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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A May 12. 2020

술꾼 도시 처녀들

서울 음주 일기




* 이 글은 2017년 한국에 있을 때 작성해 둔 원고입니다 :)




인생은 짧고 마실 술은 많다.
여름밤 하이볼은 언제나 옳지





 나는 을 굉장히 좋아한다.


 조금만 알코올이 들어가도 얼굴이 새빨개져 아예 술을 마시지 않는 우리 엄마, 맥주 반 잔으로 모든 술자리를 버티는 내 여동생과 달리 나는 술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 만큼 술을 즐긴다. 주량은 보통이다. 필름이 끊긴 적은 다섯 번 안 되는 것 같고, 기절한 적은 꽤 있다. 음주 에피소드는 몇 밤을 새워 이야기해도 시간이 부족하다. 다들 비슷한 경험이 있겠지만, 잃어버린 물건들 값으로 맥북 한대는 거뜬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렇게 좋아할까 생각해보면 우선 술이 몸에 들어가 기분이 알딸딸해지는 순간을 좋아하는 것 같다. 어떤 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고, 말과 행동이 숨기는 것 없이 솔직해질 수 있는 상태. 맨 정신에서는 잘 안 되는 것들. 그리고 다양한 향과 맛의 세계가 흥미롭다. 흔하게 꼽는 소주, 맥주, 와인, 양주 말고도 각 나라별 전통주, 여러 주종이 섞인 칵테일을 비롯해 매일 새로운 브랜드가 생겨나니 평생 공부해도 그 세계를 다 알 수 없다. 그 다양한 향과 맛의 음료를 경험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했던 적이 있다.




와인 없는 곳엔 사랑도 없지.




 내가 가장 편하게 즐기는 술은 와인이다.


 유명한 이름의 와인을 마셔본 적도 많지 않고, 깊은 상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냥 와인은 평생 곁에 두고 부담 없는 술이다. 치즈 케이크 같은 디저트와 함께 먹을 수 있고, 혼자서 기분을 내기에도 좋다. 친구들과 소맥을 거하게 하고 집에 가는 길에도 꼭 와인 한 잔 생각이 난다. 그 날의 음주를 와인으로 마무리하면 뭔가 굉장히 감성적인 기분이 된다. 감각적인 곡선 모양의 잔이 술의 이미지를 감성적으로 만드는 게 아닌가 싶다. 사실 와인을 즐기기 가장 좋은 장소는 테이스팅 룸이다. 다양한 종류를 한 잔 씩 따라서 마실 수 있고, Happy Hour가 적용되면 4잔을 마셔도 6,300원이 결제된다. (웬만한 커피 한 잔 값이다.) 평일 오후에 가면 손님이 한 명도 없어서 마치 가게를 전세 낸 것처럼 조용히 와인을 즐길 수 있다. 혼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려고 가기도 하고, 친구랑 가볍게 낮술이 하고 싶을 때도 많이 간다.



메그넘 더 테이스팅 룸 (가로수길)





 맛있는 와인을 먹으면 왠지 기운이 난다. 심플한 과일주 한 모금으로 느낄 수 있는 향과 맛이 이렇게 많은데, 어떤 맛이 날지 알 수 없는 남은 생도 기운 내서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 와인의 특성 중 하나는 만드는 사람과 조건(경작 연도의 날씨 등) 따라 성향이 명확하게 달라져 주종 자체의 다양성이 크다는 점이다. 만화 '신의 물방울'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와인의 세계는 드넓어서 어떤 음식이라도  음식과 어울리는 와인이 반드시 있다. 어떤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사람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처럼.  그러면 이런 생각도 할 수 있다. 이 세상 어딘가에 '나'라는 사람을 꼭 닮은 와인이 있지 않을까. 몇 살의 '나'인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한 사람의 변하지 않는 에센스를 담은 와인이 있을 것이다. 내 와인이 있다면 이런 와인 이기를 바란다. 질감은 부드럽지만 맛은 혀에 강하게 남고, 시간이 지나도 향이 사라지지 않는. 그래서 오늘도 와인을 사러 백화점에 간다. 와인코너에서 세일하는 것 중에 괜찮은 것을 사서 방에 있는 작은 와인 냉장고에 넣는다. 다양하고 예쁜 레이블의 병들로 냉장고를 채우는 기쁨도 크지만, 병마다 의미를 담는 것도 재미있다. 누군가는 살면서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을 때, 와인을 하나씩 산다고 했다. 슬픈 날 와인을 살 때는 나중에 좋은 사람들과 이 와인을 마시면서 행복해질 거라는 다짐을 하면서. 이렇게 마신 와인들은 병을 버리지 않고 모아둔다. 볼 때마다 사랑하는 사람과 처음으로 마신 와인, 친구들과 캠핑 갔을 때 오픈한 와인.으로 추억을 떠올릴 수 있도록.(나는 가게에서 와인을 주문해서 먹더라도 가게에 물어보고 와인병을 집으로 가져와 꽃병으로 쓴다.)




