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향 Jun 01. 2020

참깨를 털면서

 -  강(强)보다 약(弱)이 더 필요할 때

오십중반에 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이십 년 넘게 고 3아이들의 진학을 위한 문제풀이를 공부랍시고 해왔네요 ㅜㅜ

어쩌면 쓸데 없는 공부가 될지는 몰라도

이젠 공부다운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용(無用)이 대용(大用)이라고 여기며....


늘 아이들에게 숙제를 내던 제가

교수님께 숙제 검사를 받아야 하는 즐거운(?)스트레스를 받게 되었습니다^^

<문학과 현실> 수업의 과제는 시 한 편을 골라 감상평을 쓰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시가 많아 월드컵 16강을 거쳤는데 최종으로 김준태 시인의 <참깨를 털면서>가 남았습니다.

오래 전에 졸작 <내게 세월을 돌려준다 하면>을 쓸 때 잠시 언급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참깨를 털면서

                                                  - 김준태


산그늘 내린 밭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 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 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낸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 번만 기분 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 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김준태 시인은 5월 광주의 아픔을 가장 먼저 시로 쓴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살다 간 윤동주나 독재정권 하를 살아간 김수영 같은 시인들이 그러했듯이 김준태의 시 역시 시대의 아픔과 비판을 담아낸 것들이 많지요. 그런데  <참깨를 털면서>는 조금 다른 느낌이에요.

무겁지 않으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삶에 대한 지혜와 깨달음이 담겨 있거든요.

                           사진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시를 읽으면 그림 같은 하나의 장면이 그려집니다. 그 속에는, 농삿일로 뼈가 굵은 주름진 얼굴의 할머니와, 무슨 일이든 힘으로 마구 밀어붙일 것 같은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젊은 손자가 참깨를 털고 있습니다. 손자는 참깨줄기를 다발째 쥐고 막대기질을 힘껏 해댑니다. 그러면 멍석 위로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이 떨어지고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 어려운’ 일확천금의 쾌감을 느끼고 있는 듯한 신나는 표정입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슬슬’ 참깨를 터는 할머니의 몸짓이 그에게는 그저 답답하게만 느껴지겠지요? 힘껏 내리쳐 참깨 모가지가 통째로 떨어지는 걸 보고 할머니는 말씀하십니다.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참깨를 털어본 경험이 있거나 참깨 터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가지가 통째로 떨어지면 알맹이를 얻기가 얼마나 더 번거로워지는지를. 그런 손자를 보는 할머니의 마음은 안타깝기만 합니다. 시의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가엾어 하는’ 할머니의 마음은 떨어져 나간 참깨 모가지를 향한 것이 아니라 기다림도, 인내심도 부족한 젊은 손자에 대한 안타까움 같습니다.

                     사진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연륜(年輪)-.

세월이 우리를 지나가며 남기는 흔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흰머리와 주름뿐 아니라 젊을 때는 잘 깨닫지 못했던 삶을 바라보는 따뜻하고, 유연하고, 진지한 시선입니다. 인생이 주는 선물이라고도 하는 지혜로움, 깨달음 같은 것…. 고은의 시에도 나오지요.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 고은, <그 꽃>


정상을 향해 앞만 보고 서둘러 달려가던 젊은 시절에 보지 못한 것들이 천천히 천천히 내려올 때에 ‘비로소’ 보입니다.


할머니는 알고 계십니다.

참깨를 털 때에도 속도 조절이 필요하고, 힘의 강약 조절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참깨를 털 때만 그러할까요?

사랑을 할 때도, 공부를 할 때, 돈을 모을 때도 과정이란 게 있습니다.

기다림도 필요하고, 인내도 필요하지요.

가끔은 강(强)보다 약(弱)이 더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사진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나는 육십 년간 죽어 있는 세계만 바라보았다

 이젠 살아 있는 세계를 보고 싶다

 사랑 찌개백반인 삶이여 세계여

 창문을 여니 바람이 세차다

                    - 최승자, <나는 육십 년간>


 오십의 중반, 이제는 생(生)의 마지막 순간까지 따뜻한 시선으로 살아 있는 세계를 보고 싶습니다. 인생이 준 선물을 감사히 받아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며  ‘사랑 찌개백반인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상처가 아물면 새살이 돋아난다는 것을

또 새살이 잘 돋아나도록 상처를 잘 어루만져야 한다는 것을

오늘 할 말을 내일로 미뤄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비판의 시선은 남보다는 나를 먼저 향해야 한다는 것을

취(取)하는 것보다 버리는[捨] 것이 더 중요할 때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세월에 따라 변해야 할 것도 많지만 절대 변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 졸작(拙作) <내게 세월을 돌려준다 하면>에서 인용해 온 부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