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위대한 바이킹 하랄드 블루투스
영어로 하랄드 블루투스(Harald Bluetooth)로 알고 있는 하랄 블로탄 고름손(Harald 'Blåtand' Gormsson, 935년 경 ~ 986년 경)은 고름(Gorm) 왕(Gorm den Gamle)과 티라 데인보드(Thyra Dannebod)의 아들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Gormsson은 Gorm의 아들이라는 뜻이니 그가 바로 라그나르 로드브록의 막내아들 뱀눈 시구르드의 손자이다.) 그는 958년 경부터 덴마크 왕이 되었고 970년 경부터 노르웨이 왕이 되어 두 나라를 다스린다.
하랄드 블루투스는 바이킹 시대 초기에 이미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통합하고 왕이 된다. 또한 당시 가톨릭이 전파되던 분위기를 좇아 덴마크를 기독교(가톨릭) 국가로 개종시킨 장본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도 한 유명한 반지 모양의 요새를 건설한 덴마크 왕국의 대표적인 바이킹 출신 군주이다.
트렐레보르(Trelleborg)라고도 부르는 반지 모양의 요새는 11세기 초 노르웨이의 군사적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 기지로서 뿐 아니라 무역 활동을 하는데 주요한 기지로서 역할을 하는 등 여러 목적을 가지고 건설되어 사용되었다.(* 오늘날 바이킹 박물관이 있는 덴마크 중부지방 트렐레보르에 원형 모양의 성곽 유적이 남아있다.)
최근까지만 해도 당시 하랄드 블루투스 왕이 거느린 바이킹에 대한 연구는, 하랄드 왕의 바이킹 부대의 용맹스러움과 대단한 기동성에 주로 관심이 집중되어 바이킹들의 출신지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들이 주로 덴마크 인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은 2011년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고고학 저널 중 하나 인 영국의 'Antiquity' 저널에 실린 논문을 보면, 지금까지의 연구와는 다른 결과를 내놓아 주목을 받는다.
노르웨이 대학을 비롯해 오르후스 대학(덴마크)과 코펜하겐 대학(덴마크), 그리고 미국의 위스콘신의 매디슨 대학(University of Duncan)의 고고학자들이 공동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트렐레보르(Trelleborg)의 토루에서 발견된 48개의 해골을 조사한 결과 이들의 유골 절반 이상이 덴마크인들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연구자들은 그동안 바이킹 시대에 요새 근처에서 발견된 해골에서 여러 개의 치아와 두골 샘플을 수집하고 '스트론튬 동위 원소 분석'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여 주의 깊게 분석을 실시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이들의 유골에서 정확한 지리적 기원을 추적할 수는 없었지만 이전에 트렐레보르에서 발견된 도자기와 무기 등의 고고학적 특성과 가치 등을 고려해 볼 때 이곳에 묻혀있는 바이킹들 출신지가 노르웨이나 발트해의 남부 해안선(현재의 폴란드 지역)에 기원을 두고 있을 확률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다.
