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양치질 : 온전한 나를 맛보는 법

감각의 영점조절과 존재의 확인에 대하

by 정유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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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맛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꼼꼼한 양치질이다.


바른 칫솔질로 치아 표면의 음식찌거기를 닦아내고, 치실을 써서 치아 사이 옆면에 쌓인 프라그를 떼어낸 뒤, 마지막 치간칫솔로 칫솔모가 닿지 않는 잇몸 안쪽의 오래된 노폐물들을 빼내면, 그동안 맛 향취를 가리던 냄새 성분들이 제거되면서 음식의 온전한 맛향을 느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매일 두어 번, 칫솔질과 치실과 치간칫솔을 동원해 위생관리 하는건 어지간한 정성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까지 부산떨지 않아도 음식 맛을 보는 데는 큰 지장이 없다. 이미 나의 미각과 후각이, 혐기성 세균들이 내뿜는 냄새 성분에 맞춰 영점조절되어 있어서 맛있는 음식, 맛없는 음식을 구분해낼 수 있다.


다만 이 때 미묘하고 섬세한 향들이 이 영점조절 과정에서 필터링 되어버린다. 강한 향취는 혐기성 냄새보다 강렬하기에 별 상관이 없는데, 약하고 미세한 향취들의 경우에는 혐기성 냄새 자극과 함께 싸잡혀서 잘려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 고급스러운 음식의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칫솔질을 꼼꼼히하는 것이 우선이다.


음식의 맛을 온전히 느끼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가 있다. 평소 꼼꼼한 칫솔질을 하지 않으면 내 맛향 센서가 영점조절 된 상태인지를 알 수 없다는 점이다. 혐기성 냄새가 영점조절 된 상태가 디폴트이니 그 냄새가 없는 상태는 나에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강하고 자극적인 음식에 대해서만 맛과 맛없음을 구분해낼 수 있고, 미세한 차이로 맛이 구분되는 음식들은 그저 밍밍하거나 비슷비슷한 맛으로 평가하며 진실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보고 배우고 깨닫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의 시선이, 양심이, 일전에 포스팅한 "영혼의 맑음 상태"가 어떠한지에 따라서 내가 보고 해석하는 세상의 모습이 달라진다. 탐욕과 위선으로 탁해진 영혼은 세상을 바라보는 디폴트값이 탐욕과 위선으로 영점조절되어 있다. 모두가 탐욕과 위선으로 살아갈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옳은 방법이라 믿는다. 어쩌다 순수한 선의나 진실을 마주해도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자신의 탁한 필터로 왜곡하여 해석한다.


여기서도 진짜 중요한 문제는 양치질을 안했을 때 자신의 맛향 센서가 영점조절 된 상태인지 모르는 것처럼, 평소 제 영혼을 갈고 닦지 않으면 자신의 영혼이 탁해져있는지를 본인 스스로는 모른다는 점이다. 그렇게 탁해진 창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되면 온전한 배움과 성장을 할 수 없거니와, 내 탁한 영혼이 만들어낸 혐기성 냄새를 사방에 풍기면서도 나 자신은 아무렇지 않은 무지의 무지 상태로 시나브로 젖어들어간다.


평소에 입을 벌려 꼼꼼한 양치질을 함으로써 온전한 음식의 맛향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수시로 내 생각과 행동을 메타인지로 읽어내며 엄격한 원칙 기준으로 성찰하고 반성해야한다. 그렇게 영혼의 탁함을 경계하고 맑은 상태로 가꾸어가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세상을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고 그만큼 성장할 수 있으며 혼탁한 세상의 함정을 피해 본래의 영의식 자리로 수월히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있음"의 느낌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사람은 너무나 당연스럽게 "내가 있음"을 안다.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무엇인가를 보고 읽을 수 있다. 나는 그것으로부터 뭔가를 느끼고, 생각하며,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다. 그 의지는 그 어디에서 흘러들어온게 아니다. 내가 감각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으므로 "내"가 존재한다는 건 절대 참이다.


