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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A Feb 03. 2017

출근하지 않는 삶에 관하여

다시는 회사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것이

인생의 목표일 때가 있었다.


좋은 직장의 기준이란 굉장히 주관적이지만,


복지가 좋은 회사.

사람 냄새나는 회사.

저녁이 있는 삶을 지켜주려고 노력하는 회사.


라는 생각을 했었다.




자랑할 거리는 아니지만

3년 남짓한 직장 생활 동안 여러 회사를 접했다.


대기업을 다닐 기회는 없었지만,


돈을 많이 주는 회사,

내 위치가 공고해서 이것저것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회사,

팀원들이 너무 마음에 드는 회사,

월급은 적었지만 점심시간에 운동을 다녀올 수 있고 야근이 없는 회.


마지막에는 스타트업이라는 생태계를 깊게 경험해보기도 했고, 해외 출장도 몇 번 다녀왔다.





출근이라는 것을 안 한 지 어언 6개월 째이지만 직장 생활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주말 출근, 1시간 일찍 출근, 야근 야근 야근, 정신없는 피드백,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울렸던 전화, 회의를 위한 회의, 문서를 위한 문서, 손목 저림, 반사적인 ctrl c + ctrl v, 미팅 이동 미팅, 돈을 벌기 위해 양심을 속여가며 했던 말들, 살림살이로 가득 찼던 사무실 책상, 새벽에도 울렸던 업무 카톡, 목요병(일주일 중 목요일이 제일 일하기 싫은 병), 직장 상사 욕을 안주삼은 밤샘 드링킹과 네발로 기어가던 집, 회사를 위해 살았던 삶



들이 있었다.





정말 일이 힘들 때 적었던 메모장을 보면

어쩜 이렇게 불행한 인생을 살았지 싶은 글들이 가득하다.


'을' 이라서 힘들기도 했고, 

직책이 버거워 힘들기도 했고,

사람에게 상처 입어서 힘들기도 했다.


사는게 '꽃'같네





물론 좋았던 기억도 있다.



매일 아침 이불을 박차고 출근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사람들과 일했던 적도 있고,

성과를 인정받아 보상을 받아보기도 했고,

특별한 혜택과 안정적인 미래를 보장받기도 했었다.


조직관리 그리고 업무적인 면에서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이 한 때 그 힘든 출근을 견디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왜 회사를 그만두었냐고 물어보면,

더 이상 누구도 믿을 수 없어서였다.




마지막에 일하던 회사에서 믿었던 사람이 저질렀던 믿기지 않을 만큼의 엄청난 행동들과 그로 인한 결과물로 인해 미래를 고민할 시간도 없이 사표를 내고 베를린으로 도망을 갔다.


다시 다른 회사를 알아보고, 가서 적응하고, 사람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모든 일들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네가 좋지 않은 사람들만 만난 거야. 세상에 좋은 사람들도 많이 있어"라는 말을 해주기도 한다.


정말 그럴 수도 있겠지만

결국 모든 회사는 다 똑같다.

내가 내린 결론이다.



정리된 듯 정리 안 된 물건들 같았던 마음 상태


2016년 11월 귀국 후

다시는 회사에 가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먹고살기 위해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했다.

프리랜서를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전공은 아니지만, 예전에 같이 일했던 분들의 소개를 통해 건바이 건으로 몇 가지 일을 맡아서 돈을 벌고 있다.



그리고 좋아하는 와인일을 아르바이트로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로 와인 일을 시작한 매장



출근하지 않는 삶으로 바뀐 후 좋은 점 들은,


1. 평일 오전에 핫한 카페에 갈 수 있다. 


주말에는 사람들이 미어터져서 갈 수 없는 핫한 카페를 오전에 혼자 즐길 수 있다. 미술관이교보문고도 마찬가지이다. 주말 전시회는 사람 구경이 반이다.


2. 업무 스케줄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


평일에 남자 친구랑 놀러 갈 계획을 세워놓으면 주말에, 밤에, 새벽에 집에서 노트북으로 미리 일을 해놓으면 된다.


