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시월(十月)이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몇 번의 시월을 더 맞이하게 될지를 생각하면 가끔은 혼란스럽다.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던 소설가 김훈의 심경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시월이다.
일본의 국민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는 「10월의 노래」에서 "이 투명한 공기 속에서는 / 어떤 작은 거짓말도 할 수 없다."라고 읊었고, 독일 시인 릴케는 "주여, 이제 때가 왔습니다."라고 했다. 시월 안에는 동서를 막론하고 형용할 수 없고, 구체화하지도 못하는, 뭔가 비밀스러운 구석이 존재하는 것 같다.
시월에 감성에 저절로 공감이 시는 황동규 시인이 서른 남짓한 무렵 쓴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의 서른은 이립(而立), 즉 뜻을 세울 연배였고, 지금의 서른은 기껏 사회 초년에 불과하다. 시간은 물리적으로 따지면 모두에게 같지만, 그 길이와 깊이는 늘 상대적이다. 경험으로 아는 사실이다. 조선 시대의 하루와 2022년의 하루의 길이가 같을 수는 없고, 청춘의 한나절의 깊이와 노년의 한나절의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가을비에 젖은 도로위 낙엽 @splash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 한 탓이다."라는 표현이 참 좋다. 꼭 지켜야 할 약속은 지키지 못했는데 타닥타닥 내리는 빗소리가 일깨워 준 것이 아닐까. 해거름에 불빛이 그리운 가을 저녁, '한 잎 낙엽으로 좀 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은' 마음은 서시(序詩)를 접하는 느킴이다. 그래서 가을 그리고 시월이 오면 어김없이 이 시를 꺼내 읽는다.
이 시기에 황동규 시인의 시는 유독 서정성이 강하다. '진실로 사랑하는 기다림의 자세'를 가르쳐 주는 「즐거운 편지」를 읽을 수 있고,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던 「조그만 사랑 노래」도 보인다. 하지만, 내게는 「기항지 1」의 처음과 마지막 시구가 가장 차분히 다가온다. 그래서 늘 겨울 항구를 혼자서 오래도록 걷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올겨울은 그래도 되지 않을까.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 (…) 어두운 하늘에는 數三個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