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향 Oct 17. 2016

쪽배를 타고


“노 젓는 배 타보고 싶어.”

늘 뜬금없이 툭툭 말을 잘 꺼내는 큰아이 채영이가 던진 한 마디에 온가족이 수성못으로 향했다. 힘든 일도 아닌데 하고 싶은 것은 하고 살아야지.


오래간만에 찾은 수성못에는 오리배들이 한가로운 주말 한낮을 즐기고 있었다.

아이가 타고 싶어하는 노 젓는 쪽배는

정원이 2명으로 제한되어 있어 아빠와 채영이만 배에 올랐다. 아빠의 멋진 실력을 보여주겠다고 큰소리치며 구명조끼를 입는 남편도 오랜만에 타보는 쪽배에 마음이 꽤 설레는 기색이다.

 

천천히 배가 미끄러져 나갔다.

산들바람에 은빛 물비늘이 곱게 일어나는 호수 가운데 떠있는 주홍빛 조끼가 한층 더 선명한 빛으로 렌즈에 잡혔다.

아이의 노도 조금씩 움직였지만 처음 해보는 것이라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 지금쯤 그들만의 대화가 시작되었으리라. 렌즈에 잡힌 둘의 표정을 보며

나는 바람이 실어오는 그들의 대화를

마음으로 엿들었다.

 

아빠, 어디로 가야 하지?”

“영아, 물에도 길이 있어. 네가 가고 싶은 방향이 어디야?”

“응, 저쪽에 있는 섬으로 가보고 싶은데.”

“그럼, 이쪽 손에 힘을 주고 노를 크게 젓는 거야. 이렇게, 이렇게. 가고 싶은 방향에 따라 노를 젓는 손이 달라져야 해.”

“이렇게?”

“그렇지, 잘하네. 아빠는 네가 가고 싶은 길을 잘 찾아갔으면 좋겠다.”

“빨리 가고 싶은데 아빠가 대신해 주면 안 돼? 아빤 뭐든지 잘하잖아.”

그러고 싶지만 오늘은 저기까지 네 힘으로 가보게 하고 싶어. 살다 보면 네 혼자 해결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새학년이 될 때마다 아이는 몸살을 앓았다. 조금은 내성적인 성격 탓에 낯선 친구들 속에서 제자리를 잡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모습이 안쓰럽고 가엾지만 어쩌겠는가. 만경창파 험한 세상에 이제 겨우 출발한 쪽배가 처음 만난 낮은 파도 한 줄기인 것을.


“아빠, 힘들어.”

힘내고! 지금 아빠가 널 도와줄 수는 있지만 살다 보면 아빠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때는 어쩌지?”

응, 걱정마. 내가 잘할 수 있어. 지금도 봐, 잘하고 있지? 아빠가 조금만 가르쳐 줘. 이렇게 하면 이쪽으로 가는 거 맞지? 근데 바람이 불어서 너무 무서워.”


살다 보면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일을 당할 때가 많을 것이라는 아빠의 말을 아이는 아직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도와줄 수 없으니 스스로 해내라는 말이 조금은 섭섭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게다. 어느 부모가 자식의 궂은일을 대신해 주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냥 제 갈 길을 조심스럽게 찾아 거센 물살을 헤치며 씩씩하게 나아가는 자식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때로는 가슴 졸이며 지켜봐야 하는 것이 부모 마음인 것을.


쪽배가 섬을 돌아 들어온다.

춤추듯 노를 젓던 아이가 손을 흔든다.

은빛 햇살이 곱게 내리는 아이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아이의 뽀얀 웃음이 봄쑥처럼 향기롭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유년의 삽화 1- 도토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