3.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지금 나의 평일 일과는 9시가 조금 넘는 시간에 일어나서,

음악을 틀고 느긋하게 티타임을 가진 후 오전 운동(크로스핏이나 필라테스)을 간다. 예전이었다면 '주말 혹은 퇴근하면 해야지' 하고 미뤄두던 글쓰기, 사진 정리, 다리 마사지 같은 일들을 일어나자마자 바로 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것 (내 경우에는 '와인')에 대한 공부를 시작할 수도 있다.


4. '나'를 가장 우선으로 두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일이 가장 우선이었던 과거와 달리 전화를 받고 싶지 않을 땐 받지 않기도 하고,

쉬고 싶거나 일이 하기 싫을 때는 

'이번 달은 그냥 적게 벌고 적게 쓰지 뭐' 라는 

마음 가짐을 하기도 한다.

가족 행사를 스케줄표에 가장 먼저 적기도 하며, 바쁘지 않게, 매일 행복하게 살자 라고 항상 되뇐다.


컴퓨터 작업을 핑계로 가는 카페들



+ 직장 생활을 할 때 보다 확실히 준 소비.


가계부를 쓰는 성격이 아니라 아직 정확하게 통계를 낼 수는 없지만  네이버 Npay 구매 목록을 보면 확실히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보상성 소비가 줄었다. 또 매일 다른 출근룩을 위해 사던 옷들도 더 이상 사지 않게 되었다.


여건이 되는 날에는 점심, 저녁을 집에서 해결하기도 하고 '백수'라는 신분을 감추지 않고 내세우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마음껏 빌붙기도 한다.



+ 시간이 많다는 사실이 주는 것.


내가 보낸 하루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것.


천천히 알아보고 시도해 볼 수 있다는 것(특히 여행 지원 프로그램이나 자잘하게는 상품을 주는 이벤트 같은 것들).


좋은 공간을 마음껏 찾아가고 그곳에서 자극받을 수 있다는 것.


사회에 물들며 나를 잃어갈 필요가 없다는 것.





누구나 예상하겠지만 단점은


1. 안정적이지 않은 수입.


매월 다른 수입과 통장에 돈이 찍히는 날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풍족할 때, 빈곤할 때의 격차가 크다.


2. 들고 다녀야 하는 많은 짐.


사무실이 없으므로 노트북, 각종 서류, 생활 용품들을 가방에 들고 다녀야 한다.


3. 불규칙한 식사 시간.


회사를 다닐 때는 아침(꼭 챙겨 먹어야 하는), 점심(매우 중요), 저녁(야근 시)을 시간에 맞춰서 꼬박꼬박 먹었는데, 혼자 일을 하다 보니 배고플  혹은 시간이 될 때 밥을 먹다 보니 정해진 식사 시간이 없어서 소화 기관에 문제가 생길 때가 있다.


4. 혼자 해야 하는 일들.


아이디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 사람들과 회의를 할 수도 없고,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가장 먼저 한 일은 핸드폰 배경 화면 세팅을 바꾸는 일이었다.


당시 핸드폰 메인 화면을 채우고 있던 

메일, 드롭박스, Facebook 광고 어플, 각종 자료 확인 사이트등 이동시 업무 처리를 위한 각종 위젯과 어플들을 모두 지우고


왓챠 플레이, 와인 테이스팅 노트, 팟캐스트, 가고 싶은 여행지 리스트를 적은 메모 으로 채웠다.


가고 싶은 수 많은 여행지들



물론,

앞으로의 미래가 안정적이지 못하고,


직장 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것에 대해 부모님을 이해시켜야 했고,


남들과 다른 인생을 사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극복해야 하며,


'왜 나이 먹고 결혼 준비는 안 하고 저렇게 대책 없이 살지'라고 생각하는 일부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견딜 수 없는 상황이 와서 다른 선택을 해야 할 때 까지는 이렇게 살기로 결심했다.


인생은 원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일로 채우는 거라고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가게를 차리거나 개인 사업을 하기로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모르니 저축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살았으며,  2016년은 4달 동안 해외에 살면서 모은 돈을 남김없이 다 썼다. 직장도 돈도 없이 제로 베이스에서 28살을 맞이해 이렇게 글을 쓰며 다시 시작하는 중이다.



p.s 도와주시는 많은 분에게 항상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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