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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Jan 15. 2019

마지막 바이킹 전사 하랄 하르드라다

11 세기 중반에 이르게 되면 바이킹들의 활약이 서서히 황혼기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도 여전히 바이킹들은 덴마크 출신 크누트(Cnut) 대왕의 영도하에 잉글랜드를 또다시 침략하고 끝내 잉글랜드를 정복하기에 이른다. 이 군사 행동으로 1027년 잉글랜드는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융합된 ‘북유럽 제국'을 잉글랜드에 설립하게 된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모든 지역은 곧 또다시 분할되고 원래의 주민들을 중심으로 독립을 한다.(아일랜드는 이미 1014년에 노르웨이 바이킹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한다.) 반면에 앵글로색슨 족은 1041년이 되어서야 독립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결과는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바이킹 습격을 자주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바이킹의 이교도(pagan)에 대한 '관심‘도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기독교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둔화되어가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기독교화가 점점 가속도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점차 북유럽, 특히 덴마크가 통치하던 노르웨이에서 덴마크 출신 지배층과 노르웨이 토착 지주세력간에 암투가 진행되고 급기야 전쟁을 방불케하는 전투가 진행된다. 서서히 이러한 전투를 통해 덴마크는 왕권을 강화해 가고 있었고 노르웨이는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이 시기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하랄 하르드라다이다. 


      

1. 하랄 하르드라다의 유배생활 

    

바이킹 시대가 점차 저물어 가던 시기에 하랄 하르드라다(Harald Hardrada)는 노르웨이 링게릭(Ringerik)에서 1015년경에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 시구르 시르(Sigurd Syr)는 이미 오슬로 북쪽 지방 맹주를 자처하는 강력한 바이킹 수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랄은 심지어 노르웨이 최초 왕이라 부르는 하랄 페어헤어(Harald Fairhair)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이런 주장은 하랄 하르드라다를 더욱 전설적 인물로 합법화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하랄 가족은 1029년 덴마크의 크누트(Cnut) 왕이 임명한 노르웨이 왕족이었다. 이로 인해 새로운 왕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하랄 가족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고 궁극적으로 하랄 가족의 유배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하랄의 아버지 올라프(Olaf)는 1030년 승리를 거두고 이듬해 그의 참모들과 노르웨이 왕위를 차지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하랄은 그의 이복형제들과 함께 오슬로 인근 우프랜드(Uplands)에서 약 600명의 지지자들을 모은다. 형제들은 1030년 7월 29일 스티클스타드(Stiklestad) 전투에 참여를 하지만 불행히도 하랄의 아버지 올라프(Olaf)가 목숨을 잃고 당시 16살인 하랄은 심하게 부상을 입은 채 도주를 해야 했다. 

    

심한 부상에 시달리면서 아직 미숙한 상태의 십 대 하랄이 도망 갈 곳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노르웨이 동쪽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시골 농장으로 숨는다. 이곳에서 약 1개월 정도 몸을 추스린 후 그는 스웨덴 국경에 인접한 산악지방을 통해 간신히 스칸디나비아를 빠져나온다. 하랄이 필사적으로 도망간 곳은 스칸디나비아를 벗어나 오늘날 우크라이나 키에프로 알려진 키반 루스(Kievan Rus)였다. 루스 지방은 당시 루브릭(Rubrik)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다. 루브릭 왕조는 원래 스웨덴 출신 바이킹이 선조였는데 루스 지방에 정착한 후 현지인들과 동화되어 살고 있었다.

    

하랄에게 다행스러운 것은 루스의 왕자 야로슬라브(Yaroslav)가 그를 루스를 지배하는 루브릭 왕조의 이복형제처럼 대하며 반겨준 것이다. 또한 야로슬라브는 11세기 초 키예프 루스 군대와 그 조직의 취약한 상태를 감안해 하랄에게 자신의 군을 맡긴 것이다. 하랄 하르드라다는 새로 획득한 이 직책을 수행하면서 폴란드, 에스토니아, 그리고 유목민인 피크넥스(Pechenegs)와 같은 적들과 전쟁을 치르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가 이 지역에서 명성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랄은 키예프 루스라는 제한된 공간이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나이 20세가 되자 모험을 시도한다. 그는 500명의 추종자를 뽑아 하랄 자신의 친위대를 만든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의 전설적인 친위부대 미클라가드(Miklagard)가 있는 콘스탄티노플로 입성할 방안을 모색한다.(* 콘스탄티노플의 바랑기안(Varangian of Constantinople)으로 알려진 미클라가드의 바리아그(Miklagaard Varyags)는 10세기 경 비잔틴 황제의 개인 보디가드인 엘리트 전사대이다, 이들은 키예프 루스 출신 바이킹들로서 988년 황제 바실 2세(Basil II) 때에 6000명의 바이킹 전사들로 부대편성을 하면서 시작된다. 이들은 한때 비잔티움 제국 부대로 편성되기도 했다.)      


