이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은 어떠한 보상 회로로 작동한 것은 자명하다.


물론 이 사이에는 필수적으로 ‘조작’을 요하는 경우들도 없진 않았다. 엘프사의 몇 작품들은 해당 씬이 진행될 때 마우스 클릭이라는 조작을 통해 해당 씬을 ‘진행’시키는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래봐야 이것은 ‘지정된 결과를 향한 예정된 필요 수 충족을 위한 클릭’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반복적으로 출력되는 대화창을 넘기기 위해 버튼을 누르는 것과 이런 조작 사이에는 큰 행위적 차이가 없다는 이야기다. 물론 ‘대화창이 나와서 버튼을 누르느냐’와 ‘특정한 아이콘을 작동시키기 위해 버튼을 누르느냐’는 행위 또는 그 위를 덮는 서사 층위의 레이어를 달리 규정하긴 한다. 전자는 명백히 텍스트를 넘기기 위한 넌디제이시스적 양태라면 후자는 그래도 디제이시스적 양태이긴 하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이 메커닉을 조금 다시 볼 필요는 있다. 사실 버튼 연타 또는 마우스의 반복적 움직임은 이러한 게임들이 응당 사용하는 보편적인 메커닉이다. (하다못해 이 메커닉은 「갓 오브 워」의 구 시리즈에서도 사용될 정도였으니까.) 이 씬들이 이런 형태로 재현되는 것은 아마도 게임의 제작자들이 생각하는 ‘섹스’라는 행위란 이러한 자극-반복성의 끝없는 순환인 모양이다. 그렇게 보자면 이들이 생각하는 ‘섹스’는 시시포스의 바위 굴려올리기와 동일한 층위에 안치된다. 이것은 명백히 ‘재미-없는’ 행위다. 오직 반복적이며, 너무 오래 지속하면 버튼을 클릭하는 손가락의 마디가 아파온다. 이것이 즐겁다고 여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카뮈가 말하듯 ‘버튼을 누르는 와중에 스스로 행복하다’ 여겨야 하는 것이다. 이 기묘한 인식론적 전유는, 그러니까 플레이어가 게임 제작자 또는 세계가 가져다 준 부조리에 의식적으로 반항해야만이 이 ‘섹스’를 즐길 수 있게 된다는 의미를 (절차적으로) 담는다.


○ 버튼의 연타를 요청하는 「갓 오브 워 3」의 한 장면


사실 버튼 누르기의 행위성이 무엇을 에뮬레이트하는지를 고려할 필요는 있다. 이것은 당연히 어떠한 적극적 반복의 움직임에 대한 모사다. 이런 선택을 조롱하기 이전에, 이 문제는 다시 또 멀비의 논제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멀비가 말한 카메라의 3중 역학처럼 이러한 재현에도 3중의 역학이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플레이어-게임 메커닉-게임 캐릭터라는 3중화된 주체란 결국 ‘삽입 주체’로 압축되어 버린다. 이러한 게임 제작자들은 이게 하나의 쾌락적 모델이라고 상상하는 모양이지만, 결국 출력되어버린 게임은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체험을 낳아버린 것이다. 이 프로세스는 우스꽝스럽게도 멀비의 논의에 힘을 실어주고 만다. 이 3중화의 효과란 결국 극도의 지루함을 낳는다는 사실 말이다.


차라리 이 지점에서는 ‘섹스’를 어떠한 행위로 규정하느냐를 탐구할 필요가 있다. 삽입이라는 문제로 한정 짓는 것은 한심하고 지루하기만 한 모델을 낳는다. 이 행위는 그보다 더 거시적이고, 맥락적인 행위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슬레이 더 스파이어」의 성인 버전이라 할 수 있는 Naku Kinoko의 「최면 카드」는 섹스를 ‘카드 배틀’로 규정한다. 게임의 메커닉은 「슬레이 더 스파이어」와 거의 같다. 특정한 전략적 구성을 가진 카드 덱을 선택해 들어가서 대상 여성과 (여러가지 섹스 테크닉을 모사하는) 카드를 통해 겨루는 것이다. 좀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버튼을 연타하거나 마우스를 빙글빙글 돌리는 것보다는 훨씬 더 모사의 범주가 넓고 복잡하다. 여기서 섹스란 상대방의 ‘성적인 약점’을 찾고, 그곳에 지속적인 데미지(엑스터시)를 쌓아 자신보다 먼저 오르가즘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의 그것과 합당한가와는 무관하게, 그래도 이 구조 내부에는 원본의 행위를 해석해 만들어낸 (곤살로 프라스카가 말한) ‘해석체’의 가능성이 도사린다. 그리고 덕분에 ‘삽입’이라는 단위에 한정되지 않는 여러 가능한 행위들이 겹겹이 작동할 수 있게 된다.


