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A Apr 27. 2017

혼자 보내는 하루

그 날 찾게 되는 공간의 감성




 왠지 혼자 하루를 보내는 공간은 트렌디하지도, 힙하지도 않은 공간을 찾게 된다. 인스타에서 핫하거나 오픈한 지 얼마 안돼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공간보다는 지금의 나와 오래도록 함께했던 공간, 혹은 지나가버린 시절의 감성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 좋다. 공기의 온도가 느껴지는 정도의 잔잔함이 어울리는 곳이라면 더 좋다.


이런 날 꼭 찾는 공간이 있다. 비가 오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지만 그 외에는 기분이 좋지 않은 날, 생각이 많은 날, 어떤 날이든 상관없다.







 5호선 광화문역 2번 출구 앞에서 1020번 버스를 타면 여정이 시작된다. 서울에서 가장 감성적인 곳을 투어 하는 이 버스는 스타벅스 간판이 한글로 쓰여있는 통인동, 지방 지명을 떠올리게 하는 효자동을 지나 내 20대 초반의 그곳, 부암동으로 향한다.


부암동을 처음 알게 된 때는 대학생 시절이다. 그때는 주위에 부암동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 사람들이 많았다. 유동 인구도 지금보다 적었고 인적도 드물었다. 평창동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드문 드문 위치하던 미술관과 갤러리에서나 무리 진 사람들이 보였고, 지금은 익선동으로 자리를 옮긴 4.5평 우동집이 이곳에서 입소문을 타던 때였다.




 광화문역에서 1711번 또는 1020번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녔는데, 1020번 버스를 타는 것을 더 좋아했다. 경복궁 근처 동네를 빙 돌아가기 때문에 학교에 가는데 더 오래 걸렸지만, 이 버스를 타면 감성 골목 드라이브를 하는 느낌이 들었다.


1020번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부암동 입구에 내가 수많은 날 홀로 찾았던 #윤동주 시인의 언덕 이 나온다. 예전에는 버스정류장 안내 방송도 '윤동주 시인의 언덕'으로 나왔는데 오늘 보니 '윤동주 문학관'으로 바뀌었다. 그때는 정류장 이름이 특이해서 "여기는 뭐지? 윤동주 시인이 자주 찾던 언덕인가?" 했었다.





입구에 윤동주 문학관이 있다



이 오르막길을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언덕이 보인다



 학교 가는 길에도 충동적으로도 갔었고, 수업이 듣기 싫은 날 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고도 종종 갔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찾아온다. 서울 한복판이고 차들이 다니는 도로인데 갑자기 산속 깊숙이 트레킹을 온 것 같다. 주위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순간부터 시간이 점점 느리게 간다.



걸어가는 길을 기억하려고 영상을 남겼다





 언덕을 걸어 올라가면서 보이는 하늘이 눈부시게 파랗다. 그리고 햇살이 좋은 날에도 항상 엄청난 바람이 함께한다. 시인의 책 제목에 하늘바람이 나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올라가다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면 산이 보이고
오밀조밀한 집과 저멀리 남산 타워도 보인다.








  오랜만에 찾은 언덕은 바닥에 시멘트 길이 깔려있었고, 인위적으로 조성한 공원이 되어 있었다. 요새는 사람들에게 꽤 알려졌기 때문에 기세를 몰아 관광지의 역할을 돈독히 하게 하려고 였을까. 앉아서 멍 때리곤 했던 나무 그늘 옆 벤치가 모조리 없어졌다. 아, 이곳은 이렇게 바뀌지 않아도 되는 곳인데. 산도 아니고 공원도 아닌 '언덕'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곳인데.






 아쉬운 마음이 앞섰지만 부지런히 언덕 정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친구와 함께 시간을 때울 겸 와본 대학생, 단체 관광을 온 고등학생들, 등산 복장을 갖춘 아주머니, 커플티를 입고 셀카를 찍는 커플까지. 저 사람들은 이 곳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도시락은 가져왔을까. 언덕 정상에서 편의점 도시락 먹으면 진짜 꿀맛인데.



 


정상은 녹음이 가득해 어느새 여름 느낌이 물씬 난다. 이 풍경은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다.