관련 글 ; '나의 와인 이야기'





인생은 꽃, 술은 그 꽃의 꿀




 유경이는 내게 위스키도 와인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지는 향과 맛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술이라는 것을 알려준 친구다. 나보다 4살이나 어린 그녀는 20대 초반부터 위스키에 눈을 떠서 시간이 날 때마다 혼자 바에 가서 여러 종류의 위스키 마셔보면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녀가 추천해주는 위스키를 마시면 정말 바다 향이 나기도 하고, 꽃향이 올라오기도 한다. 양주를 그냥 비싸기만 한 '과시용 술' 혹은 정신 놓고 싶을 때 마시는 알코올 도수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독한 술' 정도로만 생각했던 나는 20대 후반까지 양주 음주의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  '술꾼 도시 처녀들'이라는 웹툰을 알게 되었다. 웹툰의 주인공은 35세 동갑내기 세 친구들이다. 그녀들은 매일 퇴근 후 모여서 술로 하루를 함께 마무리하는데, 여기서 많이 나오는 술이 싱글 몰트 위스키인 글렌모렌지와, 위스키에 토닉을 섞은 하이볼이다. 하이볼을 처음 마셔봤을 때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칵테일과는 다르면서도 양주 느낌이 강하지는 않은 소프트드링크. 꼬치 같은 안주와 환상적인 궁합을 자랑하면서 1,2,3차 어느 때 가도 옳은 선택. 웹툰의 작가 미깡님은 결혼 후 육아를 병행하면서 간간히 음주 생활을 이어가고 계신다고 한다. 휴주는 있지만 금주는 없다.







 양주에 대해서 더 알아보고 싶어서 '조주기능사' 자격증을 따기로 했다. 준비를 위해 홍대에 있는 학원에 등록했다. 자격증 시험은 전 세계 술의 종류와 특성을 물어보는 필기시험과, 제한 시간 내에 제시한 칵테일을 만드는 실기 시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실기 시험용으로 나오는 칵테일은 41가지 정도인데 들어가는 재료, 제조 순서 및 방법, 장식되는 가니쉬를 모두 외워야 한다. 실기 시험 준비를 하는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이 직접 칵테일 제조 시연을 해주시고 학우들과 돌아가면서 칵테일을 만든다. 그리고 바로 한 모금씩 시음을 한다. 수업이 끝난 후에는 시음하고 남은 칵테일들을 다 마시고 갈 수 있는데, 나는 항상 마지막에 학원을 나섰다.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집에서 야매로 만들어 먹던 칵테일을 제대로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여기저기 퍼져있는 정말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인맥을 쌓게 되었다. 이분들과 사석에서 술을 먹을 때는 집에 데려다 줄 사람을 미리 포섭해두고 몸과 소지품을 간편하게 해서 나가야 한다.







비 오는 날 음주 욕구가 이는 것은 마음이 가려워서.




 사실 막걸리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주종은 아니다. 대학교 새내기 시절에 한창 꿀막걸리가 유행했었는데, 그때도 단맛에 몇 번 먹고는 이후로 먹는 일이 거의 없었던 거 같다. 제주도 귤 막걸리나 각 지역의 전통 막걸리는 신기해서 사보기도 했는데, 역시 한잔만 마셔도 배가 부른 느낌이 주기적인 소비를 방해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막걸리를 정말 좋아했던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에게는 술=막걸리였다. 한번 음주를 시작하면 혼자서 막걸리 4,5병은 거뜬하게 비우던 그의 꿈은 은퇴 후 막걸리 양조장을 열어 매일 소량의 고퀄리티의 막걸리를 만들어 직접 마시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도 특이한 막걸리를 보게 되면 관심이 가곤 했었는데, 그 당시 알게 된 것이 배혜정 대표가 만드는 '배혜정도가'였다. 우연히 들어간 카페 쇼윈도에 케이크 대신 생전 처음 보는 세련된 디자인의 막걸리들이 진열된 것을 보았다. 그중에는 자색고구마, 포도, 멜론, 옥수수 같은 맛의 개량 주들도 있었고, 프리미엄 라인과 탁주 칵테일(국내산 쌀로 빚은 막걸리에 천연 과일 과즙을 넣어 만든 칵테일), '탁테일'도 있었다.