조금 엉뚱한 상상을 해보자. 만약 내가 움직이지 못한다면 여전히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걸 알까? 생각하고, 판단할 수 없어도 나는 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을까? 소리도 냄새도, 바깥 세상의 모든 자극 일체를 감지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을 때에도 나는 내가 있음을 인식할 수 있을까?


전혀 그랬었던 적이 없었기에 쉽게 상상이 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잠에 든 후 깨어나기까지의 사이, 우리는 바깥 세상의 모든 자극 일체를 감지하지 못하는 상태를 경험한다. 거의 매일을 겪어온 일이기에 우리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주 잘 안다. 내 주관적 시간은 어제 밤의 마지막 컷과 오늘 아침의 시작 컷이 연속된 장면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객관적 시간에서는 그 사이에 수 시간 분량의 장면들이 흘러갔다.


나의 감각이 잠들게 되면 나는 객관적 시간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때 나의 의식은 "내가 있음"조차 느끼지 못한다. 다시 말해 내가 보고 듣고 감각해야 나는 "내가 있음"을 느낄 수 있으며, 내가 외부 세계에 대해 아무 것도 감지할 수 없으면 나는 "내가 있음"을 느낄 수 없다. 우리가 너무 당연하다 여기는 "나 존재" 느낌이란 게 그 자체로 독존하는 게 아니라 내가 보고 듣는 것들에 의존해야만 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내"가 존재하기 위해, "나"는 뭔가를 보아야 한다. 들어야하고 감각해야 한다. 감정을 느껴야하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나는 내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과정이 순조롭게, 그리고 강렬하게 감각될수록 사람은 자신의 존재함을 명료하게 느낀다. 그 반대로 과정 중 어느 하나가 미흡하거나 순조롭지 못하면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나 자신의 존재감을 잃는다. "나 존재"의 느낌이 희미해지는 건, 생명체로서 가장 근원의 공포인 죽음과 유사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무엇인가를 감각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려 한다.


현대 사회에서 나 존재를 드러내려는 욕망은 여러 층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된다. 권력 추구, 경제적 성공, 사회적 성취와 명예, 학벌, 학력, 명품 쇼핑, 맛집 탐방, 취향 자랑용 SNS, 인스타용 셀카, 매운 맛 댓글달기, 극렬 정치인 팬클럽 등등. 이런 것을 비판하려는 게 아니라 이런 각가지의 행동이 근원적으로 "나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그를 통해 스스로 "내가 있음"을 확인받기 위한 본능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걸 말하기 위함이다.


문제는 "내가 있음"을 더 강렬히 느끼고자 빠져드는 감각 자극으로의 중독이다. 내가 있음을 느낀다는 건 내가 보고 듣는 것,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서 기원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더 강렬하고 자극적인 주제들을 쫓으며 내가 있음을 확인하려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나 존재 느낌"을 충족하는 사이, 진짜 중요한 "나 존재"는 더 강렬하고 자극적인 것으로 분칠되어 간다. 나의 감각과 느낌이 곧 "나"이고, 그 "내"가 세상을 다시 감각하고 느끼며 "나 존재 느낌"을 채우기에, 의도적으로 "나 비워내기" 성찰을 하지 않는 이상, 물질계 지구에서의 삶은 영혼이 탁해져가는 방향으로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진정한 "나 있음"은 외부의 자극을 쫓고 의존하며 악다구니 지르는 상태가 아니다. 나 존재를 확인하려고 발버둥 칠수록, 역설적으로 가장 소중한 "나 존재"를 잃어버리는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게 된다. 지금 내 감각과 느낌이 유혹하는 그 자극의 끌림을 잠시 멈추고, 담백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세상 보기를 다시하려 노력할 때 내 영혼의 맑음을 지킬 수 있다. 닦아내고 비워내어, 온갖 세상의 탁함과 시끄러움 속에서도 오롯이 존재할 수 있는 평온한 나 자신을 찾아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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