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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Mar 03. 2019

두만강 발원지를 가다

1. 옥녀 늪 전설          


연변대학에서 개최되는 남북중 3개국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연길에 당도한 후 우연한 기회에 연길 신문사 기자와 만나게 되었다. 그와 백두산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연변자치주의 젖줄인 두만강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이어졌다. 그런데 문득 그 기자는 생각지도 못한 문제를 제기하며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남측 기자라는 사람이 두만강 발원지도 제대로 모르고 기사를 쓰느냐”라고 항변을 한다.    

 

그 후 필자는 그 남측 기자라는 사람이 쓴 글을 찾아서 읽어보았다. 어쩌면 그리도 생각이 단순할까, 아니 아예 다른 가능성과 역사성에 대한 조금의 이해도 없이 무슨 글을 쓰겠다고 했던 건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그가 쓴 글은 정말이지 그럴싸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압록강과 두만강은 모두 백두산에서 시작한다. 남서쪽 비탈에서 흘러내린 물은 압록강이 되고 동쪽으로 흐른 물은 두만강이 된다. 천지에서 장백폭포로 흐르는 물은 북쪽으로 흘러 지린성의 젖줄인 송화강이 된다.”(*2017년, “압록강 2000리 국경을 달린다.”중에서) 우리나라 지도에 백두산 좌우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흐르고 있으니 단순하게 그리 생각을 했을 만도 했겠다. 더구나 우리의 자존심인 백두산을 그의 글에서는 대부분 ‘장백산’이란 중국식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여, 사실을 확인할 겸 두만강 발원지에 대한 탐색을 하자고 나섰다. 


두만강 발원지는 어느새 유명 관광지가 되어 있었다. 최근에 중국 정부는 한국 측 관광객들 주머니를 노린 것인지 북중 국경선 인근에 있는 몇몇 장소를 아예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더 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두만강 발원지는 한 곳이 아니라 사실은 두 곳이다. 한 곳은 중국 측이 ‘천녀욕탕지’라는 이름을 붙인 옥녀 늪이고,  다른 한 곳은 홍토산이라 부르는 붉은 산 구릉지대에 숨어있는 맑은 샘이다.     


백두산 천지를 내려와 10여 km를 달려가면 첫 번째 두만강 발원지인 옥녀 늪에 닿는다. 8월 말에 찾은 발원지 초입에는 가을 분위기를 듬뿍 이고 있는 용담이 소담스레 피었다. 설악산에서 초가을이면 고운 속내를 보여주던 용담을 이곳에서 만나니 더욱 반가웠다. 그뿐 아니라 가을의 전령사 쑥부쟁이도 한창이었다.     

 

옥녀 늪으로 가는 길가에 피어있는 야생화들


드디어 한참을 걸어 두만강 발원지에 당도했다. 중국이 붙인 이름 ‘천녀욕탕지’, 하늘의 천사가 내려와 목욕을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 그래서 이름을 그리 지었다고 했다.     


오래전 하늘에서 세 선녀가 천녀욕탕지의 아름다운 풍경과 맑은 물을 좋아해 자주 내려와 목욕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세 선녀가 또다시 이 곳으로 내려와 목욕을 하는데 어디선가 까치 한 마리가 나타나 붉은 과일을 물어다 셋째 선녀의 옷에 내려놓고 갔다. 셋째가 반짝반짝 빛나는 붉은 과일이 탐스러워 입으로 한입 베어 물고 꿀꺽 삼켰다. 그 순간 선녀는 그만 임신을 하게 되고 다른 선녀들과 헤어져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그 후 셋째는 아들을 낳았는데, 짙은 눈썹에 큰 눈, 매부리코에 입이 큰 아이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비범했는데 말을 할 줄 알고 심지어 뜀박질까지 했다고 한다.     