'YEAST BY YEAST' 카페


 


 '부자' 라인들은 가격이 3천 원 대고, 용량이 적어 데일리로 혼자서 부담 없이 끝낼 수 있다. 농도는 일반 막걸리보다 조금 연하고 맛은 깔끔하다. 편의점이나 마트 같은 곳에서 판매된다면 과일 소주와 양대산맥을 이룰 정도로 판매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접근성이 낮은 게 안타깝다. 전통주를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시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더 대중적으로 소비되면 좋을 텐데.





 


'맥주 천국' 독일의 기억


'옥토버페스트 October Festival 2016'

 


 그 해에 옥토버 페스트를 가게 된 건 정말 운이 좋았다. 우연히 가을에 베를린을 여행 중이었고, 뮌헨에 대학 동기가 살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약 4시간 정도 걸려 베를린에서 뮌헨으로 이동했고, 도착하자마자 동기와 함께 옥토버 페스트가 열리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향했다. 놀이동산 같았던 그곳에는 다양한 빛을 뿜어내며 돌아가는 놀이기구들과 솜사탕과 집 모양 과자 같은 것을 파는 부스들이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하얀색 천막들에 각각 독일 맥주 브랜드 로고가 붙어 있었다. 천막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고, 인기 있는 브랜드의 천막은 수용인원이 다 차서 들어갈 수 없었다. 밤에는 다 같이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의자 위로 올라가 옆에 있는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춤을 추는 분위기였고, 낮에는 학센 같은 전통 음식을 먹으면서 자유롭게 맥주를 즐기는 분위기가 강했다. 얼굴 크기만 한 잔에 나온 맥주는 정말 시원하고 맛있었다.



베를린 숙소 근처의 카페에는 모두 맥주를 팔았다.


 베를린에서는 물보다 맥주를 많이 마셨다. 카페에 낮, 밤 상관없이 간단한 안주 하나를 시켜서 혼맥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녀 가리지 않고 앉은자리에서 몇 잔을 거뜬히 마셔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인식도 좋았다. 근교로 나가면 특색 있는 양조장이 여러 개 있는데 거기에는 메뉴판 한 면이 직접 제조한 IPA로 가득 차 있다. 분위기 있는 곳에서 맥주를 마시다 보면 왠지 예술가가 된 기분도 들었다. 









그래도 퇴근길 노상


어서 앉아봐, 밀린 얘기가 많아.



 생각해보면 힘들었던 직장 생활을 퇴근 후 술 한잔으로 버텼었다. 금요일은 당연했고, 평일에도 그 날 있었던 열 받는 일을 삭히기 위해 항상 술이 필요했다. 그렇게 자주 마시다가 맛에 눈을 뜨고 그것이 일상이 됐던 것 같다. 특히 여름날 야외에서 마시는 술은 얼마나 낭만적이고 신나는지. 도로 한복판에 있는 엉성한 테이블의 술집도, 편의점에서 이것저것 사서 선유도 공원에서 벌리는 술판도 놓칠 수 없다. 그곳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너무나 재밌고, 그 기억은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


조명을 위한 초정탄산수는 필수품









 

 캐나다에 와서도 초반에는 '리큐어 스토어(Liquor store)'에 가서 전 세계의 다양한 술을 하나씩 사서 마셔보는 게 큰 즐거움이었는데 요새는 마지막으로 갔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삶에서 '스트레스'가 없어져서 인지, 낮에 시간이 많이 생겨 다른 할 일은 찾게 돼서 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한국에 가게 된다면 가장 먼저 샤로수길 프랑스 홍합집에 가서 프랑스식 맥주 칵테일을 마시고 싶어요. 맥주 칵테일의 신세계였는데, 이제는 맛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혹시 홍대 '예술'의 장미주를 아시는 분이 계신가요? 그윽한 장미향과 달달하면서 적당한 알코올 맛 때문에 가게에서 먹는 것도 부족해서 항상 몇 병씩 포장해오고는 했었는데. 그립습니다.






 '술꾼 도시 처녀들' 미깡 작가님이 하시는 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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