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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Jan 01. 2019

노르망디를 지배한 바이킹 롤로

1. 바이킹 롤로  

   

롤로(Rollo: 고대 북유럽어로는 Rou, 또는 Hrólfr), 그는 서기 846년부터 930년 까지 살았다. 그러나 롤로의 출생지는 정확히 어디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프랑크 왕으로부터 노르망디 공작 작위를 수여받은 첫 번째 바이킹으로서 지금의 프랑스 노르망디를 통치했다.   

  

롤로는 서기 885년부터 886년 사이에 파리를 포위, 공격한다. 롤로가 파리를 침공하자 서 프랑크의 찰스 3세(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Charles the Simple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롤로에게 루앙(Luen) 지방을 떼어주는 대신 더 이상 바이킹들이 칩입해 들어오지 않도록 해달라는 조건을 내건다. 

    

롤로는 찰스 3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노르망디에 정착을 한다. 그 후 롤로는 노르망디에 정착하면서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고, 오딘을 따르던 파간(토속종교) 신자임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서기 911년 “프랑크 찰스 3세와 ”노르망디를 양도하고 권리를 보장한다”는 내용의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을 맺고 약정서를 작성해 서명을 한다. 그러나 롤로가 프랑스 서북 지역 노르망디에 정착하지만 원래의 약속과는 달리 파간 신자임을 포기하지 않고 간혹 프랑크 내륙을 침공하는 약탈행위를 저지르기도 한다. 롤로는 노르망디 영토를 계속해서 조금씩 넓혀나간다.    

 

롤로는 그 후 적어도 928년까지 10년간 노르망디 지역을 통치한다. 그리고 롤로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윌리엄 롱소드(William Longsword)가 노르망디 공국을 다스린다. 그 후 롤로의 손자인 윌리엄(William: 영국 왕실의 윌리엄 1세) 2세 대에 이르게 되면 영국을 통치하는 왕이 되어 영국 왕가의 시조가 된다.  

   

이처럼 롤로의 자손들이 노르망디와 잉글랜드까지 지배를 한 것은 이제 바이킹의 해외 정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노르망디는 바이킹의 거점 역할을 하게 되고 이를 발판으로 바이킹의 세력 확장은 더욱 용이하게 진행됨을 의미했다. 일차적으로 그들은 노르망디와 잉글랜드로 진출을 했고, 그다음에 이태리 남부와 시칠리 섬으로 진출을 한다. 

    

노르망디(파랑색 부분) 지도와 노르망디를 양도한다는 내용의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 약정서


노르망디 사람들은 대부분 글자 그대로 북유럽 출신 바이킹들이다. 그들은 북유럽에서 태어나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떠돌던 ‘뢸프르 라근발드손’(Hrólfr Ragnvaldsson, 롤로: Rollo) 또는 로버트라고도 부르는 북유럽 출신 바이킹 수장을 따라 노르망디로 와서 정착을 한 사람들이다. 롤로의 원래 이름은 흐롤프였으나 프랑크어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루돌프 또는 라울, 롤로 등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 뒤 가톨릭에 입교하여 로베르라는 세례명을 받고 로베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의 첫 영지가 루앙이므로 루앙 공작이라고도 한다.

     

롤로는 노르웨이 출신으로 알려졌는데, 그의 유년 시절이나 청년기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노르웨이 군주 하랄 1세의 아들인 구림(Gurim)을 살해한 뒤 노르웨이를 떠나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아일랜드, 플랑드르, 서프랑크 해안가를 전전하며 바이킹 수장으로서 원정과 약탈을 일삼으며 지낸다.  

    

잉글랜드와 프랑스 북부 해안 일대를 무대로 종횡무진 활약하던 롤로는 프랑스 센 강 하구 지대로 활동무대를 옮기고 890년 바이유 백작 영토로 원정을 나선다. 롤로는 바이유 백작인 베렝가르 백작을 살해하고 백작의 딸을 끌고 간다. 그 후 롤로는 885년 경 카를 3세의 몰락을 야기한 파리 시내를 난폭하게 공격, 약탈한다. 결국 샤를 3세는 롤로를 회유하기 위해 롤로와 그의 부하들이 정착해 차후 바이킹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그에게 프랑크 왕국 북쪽의 영토 일부(노르망디)를 정착지로 내준다. 뿐만 아니라 샤를 3세는 그의 딸을 롤로에게 내주고 결혼까지 시킨다.    