셔틀랜드 러윅 성당에 설치한 하랄 3세의 스테인드 글라스


드디어 이들은 동로마 황제의 엘리트 보디가드 조직인 바랑기안 부대(Varangian Guard)의 병사로 들어가게 된다. 이들은 꾸준히 바이킹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해외 원정 전투에 참여해 승리를 거두고 신임을 얻는다. 이후 아직 연륜이 적은 하랄에게 콘스탄틴 황제는 아시아 소수민족과 이라크까지 정복하도록 출정 명령을 내리고 아랍 해적들과 싸우게 한다. 하랄은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약 80개의 아랍 요새를 점령한 후 1036년 동로마(비잔틴) 제국과 파티미트 칼리파트(Fatimid Caliphate) 사이의 평화 협정을 감독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서기 1038년에 하랄은 시칠리의 에미리트를 침략할 원정대의 로마군 지휘관으로 임명되는데 이곳은 여전히 이슬람 지배하에 있었다. 바랑기안 병사들은 용병으로서 훌륭하게 전투를 수행했다. 그들은 무슬림의 손에서 4개의 시칠리 마을을 탈취한다. 그러나 이 성공은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반란군의 저항이 예상보다 강했기 때문이었다.  


1041년이 되자 바랑기안 부대는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간다. 바랑기안 부대는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하자마자 곧바로 같은 해에 피터 델리안(Peter Delyan)이 이끄는 불가리아 폭동을 진압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 진압작전에서 하랄은 불가리아를 진압한 용맹스러운 장군이라는 뜻의 ‘불가리아를 불태운 자’(Bolgara brennir)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러나 1041년 말, 비잔틴 정치는 하랄에게 시련으로 다가온다. 특히 그의 후원자였던 황제 마이클 4세가 사망하자 분위기가 어렵게 변하고 만다. 새로운 황제 마이클 5세(Michael V)와 황후 조이(Zoe)가 등극을 하면서 젊은 청년 하랄은 결국 뜻하지 않은 모함으로 투옥되고 만다. 그러나 하랄은 감옥에서 탈출에 성공해 새로운 황제 마이클 5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반란군에 합류한다. 이들은 마이클 5세와의 싸움에서 승리한다. 마이클 5세가 반란군에게 패배하고 눈이 멀게 되자 마이클 5세는 하랄을 비롯한 반란군에게 자유를 허용하는 조치를 내린다.  


       

2. 하랄의 탈출     


하랄은 콘스탄틴 9세를 등에 업고 통치권을 휘두르는 황후 조이(Zoe) 때문에 더 이상 비잔틴에 남아있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그의 고향 노르웨이로 떠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하랄의 바랑기안 부대를 떠나려는 마음을 눈치챈 조이 황후는 하랄이 바랑기안 부대를 떠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한다. 

     

하랄은 은밀히 동로마제국을 탈출하기 위해 두 척의 배를 준비한다. 그러나 한 척은 콘스탄티노플 해협에 설치한 철제 그물에 걸려 가라앉고 만다. 다행히 하랄은 남아있는 다른 한 척의 배를 타고 간신히 콘스탄티노플을 빠져나가는 데 성공한다. 서기 1042년 그가 탄 배가 드디어 동로마군에게 발각되지 않고 키예프 루스 해안에 무사히 당도한다. 