선녀는 아들에게 시문과 병서를 가르치고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가르쳤다고 한다. 아들이 성장하자 선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 “너는 내가 붉은 과일을 먹고 낳았으니 성은 아이신줴로(愛新覺羅), 이름은 부쿠리온순(布裤净利昂)이니라. 너는 하늘의 뜻을 받들고 인간세상에 왔으니 커서 하늘의 뜻에 따라 나라를 다스려야 할 것이다.” 그 후 부쿠리온순은 여진족 금나라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훗날 중국 정부는 이 늪을 성지인 ‘천녀욕탕지’라는 이름으로, 장백산(백두산)을 여진족의 발상지로 지정했다고 한다.     


옥녀 늪


1908년 중국 북경(베이징) 자금성에서 청나라 마지막 황제가 즉위한다. 중국은 문화혁명을 거친 후 1959년 그를 친일 전범자로 ‘중국 푸순 전범 재판소’ 법정에 세운다. 그리고 이때 재판관은 그의 이름을 부른다. "아이신줴러(愛新覺羅) 푸이(溥儀), 나이 53세, 만주족 북경 출신...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     


바로 그의 성씨인 아이신줴러(愛新覺羅)는 다름 아닌 금나라 시조의 성씨를 이어받은 것이다. 더구나 금나라 시조에 대한 것은 이미 여러 미디어와 역사학자들의 연구가 밝혔듯이, “금나라 시조는 신라의 후예였다.”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금사(金史)>에는 “금나라 시조의 휘는 함보(函普)이고, 고려로부터 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흠정만주원류고>에도 “<통고>와 <대금국지>에 모두 금나라 시조는 신라로부터 왔으며 성은 완안씨(完顔氏)라고 되어 있다.      


<흠정만주원류고>에서 이처럼 금나라의 연원이 신라로부터 기인되었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이 책의 ‘부족’ 편과 ‘강역’ 편에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처럼 신라의 9주가 현재의 만주 지역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나라가 이처럼 요나라에 이어 강력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금나라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민중들이 고구려 발해를 이어온 부족들이었기 때문이다.     


해발 1270m에 위치한 이곳은 원형 형태의 늪으로 깊이 1m, 직경 250m, 둘레 1km, 걸어서 도는데 1시간 정도 걸린다. 이 늪에서 땅속으로 스며든 물이 두만강이 되어 흐르며 강을 이룬다고 한다. 이 옥녀 늪에는 중국 측이 세운 표지석만 설치되어 있어 아쉬웠다. 한글로 된 안내판 정도 하나라도 있었다면 좋으련만 중국지역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그리 하지 못한 것으로 보여 정말이지 아쉽기만 했다.     


신라가 망하면서 왕건의 추적을 피해 마의태자란 이름의 또 다른 경순왕의 아들이 이곳에서 금나라를 세우고 중국을 통합해 가는 과정을 비석으로 새겨놓을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문득 ‘천녀욕탕지(天女浴盪池)라는 한자말이 천박하 다는 느낌이 들었다.     

옥녀 늪가에 설치된 '천녀욕탕지' 비석


천녀욕탕지는 간단히 둥근 연못이란 뜻으로 원지(圓池)라고도 부르는데 장백산 동쪽 홍토산 아래에 위치해 있다. 최근에 중국이 두만강 필수 관광코스처럼 개발을 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고 있다.      