「최면 카드」의 스크린샷을 붙여넣기 껄끄러워 「슬레이 더 스파이어」의 스크린샷을 사용한 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이러한 행위의 재현은 언제나 두가지 경향에 종속되어 있다. 하나, 역시나 지금도 반복되듯이 이성애자 남성을 그 주체로 한정한다. 카드 배틀의 규칙적 등가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이는 역의 방향 또는 성적 지향의 해체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음에도, 게임은 그렇게 작동하려 들지 않는다. 당연히도 이 게임이 지향하는 플레이의 대상이 그러한 조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또한 어째선지 이상하게도 ‘대결’의 형태로 재현된다는 사실이다. 어째서 섹스가 ‘대결’이 되는 것일까? 이 인과 관계의 해석은 아무래도 좀 쉬이 진행되지 않는다. 이 행위는 이기고 짐의 역학을 근간하지 않음에도 말이다. 누군가는 ‘비디오 게임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전제라면 이 수행은 애초에 비디오 게임의 세계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존재론적 위기를 겪는 것 아니겠는가?


빌렘 플루서는 「몸짓들」에서 ‘사랑의 몸짓’에 대해 논한 바 있다. 그는 사랑의 몸짓과 성적인 몸짓, 재생산의 몸짓이 구분되면서도 실존적 차원에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관계라고 말한다. 그는 ‘사랑과 완전히 분리된 섹슈얼리티는 (...) 중노동을 연상시키는 우스꽝스럽고 고달픈 기계적인 움직임이 되기 때문이다.’라고도 말했다. 이는 흥미로운 해설이다. 요컨데 버튼 누르기와 마우스 돌리기의 역학이란 결국 사랑 없는 섹슈얼리티의 현현이기 때문이다. 이는 「최면 카드」에서도 마찬가지로 작동할 수 있다. 플루서의 말을 조금 전유하자면, 이 게임이 결국 대결의 구도를 취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사랑과 분리된 섹슈얼리티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빠진다면, 그러니까 상사적 승천이라는 목적을 배제해버린다면, 이것은 ‘누가 성적으로 우위를 가지느냐’라는 대결적 모먼트로 결정지어져 버리는 것이다. 플루서는 이어서 이렇게 쓴다.


오르가즘과 관련되지만, 완전히 다른 실존적 차원에 있는 전도(überschlagen)의 순간이 존재한다. 이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타인 속에 완전히 흡수된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이 사랑이다. ‘나’와 ‘너’를 하나의 ‘우리’로 만드는, 타인 속으로의 이 전도는, 사랑의 실존적 차원에서, 오르가즘에 의해서, 성적으로 얻어지는 절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두 사람을 그 이전과 이후에 아무런 성적인 행위 없이 결합시킨다. 이렇게 보면, 사랑의 몸짓은, 그림을 그리는 몸짓이 붓을 사용하는 것처럼 성행위를 사용하는 몸짓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성행위’란, 어디까지나 도구적 행위에 불과하다. 어째서 비디오 게임은 섹스라는 행위를 상당히 기이하게 모사할 수 밖에 없는가. 그것은 그 모사가 ‘사랑의 몸짓’이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목적없이 도구만을 모사하기 때문에 이들은 자주 단조로워지거나 비틀리거나 이상한 역학에 갇혀버린다.


당연히 이 시점에선 모든 논의가 정지해버린다. 대체 ‘사랑’은 어떻게 게임 메커닉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은 게임 디자인의 영원한 숙제이며, 끝내 밝혀지지 않을 비의일 터인데 말이다. 결국 ‘사랑 없는 성의 몸짓’을 재현하는 것은 비디오 게임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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