 사실 비밀을 이야기하자면, 이 곳은 가을에 가장 예쁘다. 12년도 가을에 혼자 와서 남긴 사진이 있다. 사진이 로딩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지금 계절의 사진과 비교해서 보는 느낌을 선물하고 싶다. 가을에 더 아름다운 이유도 시인이 별 헤는 밤에서 '깊어가는 가을'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라고 혼자 잠정적 결론을 짓는다.








 언덕을 한 바퀴 둘러보고 청운 문학도서관으로 향했다. 올라오는 길에 못 보던 건물이 있어 검색해보니 14년 11월에 문을 연 공공 도서관이라고 한다. 들어가는 입구가 참 예쁘다. 전래 동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집 같다.




 이렇게 멋진 도서관이 생기다니 시멘트 길을 깐 것을 용서해줘야겠다. 대학생 때 이런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으면 공부라는 게 조금은 즐거웠을 텐데.




열람실이 신발을 벗고 올라가는 한옥이다




 다음에는 지하 자료실에서 책을 빌려 이 곳에 꼭 앉아야겠다. 오늘은 책을 읽으면 온 마음이 그 세계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만 같다. 수없이 봤지만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은 '윤동주 문학관'에 가보려고 발길을 돌렸다.




조금 출출한 기분에 문학관 2층 카페에 먼저 들렀다
바람개비가 춤을 추는 곳에서 와플을




 윤동주 문학관은 시인의 초판 시집과 생애를 담은 기록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폐기된 물탱크를 보존해서 만든 전시관에서는 1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기도 했다. 이 전시관은 들어가자마자 느껴지는 찬 공기와 소리의 울림 덕에 서대문 형무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의자 또한 일제 강점기 시절에 쓰던 것 같은 의자였다. 어떻게 이렇게 잘 기획했을까.




 조금은 착잡한 마음으로 문학관을 나온다. 문득 그가 살아생전 이 언덕을 와봤을 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왕산 자락을 더 산책할까 고민하다가 역시 그곳으로 향한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 입구에서 걸어서 1분 거리에 있는 클럽에스프레소로.




 



 예전에는 이 곳 근처에 지금처럼 가게가 많지 않았다. 차들이 지나다니는 길 한복판에 생뚱맞게 있는 주택 집은 방문 희망 1순위 카페였다. 동기들과 공강 시간에 이곳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나랑 같은 학교를 간 친동생도 이곳에서 동기들과 커피를 마신다고 한다.



 이렇게 국가별 원두를 손님이 직접 고를 수 있도록 한 카페 중 1세대가 아닐까 싶다. 생두와 커피 용품을 구경하다 보면 주문한 커피가 나온다. 예전에는 커피와 같이 먹을 생초콜릿이 나왔는데 지금은 매장에서 직접 구운 빵을 판매하고 있다. 부암동 빵은 스코프인데.





2층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마들렌카페라떼를 곁들여 본다. 마들렌은 바삭하면서 담백하고 라떼는 여전히 커피맛이 강한 그 맛 그대로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 음악 소리, 커피 머신 소리에 머리가 맹해지지만 잠시 이 곳에서 오늘 하루를 정리해본다.


아 오늘 정말 좋은 하루였다.

어떤 날이었냐면,

이병률 작가의 책에 나온 표현을 빌리면,



우리 살아온 날들 중에, 좋은 날은 얼마나 많았느냐 하는 것.

감히 그 힘으로 살아도 될 그런 날,

그 힘으로 더 좋은 것들을 자꾸 부르는 그런 날.





#커버사진_

역삼역 cafe413project 








 예전에 인사동에 있던 서울아트시네마를 기억하시는 분이 계신가요? 그 허름한 낙원 상가 건물 옥상에 있었던 영화관을 참 자주 갔어요. 한눈에 전 좌석이 보이는 상영관에서 '리오 브라더'같은 흑백 영화를 볼 수 있기도 하고 가끔 어렸을 때 자주 먹던 풀빵 냄새가 났어요. 평일에 저녁에 가면 3명 내외의 관객들이 오손 도손 영화를 보고 상영회 같은 것도 했었는데 어느 순간 없어졌더라고요. 좋아하는 장소가 없어지는 것은 '이별'이라는 단어를 담담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매거진의 이전글 회사 생활이 남겨준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