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 「내게 남겨진 시간」, 이바라기 노리코 「벚꽃」
한 작가의 모든 글을 읽는 행위를 '전작주의'라 부른다. 내겐 김훈, 류시화, 황지우 정도이다. 굳이 한 사람 더하면 故 장영희 교수다. 장 교수의 글을 탐닉하게 된 계기는 2000년 대 초반 3여 년간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에서였다. 매주 금요일 회사 도서관에 올라 그녀의 칼럼을 펼친 기억이 있다. 그 글들은 모은 책이 『문학의 숲을 거닐다』이다.
책의 서문에는 "칼럼을 읽고 도서관이나 서점으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써 달라"라는 편집자의 요청이 적시되어 있다. 장 교수의 글은 스스로의 경험에서 우러나는 솔직한 일화가 배경이 되어 쉽게 읽힌다. 군더더기가 없다. 에피소드와 문학작품과의 연결고리는 자연스럽다. 읽고 나면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래서 모든 글이 명문이다. 문학고전을 대신 읽고 감상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건 덤이다.
「내게 남은 시간」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 』에 대한 칼럼이다. 짐작하듯 도스토옙스키의 '사형집행 전 5분의 시간'을 인용한다. 옆사람과 인사에 2분,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데 2분 , 남은 1분은 자연을 돌아보는 데 사용하겠다고 생각하던 중 황제의 특명으로 사형이 취소된다. 이런 죽음에 대한 경험을 밑바탕으로 하여 도스토옙스키는 대문호의 길을 걷게 된다.
글을 쓸 당시 장 교수는 암과 투병하고 있었고, 잦은 재발로 그리 오래 살지는 못하리라는 운명을 인지했을 것이다. 그리고 2009년 눈을 감았다. "내가 몇 번이나 더 아름다운 저녁놀과 가을을 볼 수 있을까"라는 문장은 읽는 것만으로도 숙연해진다. 당장 내려놓고 일상을 바라보라는 명령처럼 들린다.
영화 「이프 온리」는 오늘 밤 11시까지만 둘에게 허용된 운명의 시간임을 알게 된 남자를 말한다. 그래서 기억하기 싫었던 가족 이야기도 끄집어내었고, 죽음이 예정된 여자를 대신하여 죽는다. 자신의 운명을 아는 것이 좋지만은 않다.
일본 여류시인 이바라기 노리코는 「벚꽃」이란 시에서 "올해도 살아서 / 벚꽃을 보고 있습니다. / 사람은 평생에 / 몇 번 벚꽃을 볼까요(「벚꽃」 일부)"라고 노래했다. 장영희 교수의 노을 진 가을과 노리코 시인의 벚꽃 핀 봄을 바라보는 두 마음은 다르지 않다.
이름을 기억할 수 없지만 어느 서양 시인은 스물의 나이에 뜬금없이 앞으로 쉰 번밖에 더 벚꽃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표현했다. 처음은 기억해 낼 수 있지만 마지막은 언제일지 모른다. 그것이 우리를 주눅 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