오르후스 대학의 선사시대 고고학 부문의 전문가인 안드레 지그프리드 도바트(Andres Siegfried Dobat) 박사에 따르면, 외국 용병은 하랄드 블루투스(Harald Bluetooth)의 통치뿐 아니라 수세기 동안 덴마크 국가 발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도바트 박사는 자신의 주장을 덴마크 오르후스 인근 이고(Egå)에서 발견된 특정한 루네스톤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밝혀낸 것이다. 이고(Egå)에서 또한 노르웨이 출신의 케틸(Ketill)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유골도 발견되었는데 그는 아마도 블루투스의 호위병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트렐레보르에 있는 개인 묘소에서 발견된 금과 은으로 도색된 전투용 도끼는 폴란드 왕국, 또는 발트해의 남쪽 해안선에 위치한 곰스보르(Gomsborg)에서 제작된 것으로서 사망한 전사의 출신이 어디인지를 암시하는 주요한 단서이기도 하다. 현재 하랄드 왕의 바이킹 선단은 그들의 소장품과 유골 형태들을 통해 볼 때 폴란드 출신 용병들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이미 덴마크 바이킹들은 덴마크 출신의 바이킹들 뿐 아니라 폴란드를 비롯한 다양한 인근 해외 주민들의 참여로 흡사 외인부대나 해외용병과도 같은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해외용병들의 참여는 바이킹 선단의 사기는 물론 용맹함이나 전투력 향상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바이킹 선단의 용감함과 살인적인 전투력의 근원이 바로 여기서 비롯되고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 1996년에 있었던 인텔, 에릭슨, 노키아 그리고 IBM 같은 회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들은 표준 무선 규격을 만들기로 합의한다. 이때 바이킹 ‘롱쉽’을 읽던 인텔 출신의 짐 카다크(Jim Kardach)라는 시스템 엔지니어가 블루투스 왕의 이름 머리글자 H와 B를 뜻하는 루네 문자를 합쳐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블루투스 로고를 만든다. 그런데 '블루투스'라는 이름은 10세기경 처음으로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통합한 덴마크의 하랄 블로탄(Harald Blåtand) 국왕의 별칭이 1140년에 출간된 '로스킬레 연대기'(Chronicon Roskildense)에 "푸른 이빨 왕"이라고 한 것에서 유래했다. 블로탄(Blåtand)을 영어식으로 번역한 단어가 블루투스(Bluetooth)인데, 블루베리를 엄청 좋아해 치아가 얼룩질 정도로 매일 즐기는 바람에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2. 무적의 전사 ‘욤스바이킹’
신비스러운 무적의 전사 욤스바이킹(Jomsviking)은 정규 훈련을 받은 바이킹 전사들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들은 북유럽 출신들로 이루어진 군대가 아니었기에 엄격한 규율을 필요로 했다. 이들이 두려움 없이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간에 존재한 형제애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언제나 철저히 명령에 복종하도록 훈련을 받았는데, 특히 11가지 규칙을 정해서 이를 실천하고 따랐다. 만일 바이킹 전사로서 이 규칙을 위반하면 규칙에 따라 즉각 처벌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욤스바이킹은 아이슬란드 신화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슈퍼 영웅이랄 수 있다. 이들은 전설적인 용병으로서 언제나 뛰어난 전술을 사용하고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곳은 그야말로 언제나 죽음을 불사하고 최선을 다하는 용맹스런 바이킹이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신원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간혹 이들에 대한 역사가들의 판단도 모호한 입장을 견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과연 이들의 존재는 무엇이었으며 어디서 출현했는지 등 의문투성이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아이슬란드 사가에 기록된 내용들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점차 이들의 구체적인 실체가 드러나 그들의 행위들이 사실임이 밝혀지고 있어 신비스러운 이들의 존재에 대한 궁금증이 서서히 풀려가는 중이다. 아이슬란드 사가에서 밝히고 있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다국적 출신의 용감한 북유럽 바이킹들은 발트해 남부 해안 요새인 곰스보르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욤스바이킹(Jomsvikings)의 존재가 정확히 언제, 어떻게 출현하게 된 것인지는 완전히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들은 덴마크 왕인 하랄드 블루투스가 설립과 후원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랄드 왕은 욤스바이킹의 지도자가 될 핀(Fyn) 섬의 전설적인 덴마크 영웅이자 수장인 팔나토크(Palnatoke: "Toke the Archer")를 선택해 욤스바이킹 선단을 맡긴다. 그는 또한 욤스바이킹에게 가장 중요한 바이킹 함선 롱쉽(Longship)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볼 때 욤스바이킹에 대한 기본적 윤곽을 대충 알 수 있다.
이들은 욤스보르(Jomsborg) 요새를 근거지로 삼아 해외 원정을 시작한다. 하랄드 왕의 노련한 지략과 욤스바이킹 군단의 용맹스러운 전투는 언제나 빛나는 무공을 세운다. 따라서 욤스바이킹 선단을 중심으로 한 바이킹의 활약상은 빛나는 승전보를 계속해서 울리게 된다.