이 늪은 백두산 북파 산문에서 33Km, 숭선진에서 58Km 떨어져 있다. 또한 이 늪은 홍토산 구릉지대의 두만강 발원지인 맑은 샘에서 약 3 km 정도 떨어져 있다. 한편, 거울같이 맑은 호수 ‘천녀욕탕지’는 조선족들이 우리말로 ‘옥녀 늪’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늪이 그처럼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게 된 데에는 피눈물의 역사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백두산 일대에 항일유격대가 활동하던 일제강점기 시절, 두만강변에 조그마한 부락에 인물 곱고 마음씨 착한 옥녀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옥녀의 남편 철석이는 신출귀몰한 유격대 대장이었는데, 수시로 왜놈들에게 치명타를 입혀 항일유격대 대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후에 일본군 토벌대가 유격대 연락원 역할을 하는 옥녀의 뒤를 밟아 백두산 근처에 있는 유격대 기지로 숨어들었다. 옥녀가 이를 눈치채고 오히려 일본군을 잠복해 있던 유격대 포위망으로 유인해 온다. 그러나 옥녀 자신은 일본군의 끈질긴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옥녀 늪가에 우뚝 솟은 벼랑 위에서 그만 늪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유격대원들은 일본군을 섬멸한 후 옥녀를 늪에서 건져내어 늪가에 정중히 묻어 주었다. 그때부터 이 늪을 ‘옥녀 늪’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비록 1헥타르 남짓한 자그마한 늪이지만 이처럼 숭고하고 장엄한 역사를 지닌 늪은 그 후 일제가 물러간 후 오늘날까지 뭇사람들 가슴을 설레게 하는 큰 울림으로 남아 있다.(* 이런 이야기도 옥녀 늪 부근에 비석으로 새겨 놓았으면 좋으련만...)           


또 다른 두만강 발원지로 들어가는 입구
북중 국경에 설치된 차량 통제 방책과 철조망



2. 북한에 있는 두만강 발원지     


이번에는 두 번째 두만강 발원지를 찾아간다. ‘옥녀 늪’에서 또다시 10여 km를 달려가면 만난다. 그런데 이곳은 중국 내에 있지 않고 북한 지역에 위치해 있다. 이곳을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월경을 해야만 한다. 북한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몰래 북한으로 월경을 한다. 

    

두 번째 두만강 발원지인 풍경구는 백두산 동쪽 줄기가 뻗어있는 북중 국경지역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백두산 북파 산문과 35Km, 숭선진과는 56Km 떨어져 있다. 이곳을 흔히 두만강 발원지라고 한다. 이곳은 백두산 백두봉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이곳에서 시작한 물줄기에 몇 갈래의 강물이 흘러들어 두만강을 이룬다. 두만강은 그렇게 조선의 홍토산에서 약 3Km 흘러온 홍토산수와 중국 쪽에서 흘러온 무수린 강물이 합류하면서 북중 두 나라 국경선을 이룬다.      


북한 경계를 넘어 들어가다 보니 북한과 중국 측이 각기 세운 국경 표지석이 보인다. 한데 북한이 세운 국경 표지석은 쓰러져 있고 그 자리에 중국에서 세운듯한 경계석이 자리하고 있다. 그 곁을 따라 100여 미터 더 들어가면 바로 두만강 발원지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작은 물줄기가 두만강이 되어 흐르기 시작한다.  

    

이 작은 물줄기는 마치 여늬 산에서 본듯한 작은 옹달샘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이 샘 부근은 온통 잡초로 무성했다. 관광지로 준비된 곳이 아니기에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여기가 북한 지역이라는 생각에 긴장감이 들었다.     


아무튼 이곳은 아직 큰 물줄기가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라 트럭으로 중국과 북한을 오갈 수 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북한과 중국 사이에 차량을 이용해 한때 밀수가 성행하기도 해 그 대책으로 중국과 북한 경계지역인 두만강 상류 위쪽 지역에 경계석을 박아놓았다고 했다. 그러니까 밀수방지용 말뚝을 박아놓은 셈이다. 또다시 북한 영내를 벗어나 중국 측으로 나왔다. 나오고 보니 국경을 넘지 말라는 플랭카드가 을씨년스럽게 나풀거린다.    

 

북한측 비석이 쓰러진 자리 바로 근처에 중국측 비석이 서있다.
이 옹달샘에서 시작해 민족의 한을 품은 두만강이 흐르기 시작한다.