           

롤로의 동상

덩치가 컸던 롤로는 동료 노르만인들이 '걷는 자 흐롤프'라 불렀는데 그가 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말(馬)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평생 자신의 이름을 흐롤프라 했고, 그의 세례명이 로베르였기 때문에 일설에는 로베르 1세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927년 그는 죽기 전 아들 기욤 1세(윌리엄 1세) 롱스워드에게 공작령을 물려주었으며, 912년 세례를 받았으나 비밀리에 북유럽의 전통 신을 숭배하고 있었기에 결국 파간신전에서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롤로의 최후는 여전히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932년, 또는 933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죽은 후 롤로의 시신은 세느 강변 루앙 대성당 바실리카의 석관에 안치된다. 

    

한편, 롤로의 출생에 대한 자료가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바이킹 롤로가 9세기 중반 노르웨이 서쪽 뫼레(Møre)와 롬스달(Romsdal)이라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백작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그는 어려서 키가 너무 클 정도로 이미 다 자라서 아무 말이나 탈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롤로의 어린 시절에 그를 두목(Ganger)이라고 부르며 쫓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노르웨이 측에서 주장하는 내용이기에 덴마크 측은 이에 대해 다른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덴마크 측은 바이킹 롤로(Viking Rollo)에 대해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라고 하면서 그가 북유럽 어딘가(정확한 출신이 알려지지 않아서)에서 9세기 후반에 태어났으며, 고귀한 전사 가족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 같다고만 밝히고 있다.  

 

바이킹 롤로는 찰스 3세 이전에 이미 찰스 2세 더 발드(The Bald) 왕이 지배하던 당시에 센 강을 따라 기습공격을 감행하고 루앙 지역을 점령한 바가 있다. 그는 프랑크 왕국을 침공해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서기 885년과 887년 사이에는 파리 인근 베이유(Bayeux)와 에브뤽(Évreux)까지 공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롤로는 여러 차례 프랑크 왕국을 공격하고 심지어 파리 근교까지 진출해 찰스 3세를 괴롭힌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뿐 아니라 롤로는 프랑크를 침공하기 전에 이미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까지 침공한 전력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기 때문에 바이킹 롤로는 당시 프랑크의 찰스 더 심플(Charles the Simple, 또는 ‘Charles the Fat’라고도 불렸다.) 왕에게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찰스 3세가 롤로와의 전투를 피하기 위해 아예 롤로에게 노르망디 지역을 넘겨줌으로써 말썽의 소지를 없애려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9세기 경 파리 지도와 바이킹군단의 파리 침공 장면
루앙 노트르담 성당에 안치한 롤로의 무덤


그러나 노르웨이와 덴마크가 주장하는 바이킹 롤로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일치하지 않고 있다. 바이킹 시대 초기에 노르웨이와 덴마크라는 나라는 지금처럼 뚜렷한 경계를 가지고 있지를 않았다. 때에 따라서는 노르웨이와 덴마크가 합병되어 있기도 했고,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또는 덴마크 어느 지역 출신의 바이킹 지도자이건 아직 왕으로 자리하기 이전에 바이킹 수장으로서 지역을 오가며 바이킹 군단 지도자로서 통치력을 행사했을 뿐이다.     

따라서 현재의 국가 개념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북유럽 주민들 역시 어느 지역 출신이든지 북유럽 출신 바이킹 수장의 휘하에서 바이킹 함대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요인중 하나일 것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탁월한 바이킹 수장을 이해하는데 오늘날처럼 어떤 나라 출신의 바이킹으로 볼 것인가 라는 문제는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특정 국가 출신으로 귀속시키려 할 경우 오히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노르웨이-아이슬란드 신화(Icelandic Saga)에는 롤로가 노르웨이 출신의 건달 흐롤프(Ganger Hrólf)와 동일인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고, 덴마크 역사학자들은 롤로가 덴마크 출신이라고 주장을 한다. 이처럼 두 나라가 서로 자기네 나라 사람이라고 우기는 바람에 결국 두 나라는 노르망디 루앙 대성당에 매장되어 있는 롤로의 시체를 가지고 유전자(DNA) 검사를 하기로 합의를 한다.     


바이킹 롤로는 서기 932년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노르망디 공작으로 통치를 계속한다. 그리고 롤로가 죽자 루앙 대성당에 묻는다. 바로 그 롤로의 시신을 대상으로 두나라 역사학자들이 유전자 검사를 하자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검사 결과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만다.  

   

롤로의 유해를 가지고 유전자 검사를 실시한 결과 롤로의 유해로 추정되던 것이 실제 롤로의 사망연대 보다 훨씬 오래전에 죽은 자의 것으로 판명이 났다. 검사를 한 사람의 뼈대는 기원전 3세기경에 태어난 사람의 것이었기에 10세기에 죽었을 롤로의 시신을 가지고 유전자 검사를 한다는 전제 자체가 무너져 버렸다. 따라서 그 결과에 대해 기대를 했던 노르웨이와 덴마크 역사학자들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원인규명부터 해야 할 판이다.     


