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종수 Feb 27. 2017

눈먼 자들의 도시



1.


어떤 도시에서 다소 괴기한 일이 벌어졌다. 이 도시 주민 모두가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집단 실명에 걸리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지니고 있던 도덕성과 윤리성을 모두 내팽개치고 한낱 동물적 존재로 변해간다.


이 소설은 이처럼 빠르게 붕괴되어가는 윤리적 상황 속에서 인간은 과연 무엇을 좇고,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그려내고 있다. 1995년 포르투갈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주제 사라마구가 쓴 장편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의 주제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한  남자가 차길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중 갑자기 눈이 멀어버린다. 다행히 그는 거리에서 만난 누군가의 안내를 받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간다. 그 사건이 시발점이 되어 그를 간호한 아내와 남자가 치료받기 위해 들른 병원의 환자들, 그리고 그를 치료한 안과 의사 모두 눈이 멀어버린다.


환자들은 기존의 평범한 실명과 달리 모든 것이 하얗게 보인다고 했다. 그래서 이 증상을 "백색 실명"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이 집단적 실명 현상을 정부는 일종의 전염병으로 취급한다. 그에 따라 사람들은 실명에 대한 극심한 불안감을 지니게 되고, 정부는 단순히 백색 실명을 겪는 사람들을 격리 수용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런데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실명을 당하고 있는데도 유독 한 사람, 의사의 부인만은 다행히 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병동에서 오직 그녀만이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한다.


군인들은 자신들도 전염될까 봐 사람들을 총으로 무자비하게 죽이고 그중 한 무리는 자신들의 성욕을 채우기 위해 주인공인 의사부인을 데려오라고 소리친다. 그 장면을 목격한 주인공은 그들 중 우두머리를 가위로 찔러 살해한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해 병동에 불이 붙게 된다. 병동을 지키던 군인들과 이 병원에 수용되었던 사람들 모두 병동 밖으로 뛰쳐나온다. 그 사이 군인들도 모두 실명이 되어 버렸다.


도시의 사람들은 모두 눈이 멀어 음식을 찾으러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아무 데나 배설을 한다. 개들은 길거리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뜯어먹는다. 눈이 보이는 의사의 아내는 남편과 다른 눈먼 사람들, 그리고 아이들과 노인 등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간다.


거기서 그들은 음식을 찾아 먹고, 몸을 씻고 잠을 청한다. 이런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맨 처음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던 남자의 시력이 회복된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눈먼 자들 역시 차례로 시력이 회복된다. 의사부인이 삶을 위한 마지막 시도로 시골로 떠날 것을 고려하던 순간, 최초로 실명했던 회사원이 시력을 되찾고 이후 시력을 잃은 순서대로 다시 시력을 되찾게 된다.




2.


눈을 뜨고 있지만 보지 못했던 행복과 소중함, 이런 것들을 눈이 멀게 되어서야 사람들은 진정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은 눈이 멀었던 게 아니라 보지 않았던 것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들 역시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일까?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들이 너무 많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공연한 기우일까?


태극기로 모든 지난 시절의 폐악과 부도덕, 그리고 심지어 작금의 국정농단 사태까지 덮어버리려는 자들은 눈먼 자들의 도시를 획책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특검 연장을 승인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린 대통령 권한대행이나, 국회에서 제적의원 2/3를 차지하고 있는 야 3당이나, 또 여야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며 헌법에도 명시된 작금의 국가위기 상황을 정말 도외시하고 국민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는 국회의장의 기이한 처세술이나 모두 눈먼 자들의 소행과 다를 바가 없다. 오직 눈뜨고 있는 의사부인 같은 이는 과연 어디에도 없는가?


다행히 횃불과 희망으로 민주주의를 사수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덕분에 민주주의는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말을 이제는 초등학교 학생들까지 자연스레 이해하게 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여전히 눈먼 자들은 도시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나야 모두들 눈을 뜨고 제대로 볼 수가 있을 것인가?


오늘을 사는 우리는 눈먼 자들을 돌보면서 그들이 보지 못하는 세상의 온갖 추악한 것들을 계속 보고 있어야 한다. 눈이 멀지 않은 자는 오히려 육체적 정신적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그래서 눈뜬 자는 눈먼 자들의 패악질로 삶의 작은 기쁨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눈먼 자들의 비인간적이고 이기적인 행동들을 계속 목격해야만 한다.


신이 있다면 그 신의 버림을 받은 이는 과연 누구일까. 눈이 멀어버린 자일까? 아님 그들을 보호하고 지켜주고 뒤에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기쁨을 얻을 기회를 잃어버린 눈이 보이는 사람일까? 눈이 보이기 때문에 모든 더러운 일을 목격하고 있는 눈이 보이는 자는 과연 어떤 기쁨을 얻을 수 있는가 말이다.


눈먼 자들이 눈을 뜨고 얻게 될 기쁨과 행복의 크기만큼 눈뜬 자도 그런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차라리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눈이 멀어버렸다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야 모두 공평하게 기쁨을 얻을 기회를 가지게 될 게 아닌가 말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

#눈먼 자들이여 눈을 뜨거라

#눈뜬 자들은 부디 아프지 말지어다



매거진의 이전글 2017, 새해를 맞으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