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갈나무 열매는 내게 특별한 그리움을 갖게 하지. 가끔 동화책에서 다람쥐들이 도토리를 갉아먹는 그림을 보면 나는 먼 기억 속에서 울려오는 사각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
더위가 한풀 꺾이고 뒷산 너머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우리는 엄마를 따라 광목으로 만든 자루를 들고 도토리를 주우러 갔어.
그럴 때 우린 소풍 나온 다람쥐가 되었지. 엄마에게는 일 년치 밑반찬을 준비한 힘겨운 일이었겠지만. 도토리를 몇 알 줍다 지루해지면 펑퍼짐한 바위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굵은 도토리 모자를 그릇 삼아 소꿉놀이를 시작했어. 엄마의 자루가 어서 가득 차기를 기다리며.
그렇게 며칠을 주워 모은 도토리를 엄마는 물에 담가 쓴맛을 뺀 뒤 방앗간에 가서 고운 가루로 내어 오셨어. 그 가루는 시집 간 언니들에게 먼저 한 자루씩 보내지고 나면 광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지.
엄마는 가끔씩 바가지씩 그 가루를 퍼내어 커다란 가마솥에 물을 풀어 설설 김이 나도록 끓이셨어.
뜨거운 도토리 가루 물을 부뚜막에 놓인 그릇에 부어 담으면 그릇 모양대로 제각각 모양의 묵이 되었어. 신기하고도 맛난 도토리묵이 되었어. 묵이 빨리 굳기를 기다리며 손가락으로 엄마 몰래 콕콕 질러 보던 우리는, 한 그릇씩 받아들고 부뚜막에 걸터앉아 젓가락 사이로 묵을 술술 빠뜨려가며 금세 한 그릇을 비워냈지.
엄마는 도토리묵을 지금의 아아들이 가지고 노는 작은 레고 블록같이 도막도막 썰어 볕 좋은 날 며칠 동안 말렸다가 우리집 별미반찬을 만들어 내셨어.
말린 묵 블록을 먹을 만큼씩 물에 다시 불려 팬에 볶아낸 뒤 갖은 양념을 넣어 무쳐 주셨는데 쫄깃쫄깃한 그 씹히는 맛은 지금 생각해도 절로 입에 침이 고여.
가끔 그 맛이 그리워 시장에서 사온 묵으로 흉내를 내보지만 그때 그 맛이 나질 않아. 허리 굽혀 한 알씩 주운 엄마의 그 정성이 담기지 않은 탓이겠지.
시골에 황토집을 짓는 언니를 찾아갔다가 정말 오랜만에 도토리를 주워보았어.
그런데 이제는...
함께 할 엄마도 안 계시고,
그 시절 울엄마처럼 도토리 줍는 내 곁에서
도토리 모자로 소꿉놀이할 아이도 없어,
모두 훌쩍 다 자라서..
도토리,
내 유년의 그리운 삽화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