    

하랄은 이때 적지 않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다. 하랄이 수년간 전쟁에 참여를 하기는 했지만 짧은 시간에 적지 않은 재물을 모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하랄은 일반 바랑기안 근위대 병사가 아니라 그보다 한 단계 위인 망글라바이트(Manglabites)로 근무를 했는데, 이들은 바랑기안 부대보다 훨씬 높은 등급의 친위대 병사 지위를 가진 엘리트 군단에 속한 부대였다. 하랄은 그의 지위를 이용해 재물을 모았을 것이라는 설도 있고, 또한 황제가 사망했을 때 왕실의 재물을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바로 그때 하랄이 재물을 빼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그는 가지고 온 재물과 노비문서들 상당수를 야로슬라브 왕자에게 보낸다. 하랄은 루스 땅으로 돌아가면서 야로슬라브의 딸 엘리시브(Elisiv)와 결혼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하랄에 대한 기대와 그의 됨됨이에 신임이 두터웠던 야로슬라브는 하랄이 '왕자'라는 정식 명칭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딸을 기꺼이 하랄에게 주어 혼례를 치르게 한다. 

         

하랄 3세의 활약상을 묘사한 그림들



3. 하랄의 귀환     


하랄이 드디어 노르웨이로 돌아갈 준비를 마친다. 키예프의 라도가(Ladoga) 항을 출발한 하랄은 금은보화를 가득 실은 배를 타고 고향을 떠난 지 16년 만인 1046년 드디어 스웨덴 시그투나(Sigtuna) 항으로 향한다. 그동안 노르웨이와 덴마크 정치 환경에 많은 변화가 있었기에 하랄에게는 그다지 좋은 상황이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었다. 특히 하랄이 고향을 등지고 떠난 지 꽤 여러 해가 지났고, 더구나 그동안 크누트(Cnut) 대왕의 두 아들까지 모두 죽은 뒤라 노르웨이 왕좌까지 모두 올라프(Olaf) 집안으로 넘어간 상황이었다. 


노르웨이 왕은 이미 올라프의 아들 매그너스(Magnus of the Good) 손에 넘어가 있었다. 더구나 매그너스는 유능한 왕으로 인정받아 스웨인 에스트리손(Sweyn Estridsson) 왕까지 겸임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하랄이 노르웨이 왕좌를 되찾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이미 올라프의 후계자가 왕좌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랄은 묘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하랄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그의 조카에게 왕위를 내놓을 것을 요구한다. 그는 이를 위해 우선 스웨덴 왕 아눈 야콥(Anund Jacob)과 다른 왕실인 스웨인 에스트리손(Sweyn Estridsson)과 즉시 동맹을 맺는다.

     

이들 연합군은 덴마크 해안을 따라 번개 같이 공격을 감행한다. 이에 맞서 매그너스(Magnus) 왕도 강력히 저항을 한다. 결국 하랄과 매그너스는 타협을 한다. 그 결과 하랄은 노르웨이를 통치하고 매그너스는 덴마크를 통치하는 것으로 타협을 한다. 그런데 1047년 매그너스가 법적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사망을 한다. 그러나 이미 매그너스가 죽기 전 덴마크 왕위 계승자를 하랄과 동맹을 맺은 스웨인 에스트리손(Sweyn Estridsson)으로 정해 놓은 것이 밝혀진다. 이로 인해 노르웨이와 덴마크 왕가는 극도의 혼란을 야기하게 된다.     


예상대로 하랄은 덴마크를 침략하는데 스웨인이 저항을 하자 하랄은 그를 제압하지 못하고 여러 해 동안 고전을 한다. 하랄은 15년 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다가 1065년 스웨인과 휴전을 하기로 결정한다. 그 덕분에 하랄은 바이킹으로서 선조들처럼 마지막 남은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잉글랜드라는 지역으로 펼쳐나갈 기회를 가지게 된다. 이때가 하랄의 나이 50세였다.          


앵글로 색슨 해롤드 곧윈슨의 부대 깃발과 1066년 잉글랜드의 헤럴드 왕이 스탬포드 브릿지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기념비



4. 마지막 바이킹 하랄의 죽음     


하랄은 더 이상 덴마크를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250년 넘게 수많은 바이킹들이 탐 낸 자원이 풍부한 잉글랜드로 관심을 돌린다. 여러 면에서 그의 결정은 북유럽 출신 바이킹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해외원정 지역으로서 잉글랜드를 정복하는 일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처럼 보였다.     


그러나 영국의 정치 환경도 하랄에게 별로 유리하지 않았다. 그동안 환경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잉글랜드는 그동안 덴마크 크누트 왕의 아들이 죽은 후 앵글로 색슨 통치하에서 통일을 이룬다. 게다가 영국의 새로운 왕 해롤드 곧윈슨(Harold Godwinson)이 이 지역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하랄 하르드라다는 해롤드 곧윈슨과 사이가 안좋은 그의 동생 토스티 곧윈슨(Tostig Godwinson)과 동맹을 맺는다.     


