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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향 Jul 30. 2020

지상의 순례자 되어

    -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배우며

순례(巡禮)는 종교적으로 의미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것을 말한다.

종교마다 장소는 다르지만

거의 모든 종교가 성지 순례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다.

심지어 이슬람은 순례를 종교적 의무로 정하기도 하고,

가톨릭은 성지와 순례지를 해마다 조금씩 보완해 안내하기도 한다.


지난해 남편과 한 달간 유럽여행을 다녀와

순례자가 되어 보기로 했다.

여행에서 우리가 주로 찾아다닌 곳이 성당이었고

가는 곳마다 미사에 최대한 참례하려고 노력했는데, 

집이나 당에서 드리는 기도나 미사 때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곳에 얽힌 성인(聖人)들의 신앙 이야기와 유해(遺骸),

또 다른 감동을 전해주는 다양한 십자가상과 성화(聖畫)들이 전해주는 보이지 않는 힘때문인지.

<가는 곳마다 기도와 묵상, 미사 - 못 말리는 가브리엘 형제님 ^^>


마지막 여행지인 로마에서

그 흔한 관광지 '진실의 입'은 구경도 못하고

5일간을 바티칸과 그 주위를 맴돌며 보냈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날에도 산타마리아 마조레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것으로 여행을 마무리했다.

물론 길벗 가브리엘의 희망사항이었기에.


파리에서도 노트르담 성당에 오전 10시에 들어가 오후 3시가 넘어서 나올 정도로

가브리엘은 성당에서 보내는 시간을 즐겼고,

바르셀로나에서도 카탈루냐어로 드리는 미사에서

씩씩하게 우리말로 주기도문을 올리고 평화의 기도를 나누며 행복해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우리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펴낸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를 구입하여

시간이 날 때마다,

아니 시간을 만들어 함께 순례의 길을 떠나고 있다.

솔직히 처음엔

역마살이 살짝 낀 내 입장에서는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 좋아 따라다니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칭찬도장을 찍어가며 선물 받을 날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순례 도장 찍는 재미로 따라다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마음이 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찾아가는 곳이

선조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지이거나

그분들의 무덤이 있는 곳,

혹은 순교자를 기념하는 성당이나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들이기에

그냥 이야기로 듣거나 책으로 읽거나 영상으로 접하던 때와는 다른 기분이 들었다.

그분들의 삶과 영성이 그대로 살아있는 현장이기에..


열흘 전에 다녀온 충남 서산 '해미순교성지'는

이름이 기록된 순교자만도 132명에 이르는 순교지인데

이름 모를 순교자들까지 생각하면 1000명 이상이 처형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늘어나는 신자들을 감당하지 못해 한꺼번에 처형한 생매장터

신자들을 묶어 수장(水葬)시킨 물웅덩이 앞에서는

마음이 먹먹해져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명(無名)의 순교자들 중에는

어쩌면 미처 세례도 받지 못한 예비자도 있었을 테고,

까막눈이라 성경 한 줄 변변히 읽어내지 못하는 이도 있었을 테고,

더없이 귀했을 성물, 작은 십자가 하나

가슴에 품어보지 못한 이도 있었을 테지만

그들에게 '예수'는 목숨보다도 귀한 이름이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흙을 맞아가면서

기쁜 찬송을 불렀다는 생매장터에서

"내일 정오에 천국에서 만나자"는 인사를 건넸다는 옥터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하느님의 자비를

온몸으로 느끼며 천국으로 향했던

참 신앙의 증거를 목격하게 된다.  


이제 겨우 2년째인 우리의 순례길은

아직 멀었다.

이제는 도장 찍는 재미가 아닌

진정한 순례의 의미를 조금 알 듯도 하다.

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발끝으로 천천히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배워가며

앞으로도 이 순례를 계속 이어가려 한다.


순례를 마치면서 드리는 기도처럼

"이 시간을 주님께 봉헌하며 청하오니...

이 세상에 살면서도 늘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지상의 나그네로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굳은 믿음과 희망을 지니게 하시고

 이 순례의 끝에 주님께서 마련하신 사랑의 천상 잔치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게 하소서.

아멘"


이 순례의 끝에 마련되어 있을 그 잔치에

나아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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