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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향 Sep 30. 2016

힘들지요 내가 악마해 들이게요

마음을 전하는 법

<아빠 왜 매일매일 늑개 오세요. 아빠 보고 시퍼요. 아빠 사랑해요. 힘내새요. 아빠 힘들지요. 내가 내일 악마해 들리게요>



‘엄마 지난번 생일 카드에 쓴 기대하라는 선물, 냉장고 안에 있어요. 고고씽~’ 


 지난해 크리스마스 아침, 내 휴대전화에 포스트잇 한 장이 붙어 있다. 내 나이 이제 오십! 이 나이에 산타의 선물을 받는 사람은 흔치 않으리라. 그래, 나도 내 나름대로는 착한 엄마니까. 히히~  그런데 냉장고 고추장 통에 포스트잇 한 장이 또 나풀거리고 있다.

 

 ‘Mom Gift that I give U is hanging in Veranda. Look for it carefully~’ 

 

 다시 베란다로 달려가 지난밤 열어 둔 빨래들 틈에 숨어 있는 낯선 티셔츠 한 장을 찾아냈다. 뒤 목덜미에 ‘절세미인’, 가슴팍엔 ‘엄마’라는 글자가 크게 적힌 흰 티셔츠. 


 남편 역시 아침 일찍 문자 메시지를 받고 신발장을 거쳐 거실 소파 쿠션 아래에서 ‘조각미남’ ‘아빠’ 티셔츠를 찾았고, 동생 채원이는 학교 가방 속에서 ‘나는 영재다’ ‘동생’ 티셔츠를 찾았다.


 모두 큰딸 채영이의 선물이다. 우리가 모두 잠든 사이에 패브릭 색연필로 글자를 쓰고 지워지지 않게 하려고 다림질까지 한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며 생색을 내더니 잠옷 속에 입고 있던 자기 티셔츠를 보여준다. 목덜미에 적힌 글귀를 보고 우리는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은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였다. 역시 채영이다운 발상이다.  



'매일 쪽지 편지 보낸' 네 살박이 채영이  


채영이는 어렸을 적부터 쪽지 편지 쓰기를 즐겼다. 한글을 어설프게 깨칠 무렵부터 거의 매일 쪽지에 그림과 글자를 긁적여 아빠와 내 주변에 남겨 두었다. 특별히 쓸 말이 없는 날에는 ‘잠옷 치마 이펴조’, ‘엄마 내일 깨아 주새요’, ‘께아조’, ‘아빠 그런데 내일 께아조’, ‘침대에 누어조’ 등등. 아침 일찍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신문귀퉁이든 티슈조각이든 가리지 않고 ‘아침 일찍 꼭 깨워 달라’는 간절한(?) 메시지를 남겼다.


 동네 언니에게 보내려던 편지 중에는 ‘헤지 언니야 인재 채원이 보고 채소라고 부르지 마’하고 동생 편을 들어 주는 든든한 다섯 살 언니 역할도 하고 있었다.


 가족생일은 물론이고 결혼기념일에는 ‘아빠 엄마하고 교혼 축하해요’, 서울에 출장가시는 아빠 주머니엔 ‘아빠 서울 가서 재미이개 놀다 오서요 아빠 없을 엄마 말슬 자드고 이슬개요 아빠 서울래서 예쁜 인형이슬며 가지고 오세요’라는 쪽지를 넣어 두어 아빠를 감동시켰다. 크리스마스엔 혼자 선물을 받기가 미안했던지 ‘산타할버지한태 낵타이 주세요 해요’ 라고 아빠에게 산타의 선물을 받는 방법을 전수하기도 한다.


 우리 부부가 작은 다툼이라고 있었던 날이었나 보다. 채영이에게서 ‘아빠 왜 어재게 내 자리에서 자서요’는 편지가 온 걸 보니 말이다. 엄마랑 다툰 아빠가 아마 채영이 침대에 가서 잠든 모양이다.

 

‘아빠 왜 매일 매일 늑개 오새요 아빠 힘들지요 내가 악마해 들이게요’ 맞춤법은 엉터리지만 늦게까지 일하고 오신 아빠를 걱정하며 안마해 주겠다는 딸아이의 쪽지는 그 어떤 보약보다 남편에겐 힘이 되었을 것이다.


처음엔 별 생각 없이 받던 쪽지가 점점 신기하고 재미있어져서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다. 지금도 가끔 십 년이 더 지난 그 쪽지 편지들을 꺼내 읽어 보면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감동을 느끼게 된다. 사랑한다는 말, 낳아주셔서 고맙다는 말, 건강하자는 말, 재미있었던 가족 소풍 또 가자는 말, 동생과 사이좋게 지내겠다는 말. 참 순수하고 소박한 고백이며 다짐이다. 하지만 참 소중하고 아름다운 고백이며 다짐이다.


 감정이나 생각을 전하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다. 글이나 말로 직접 전하는 언어적인 방법도 있고, 행동이나 몸짓, 표정 등으로 전하는 방법도 있다.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 가늠할 순 없지만 상황과 처지에 따라 가장 적절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열 마디 위로의 말보다 따뜻한 포옹이 상처 받은 사람의 마음을 더 잘 달랠 수도 있을 것이고 다정한 눈빛과 미소가 그 어떤 화려한 고백보다 상대의 마음을 열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과 축복이 필요한 계절 

 

 그 어느 때보다 가족의 사랑과 축복이 필요한 때이다.

 네 살짜리 채영이의 쪽지 편지처럼 ‘힘들지요 내가 악마해 들이게요 사랑해요’ 하고 마음을 전해 보자. 마음을 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확실한 한 가지는… 마음은, 특히 사랑은 표현할 때 더 아름답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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