덴마크 코펜하겐과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의 유명한 법의학 전문가들이 설마 잘못된 검사 결과를 발표했을 리 없을 것이다. 사실 덴마크와 노르웨이 관계자들은 은근히 서로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를 했을 텐데 결과는 전혀 뜻밖의 결과를 보여주자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석관에 있는 나머지 두 개의 해골 역시 바이킹 롤로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도 연구자들은 여전히 노르망디에서 다른 무덤을 열고 유전자 검사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얻기 위해 당국의 허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바이킹 롤로(Viking Rollo)에 대한 수수께끼는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 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 사람들은 100년 넘게 바이킹 롤로(Viking Rollo)의 정체에 대해 논쟁을 벌이며 그에 대한 역사적 수수께끼가 풀리기를 고대하고 있다. 바이킹 롤로의 출신지를 규명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지만 유전자 검사까지 하면서 이런 논쟁을 벌이는 것은 우습다는 생각이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위대한 바이킹을 자신들의 선조라고 주장하려는 시도가 전개되면 전개될수록 바이킹의 의미는 오히려 퇴색하고 관광상품으로 전락해 버리는 느낌만 들게 된다. 어쩌면 위대한 인물이 많을수록 위대한 국가가 되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롤로(Rolle)가 누구인가에 대한 논쟁은 오늘날 덴마크와 노르웨이 간에 첨예한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논쟁을 분석해 보면 단순히 이론적이거나 역사적인 관점의 차이라기보다 역사해석을 의도적인 방향으로 몰아가는 듯한 데서 비롯되는 것이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마치 중국인들이 오늘날 한국의 역사를 왜곡하고 소위 동북공정이라는 황당한 허구적 논리를 바탕으로 자신들을 위한 역사를 쓰려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역사에는 국경이 없지만 역사가에게는 국경이 있다”라는 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루앙에 있는 롤로의 동상과 가계도, 노르망디의 상징 몽셀미셀 수도원(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1세가 966년 베네딕트 수도회 수도원을 증축하고 이곳에 거주한다.)
롤로의 후손들이 지배한 해외 정착지(붉은 색 부분)



2. 바이킹의 문화유산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노르망디 지역은 노르웨이 사람(Norwegian)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이 지역은 북유럽 출신 바이킹 롤로(Rollo)가 이미 9세기 말 지금의 프랑스를 습격한 후 이곳에 정착하면서 노르망디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그리하여 1066년에는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영국을 정복한 노르망디 출신의 바이킹 지도자 윌리엄 2세(롤로의 손자)가 영국 왕 울리엄 1세로 등극하면서 영국 왕실의 조상이 되기도 한다.  

   

당시 덴마크 바이킹은 웨일즈와 아일랜드 지역에 진출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일랜드에서 '더브갈(Dubhgall)'이라고 부르는 덴마크 바이킹은 ‘핑갈’이라 부르는 노르웨이 출신 바이킹들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만다. 노르웨이 출신 바이킹들이 이곳을 점령하고 정착촌을 건설하는 바람에 덴마크 출신 바이킹들은 다른 곳으로 가야만 했다.  

   

결국 중세시대에 북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지역에서 노르웨이 출신 북유럽인들(Nelsemen)과 이 지역 출신 게일인들(Gaels)이 수세기에 걸쳐 동거를 하면서 ‘노르웨이-게일’(Nelson-Gaels)을 부각하게 되고 이들이 주도적으로 군사력과 정치 세력을 장악해 독자적인 세력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것이 지금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에 보이지 않는 반목 기류가 형성되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북유럽 바이킹들은 용맹한 전사가 되는 것 외에도 숙련된 대장장이이자, 훌륭한 선원, 그리고 좋은 상인들이었기에 정착지 주민들에게 다양한 문화적 가치를 전수할 수 있었다. 그들은 건축술도 뛰어났는데 특히 덴마크 바이킹 출신들이 그들의 해외 정착지에 외부로부터 공격을 방어할 목적으로 반지 모양의 방어요새를 짓고 정착을 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요새화 작업은 덴마크의 포크베어드 왕(King Sweyn Forkbeard), 또는 하랄드 블루투스 왕(King Harald Bluetooth)이 주도한 11세기 영국 침공 당시에 이미 군사 기지로 활용해 효과를 본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요새들은 그 후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다른 곳에도 건설되고 요새로서뿐 아니라 물품 거래소로 이용한 흔적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한편, 바이킹의 문화적 유산은 오늘날 영국 문화에 여러 측면에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영국인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영어 자체는 물론 사람의 이름이나 학문 분야, 심지어 냉소적인 유머까지도 그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천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영국과 북유럽 사이에 많은 공통의 문화유산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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