그러나 그 후 오랫동안 이들의 이야기는 마치 신화 속 이야기처럼 취급되는 바람에 바이킹 역사를 분석하는데 상대적으로 곤란을 겪게 된다. 다행히 21세기에 이르러 북유럽 여러 나라들이 자신들의 국제적 위상 제고와 자국 내 국가 이미지 제고 등을 고려한 연구를 통해 바이킹 시대와 바이킹 활동에 대한 관심을 집중하면서 이들에 대한 연구도 어느 정도 성과를 올리게 된다.
이에 따라 2009년도에 주목할만한 고고학 발견이 이루어진다. 잉글랜드 남쪽 해안가 도셋(Dorset) 지역의 웨이머스(Weymouth) 마을 인근에서 역사학자들이 고대 바이킹 함대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처음에는 고대 로마 병사 또는 앵글로 색슨의 것으로 추정했지만 나중에 밝혀진 조사 결과는 이 흔적의 내용물들이 대부분 전설적인 욤스바이킹들의 시체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전자 감식을 한 결과, 발굴된 해골들은 모두 20대 정도의 북유럽 출신 젊은 남성들 것으로 밝혀졌다. 그들 중 일부는 아직도 온전한 이빨을 가지고 있기도 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 해골들 중에 목과 머리뼈에 자국이 있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뒤에서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유로 인해 집행자가 정면에서 이들을 살해했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런 살해 방법은 아이슬란드 사가(Icelandic Saga)에서도 언급되어 있는데, 용맹한 바이킹들은 절대로 뒤에서 살해하는 방법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가에는 그와 함께 바이킹들끼리 상호 간에 형제애를 발휘해야 하는 암묵적인 규칙 등에 관한 것들도 실려있다. 이를 바탕으로 볼 때 바이킹들의 철저한 자기 관리와 단체로서의 행위 지향성 등은 조직관리라는 차원에서 대단히 근대적인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고 하겠다.
3. 욤스바이킹의 11가지 규칙
욤스바이킹들은 엄격한 행동 강령에 따라 움직였고, 바이킹에 대한 복무는 구성원들이 자발적 지원에 따랐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11가지 규칙을 자율적으로 준수하고 따랐다.
1) 바이킹에는 18-50세 사이의 남성만 들어올 수 있다.
2) 가입 신청 시 가족 배경은 고려하지 않는다.
3) 적의 얼굴을 회피하는 것은 금지한다.
4) 각 구성원은 동료를 형제처럼 보호하고 그의 죽음에 대해 반드시 복수를 해야 한다.
5) 두려움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금지한다.
6)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은 동료들이 모두 똑같이 분배한다.
7) 동료 간에 싸움은 금지한다.
8) 동료의 병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지한다.
9) 요새를 공격할 때는 여성이나 어린이는 참여시키지 않는다.(그 결과 전투로 인해 여성과 어린이가 포로가 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10) 겨울철에는 누구라도 허락 없이 3일 이상 욤스바이킹 선단(욤스보르)을 이탈해서는 안된다.
11) 동료들 간에 발생한 불화는 지도자가 중재해야 한다.
스웨덴 최남단 말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스타드(Ystad) 외곽에 있는 작은 마을 스웨럽(Sjörup)에는 욤스바이킹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루네스톤이 세워져 있다. 이 기념석은 아스브웨른(Asbjörn)이라는 사람이 서기 984년에 죽은 사람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루네스톤에 기록된 내용은, "웁살라에서 도망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 죽은 자가 해외 원정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도망치지 않고 용감하게 전투에 임한 것을 기린 것으로 보인다. 이런 내용들은 웁살라에서 발견된 다른 루네스톤들에서도 발견된다.
