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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향 Jun 05. 2022

추억은 감각으로 되살아난다

 

그룹 <부활>의 노래를 들으면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 옛 친구가 생각난다.

정호승의 시를 읽으면

시노래를 참 잘 부르던 선배가 생각난다.

짙은 된장 내 풍기는 시래깃국을 먹을 때마다

떠오르는 그리운 이도 있다.              

       



추억은 감각으로 되살아난다.   

그곳에 언제, 왜 갔는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그곳에서 먹은 음식으로 그날의 영상이 그려지기도 하고,   

거리에서 들리는 멜로디 하나, 바람에 묻어오는 향기 하나가   

까마득히 잊고 있던 누군가를 떠오르게도 한다.   

그렇게 하나의 이미지가 또 다른 이미지들을 끌어와   

무언가를 기억하게 하고, 누군가를 그립게도 한다.                




 몇 해 전에 제주를 잠시 다녀왔다. 봄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였지만 그 나름의 정취가 있어서 좋았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내 나름의 몇 가지 여행규칙이 있다. 그중 하나는 일정이 아무리 바빠도 그곳에 가면 꼭 해보고 싶은 일이나 꼭 가봐야 할 곳 등 두어 가지를 정해 미리 수첩에 챙겨 적는 것이다. 인도 여행에서는 ‘인도 영화 보기’와 ‘갠지스 강가의 화장터 가보기’ 같은 것,  통도사 여행에서는 저녁 예불 시간 ‘법고소리 듣기’를 챙겼다. 이번 제주 여행에서 챙긴 것은 한림에 있는 모 카페의 '당근케이크 맛보기’였다. 많이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우연히 잡지에 소개된 그곳을 알게 된 뒤 머릿속에 늘 남아 있었다.


 숙소에서 거리가 꽤 멀었지만 봄비가 피어내는 안개를 뚫고 그곳을 찾아갔다. 생각보다 훨씬 좁은 실내, 정말 원 테이블 카페였다. 방송국 아나운서 출신의 여사장님은 대구와의 인연을 얘기하며 따뜻한 티와 당근 케이크를 정성껏 차려 내었다. 봄비 내리는 한적한 날 자기 혼자만의 공간에 절친한 친구를 불러 차 한 잔 나누는 분위기랄까. 찻잔 하나 접시 하나하나가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예쁜 주머니에 싸인 차 주전자에 두어 번 더 끓는 물을 부어 차를 우려내며 그곳에 머물렀다. 밖에는 보슬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젊은 시절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살아왔다는 그녀가 이제는 제주의 푸른 바닷가에서 자신만의 레시피로 투박한 당근 케이크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그 아름다운 노후가 마냥 부럽기만 했다. 아직은 내 깃 아래 파고드는 딸아이들이 제 갈 길을 찾아 세상 속으로 날아오르고 나면 나도 그녀처럼 한적한 곳에서 살고 싶은 바람이 있다. 조금은 ‘심심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 

 시장에서 흙이 송송 묻은 당근을 보면 제주의 그 투박하게 구워낸 케이크 생각이 난다. 혀끝에서 은은하게 피어나던 계피향이 생각난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 제주의 추억은 시각, 미각, 후각의 다양한 이미지로 남을 것이다.  추억은 한 가지 감각으로 느끼기엔 벅차다.          

 


 


 강신재의 소설 <젊은 느티나무>는 ‘그에게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로 시작된다. 주인공 숙희가 현규에게서 진짜 그 냄새를 맡을 수도 있었겠지만 어쩌면 그것은 여고생 숙희가 몰래 짝사랑하는 현규에게 받은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정갈하고 부드러운 그의 첫 이미지가 숙희의 가슴속에 각인되어 그를 볼 때마다 혹은 그를 생각할 때마다 비누 냄새를 맡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색깔과 향기를 갖고 있다.  큰언니를 생각하면 기분이 유쾌해진다. 조그만 엉덩이를 실룩거리면 부르는 언니의 트로트는 구성진 가사에도 불구하고 듣는 사람을 흥겹게 만든다. 나도 그렇게 귀엽게 나이를 먹어 가야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둘째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그냥 그렇다. 학창 시절 몰래 쥐어주던 용돈, 철철마다 보내주는 된장과 참기름, 밑반찬들…. 무말랭이 김치의 고들거리는 질감. 언니는 기억 속에 남은 고향이다. 

 셋째언니를 생각하면 늘 그립다. 단 일주일도 한 방에서 뒹굴며 살아보지 못한 언니. 멀리 남쪽 바다 끝자락에서 외롭게(물론 사랑꾼 형부가 함께 계시긴 하지만) 오십을 지나 육십의 나이를 넘어선 언니를 생각하면 그냥 애잔하고 그립다. 전화기를 통해 전해오는 언니의 목소리는 마음을 아리게 한다.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늘 부족한 우리의 시간이 아쉽고, 그저 그립고 보고 싶기만 하다.      

 넷째언니를 생각하면 작고 귀여운 패랭이꽃 생각이 난다. 쫑알쫑알 여고생 같은 수다에 단발머리,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천상 소녀다.

'빨주노초' 순서대로 나란히 앉은 1234번 우리 언니야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나를 어떤 이미지로 기억할까. 함께 지낸 시간들을  어떤 이미지로 기억할까. 우리 영이와 원이는 지금의 엄마 모습을 같은 여자로서 어떻게 기억할까. 몸이 아플 때 나는 옛날 울 엄마가 끓여주시던 비지찌개 생각이 나는데, 두 딸아이의 혀끝에 오래오래 기억되고 그리워질 엄마의 음식이 있을까. 나중에 나중에 내가 먼저 떠나고 나면 엄마가 된 영이와 원이는 자신의 아기들에게 외할머니의 어떤 모습을 들려주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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