한편, 두만강 발원지인 북중 경계선에는 21호 비석이 있었다. 이 곳은 일명 ‘홍토산’, 또는 ‘붉은 산’이라 부르는 구릉지대이다. 비록 평탄해 보이는 구릉지대이기는 하지만 이 지대 자체가 높은 지대여서 해발 1321미터에 달한다. 또한 이 맑은 샘이 있는 일대를 ‘삼각지대’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북중 간 경계석 세 개가 삼각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21호 비석이 세워진 이 삼각지대 안에 조그마한 샘이 있다. 이 샘은 동서로 1.5m, 남북으로 2m 정도 남짓한 작은 샘이다.  수정같이 해맑고 정갈한 이 작은 샘은 주변에서 흘러든 다른 물줄기들과 합류하면서 두만강을 이루기 시작한다. 이곳은 동경 128도 27분, 북위 42도 1분이다.   

  

이 샘에서 흐르는 실개천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면 붉은산에서 발원한 홍토수 옥녀 늪, 일명 천녀욕탕지에서 흘러내려온 약류하, 석을수, 무두봉 기슭의 삼지연에서 흘러나오는 홍단수가 합류하면서 제법 큰 하천을 이루어 동쪽으로 그 흐름을 이어간다. 이 개울물은 드디어 조어대(김일성 낚시터)에 이르러 물살이 세어지고 유속도 빨라지기 시작한다.     


조어대를 북한에서는 무포숙영지라고 부른다. 일명 김일성 낚시터라고 불리는 이곳은 강폭이 불과 5m 정도에 불과해 북한과 중국 측 병사들이 서로 마주하고 담배를 주고받을 정도로 강폭이 작은 곳이다. 이 곳은 일제강점기 시절 김일성이 낚시를 했다는 이야기 때문에 유명해진 곳이다.     

 

1939년 5월 김일성은 동북 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을 거느리고 함경북도 무산 지구로 진격해 대홍단 전투 등 무산지역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다. 부대가 잠시 이곳에 머무르면서 야영을 할 때 김일성은 이곳에서 산천어를 낚으며 일본군을 무찌를 작전을 구상한다. 무산 지구 전투 이후 김일성은 계속해서 두만강 연안인 화룡현에서 올기강 전투와 대마록구전투, 홍기하 전투 등 일련의 전투를 벌이며 일본군을 제압했다고 한다.


지난 70년대에 중국이 설치한 조어대, '김일성 낚시터'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서부터 두만강 강폭이 제법 넓어지고 물살도 거세어진다.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962년 어느 날 김일성은 이곳을 다시 찾는다. 이때 김일성은 그 당시처럼 이곳에서 낚시를 하면서 ‘김일성 주체사상’을 구상했다고 한다. 그 후 1971년 9월 4일에는 그의 아들 김정일이 이곳을 찾아와 자신의 혁명사상을 위대한 김일성주의로 정식화하는 원대한 구상을 완성하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이런 연유로 북에서는 이곳을 애국주의 선전 기지로 지정하고 해마다 수만 명의 북한 주민들을 이곳에 보내 김일성 사상을 배우고 익히도록 교육을 한다고 한다.     


그 후 70년대에 이르러 중국 측은 ‘김일성 낚시터’라는 이름을 의식했는지 이곳에 낚시하기 좋게 나무로 만든 평상을 설치한다. 중국 측에서는 그때부터 이곳을 전초(낚시터), 또는 물고기를 잡는 장소라는 뜻으로 조어대란 명칭을 사용한다. 아무튼 조어대는 숭선진에서 46Km, 두만강 발원지에서는 10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  


두만강 발원지에서부터 흘러온 두만강 물줄기는 이곳 조어대까지 강폭이 그리 넓지도 않거니와 수심도 그다지 깊지가 않다. 강물은 어른 무릎 정도에 불과한 듯 보이는데 이곳을 지나면서 물살은 급격히 세어지고 강폭도 넓어진 걸 볼 수 있다. 이곳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두만강은 푸르른 물줄기를 이루며 힘차게 동해를 향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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