대개의 경우 발견된 루네스톤에 기록된 내용들이 바이킹들 무용담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용맹스러움과 형제애에 관한 내용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루네스톤은 바이킹들의 용맹스러움과 위대함을 느낄 수 있는 증거라고도 하겠다.(* 욤스바이킹의 첫 번째 지도자인 스토르브웨른(Storbjörn)은 웁살라에서 사망한다. 아마도 루네스톤에서 언급된 사람이 바로 욤스바이킹의 첫 번째 지도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욤스바이킹은 서기 984년과 986년에 스웨덴과 노르웨이에서 발생한 왕조 분쟁에 개입을 하기도 하는데 서기 1000년경에는 북유럽에서 벌어진 가장 치열했던 스쿠알렌 전투에서 혁혁한 성과를 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당시 아쉽게도 노르웨이의 왕 올라프 1세(Olaf I Tryggvason)가 스볼더(Svolder) 전투에서 죽음을 맞는다.
4. 북해제국의 건설과 몰락
스베인 포크비어(Sweyn Forkbeard: 960-1014), 그는 영국에서 왕으로 등극한 첫 번째 바이킹 출신이자 토속종교인 이교도(pagan) 신자였다. 스웨인 왕은 하랄드 블루투스(Harald Bluetooth)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 기독교 교회에 순종했으나 결코 개종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 받지도 않았고, 이교도 이름을 계속 사용한 바이킹 전사였다.
스베인 포크비어는 987년 기독교도인 아버지를 축출하고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기도 하다.(* 일설에는 블루투스 왕이 암살되었고, 아들 스베인이 암살을 사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아버지가 세운 기독교 국가에 반기를 들고 다시 원래의 토속종교 파간으로 돌아간다. 그 후 스베인 포크비어는 잉글랜드와 노르웨이를 정복하기 위해 바이킹 전함을 이끌고 또다시 정복길에 나선다. 바이킹 전사들은 바로 욤스바이킹 군단이었는데 이미 데인로(Danelaw) 지역으로 설정되었던 곳이었고 노르웨이 역시 아버지 블루투스 왕이 통치를 했던 곳이었다.
스베인 포크비어는 서기 1000년에 노르웨이를 점령하고 1002년에는 잉글랜드에서 데인인에 대한 대량 학살에 대한 복수를 빌미로 1003년 대대적인 원정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로 쳐들어간다. 그 후 스베인 포크비어는 1013년 잉글랜드를 상대로 완전한 대승을 거둔다. 이 일이 있은 후 스베인은 잉글랜드 전체의 왕으로 인정받고 스베인 포크비어에게 패한 앵글로 색슨 왕 에셀레드 2세(Ethelred II)는 노르망디로 망명한다. 그 결과 그의 사후 아들 크누트 대왕이 1042년까지 지배하는 북해 제국을 건설하는 기반을 마련한다. 또한 스베인 포크비어가 거주하던 지금의 로스킬데는 사실상 덴마크의 수도가 된다.
드디어 1013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스베인 포크비어는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그는 운명의 여신에게 버림을 받았는지 조만간 아버지 블루투스에게 했던 것처럼 잠자는 사이에 그 역시 암살을 당한다. 그가 죽기 전까지 왕으로 살았던 기간은 불과 5주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스베인 포크비어를 암살한 사람이 기독교 암살단의 일원이라고 하는데 포크비어 왕이 파간(이교도)신자였기에 불운을 당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욤스바이킹의 본거지인 욤스보르(Jomsborg)는 서기 1043년경 노르웨이 출신의 매그너스 더 굳(Magnus the Good)이 공격을 해 오는 바람에 이때 모두 파괴되고 만다. 아이슬란드 사가에 의하면, 노르웨이 왕 매그너스는 욤스보르의 사람들을 모두 살해하고 철저하게 도시와 주변 지역을 불살라 파괴해 그 흔적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설적인 욤스바이킹의 존재가 흔적도 없이 그렇게 사라지고 말자 크누트 더 그레이트 왕의 북해 제국도 조만간 몰락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