드디어 하랄은 1만의 병력을 이끌고 서기 1066년 잉글랜드 북부지역에 있는 티스(Tees) 강을 따라 진군을 한다. 이미 바이킹 시대 개막을 알린 린디스판 수도원을 침공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해안을 따라 침투를 했다. 그 후 하랄 부대는 계속해서 스카보로 마을을 향해 나아갔다. 하랄의 군대는 주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쉽게 항복을 받거나 승리를 거두며 잉글랜드 마을을 하나씩 점령해 나갔다. 하랄 부대의 우수한 전투력은 잉글랜드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스탬포드 전투에서 안탑깝게도 하랄은 최후를 맞게 된다. 위대한 바이킹 하랄이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 병사가 쏜 화살을 눈에 맞고 숨을 거둔다. 

     

스탬포드 브릿지 전투(Battle of Stamford Bridge)는 잉글랜드 북부에 있는 마을 스탬포드 다리에서 벌어진 전투인데 잉글랜드의 왕 해럴드와 하랄이 그의 동생 토스티 곧윈슨과 동맹을 맺고 벌인 전투이다. 이 전투는 잉글랜드 에드워드가 사망하자 잉글랜드 왕국의 왕위를 노린 노르웨이 하랄(3세) 하르드라다가 1066년 9월 8일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북부에 상륙해 그동안 해럴드 곧윈슨에게 반감을 품은 동생 토스티 곧윈슨과 손을 잡고 잉글랜드 왕위를 노리고 해럴드를 공격한 것이다.  

   

1066년에 잉글랜드를 침공한 하랄 하르드라다의 패배와 눈에 화살을 맞은 하랄 하르드라다를 보여주는 타피스트리


처음에 하랄 3세의 군대는 지역 저항군들을 무찌르며 거침없이 진격했다. 더구나 9월 20일 요크 근처에서 벌어진 풀포드 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요크를 점령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해럴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5일 후 스탬포드 브릿지에 나타나 하랄 하르드라다 군과 직접 전투를 치른다. 이 전투에서 하랄 하르드라다와 토스티 곧윈슨이 전사를 하자 노르웨이 최후의 바이킹은 사라지게 된다. 동시에 3세기 동안 이어온 바이킹 시대가 그의 죽음과 함께 종말을 맞이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진짜 바이킹 시대의 종말은 위대한 바이킹의 후손 롤로의 손자 노르망디의 윌리엄 2세가 잉글랜드를 침공하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잉글랜드 왕이 되려고 하랄이 잉글랜드를 침공했지만 전투에서 패하고 숨을 거두는 순간 하랄과 동시에 잉글랜드를 침공한 노르망디 영주인 또 다른 노르웨이 출신 바이킹 윌리엄 2세가 1066년 드디어 잉글랜드 왕이 된다. 그 후 노르망디의 윌리엄 2세는 잉글랜드를 통치하는 윌리엄 1세로 등극을 하고 더 이상 바이킹들이 잉글랜드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여러 조치들을 강구한다. 따라서 더 이상 바이킹이 잉글랜드를 침공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잉글랜드 왕이 된 노르망디의 윌리엄 공이 지배한 영토  

윌리엄은 정복왕(William the Conqueror, Guillaume le Conquérant: 1028년경~1087년)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기도 했는데, 윌리엄은 노르만 왕조의 시조이자 잉글랜드의 국왕으로 등극하면서 윌리엄 왕조의 시조가 된다. 윌리엄은 1035년 노르망디 공작이 된 후 잉글랜드를 점령하고 잉글랜드의 윌리엄 1세(William I)가 된 것이다.     


그는 노르망디 공국을 서프랑크 왕국(프랑스)과 대등할 정도로 발전시킨다. 그 후 막강한 노르망디의 세력을 등에 업고 1066년 10월 14일 도버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 침략을 개시한 것이다. 드디어 윌리엄 2세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잉글랜드 왕 해럴드 2세에게 크게 승리하고 잉글랜드를 점령한다. 이제부터 노르망디의 윌리엄 왕조가 잉글랜드 왕조로 바뀌면서 잉글랜드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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