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가 북어로, 윤리가 윤락으로 바뀐 날
게시판에 붙어 있는 수업시간표의 모습이 하루하루 달라졌다.
처음엔 하얀 켄트지에 주황색 색종이로 예쁘게 꾸며져 교실 전체를 환하게 해주더니
용감한 누군가가 ‘국어’를 ‘북어’로 바꾸어 놓은 날부터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날 ‘외국어’가 ‘왜굶어’로 바뀌더니 며칠 새에 ‘한문’이 ‘항문’으로,
‘체육’이 ‘제육볶음’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러더니 ‘윤리’가 ‘윤락’으로 바뀐 날부터는 주황색 색종이가 조금씩 찢겨 나가기 시작했다.
‘국어’가 ‘북어’로 단지 자음 하나 바뀐 지 불과 열흘 만에 시간표는 완전히 누더기가 되었고 게시판 전체를 흉물스럽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범죄심리학에서 사용하는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라는 용어가 있다.
스탠포드대학의 한 교수가 치안이 허술한 뒷골목에 두 대의 자동차를 세워 두고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고 한다.
두 자동차를 고장 난 것처럼 앞덮개를 모두 열어두고, 한 대의 자동차에는 일부러 유리창을 조금 깨뜨려 둔 채 일일을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
일주일 후 그 결과는 놀라웠다.
유리창을 조금 깨뜨려 둔 것뿐인데 한 자동차는 완전히 깨지고 부서지고 타이어도 빠진 채
엉망이 되어 있었다. 물론 다른 한 대는 세워둔 상태 그대로 유지되었는데도 말이다.
조금 깨진 유리창이 이렇게 엄청난 결과를 가져 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다.
교실에 붙어 있던 시간표의 변화도 마찬 가지였을 것이다.
‘국어’가 ‘북어’로 바뀐 날 누군가가 다시 처음 모습으로 깨끗하게 고쳐 두었다면
‘윤리’가 ‘윤락’으로까지 바뀌어 누더기가 되는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이미 누군가가 망쳐 놓은 것이라는 생각에,
아니 어쩌면 이미 이 시간표는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생각에 큰 망설임 없이
더 과감한 낙서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100에서 1이 빠진 상태에서 우리는 곧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이미 온전한 100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 생각이 99를 쉽게 98이 되게 하고 그보다 더 쉽게 97이 되게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내 짝꿍은 참 심술쟁이였다.
쪽지시험을 치고 짝꿍과 바뀌어 채점을 할 때면 내 시험지에 동그라미를 쳐주기 싫어서
틀린 답처럼 작대기를 쭉 긋고 난 다음에 억지로 반달모양 동그라미를 만들며 괜한 심술을 부리던 아이였다.
어느 날 애써 그린 내 그림에 빨간 물감을 일부러 튀기며 심술을 부렸다.
화가 난 나는 보란 듯이 그 위에 시꺼먼 물감을 마구 칠하고는 책상에 엎드려 엉엉 울어 버렸다.
정성껏 그리던 그림을 망쳐 버린 것이 화도 났을 것이고
또 짝꿍에게 내가 정말 많이 화가 났다는 걸 보여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내 손으로 내 그림을 완전히 못 쓰게 망쳐 버린 셈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친구가 튕긴 빨간 물감 방울을 다시 원래대로 지울 수 없다면
그 상황을 그대로 인정하고 더 노력하여 그림을 완성할 수는 없었을까.
어린 마음에 언찮기는 했겠지만 작은 물감 자국 하나 때문에 그림 전체를 망쳐 버린 것은 참 어리석지 않은가.
붓을 든 내가 마음 먹기에 따라서 물감 자국은 빨간 꽃송이로 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고,
감나무 위에 하나 남은 잘 익은 까치밥이 되어 따스하게 그려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엄마가 짜주신 내 털모자에 달린 빨간 방울이 되어
하얀 도화지 위를 달랑달랑 춤추고 다녔을지도 모르리라.
우리는 자신의 삶의 한구석에 깨진 유리창은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그리고 그 깨져 있는 작은 구멍으로 바람이 몰아쳐 삶 전체를 흔들어 놓지 못하도록 살펴야 할 것이다.
뒷골목에 세워둔 고철이 되어버린 자동차처럼,
혹은 게시판의 흉물이 된 시간표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유리창이 조금 깨졌다고 유리창 전체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 삶을 온전하게 100으로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좀 부족한 99도 내 삶임을 인정하고 쉽게 0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어린 시절 내가 망친 내 그림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