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충족적 예언 - 바넘 효과
어느 순간이 되면 나무는 키 크기를 멈춥니다. 죽은 건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나무는 높이 생장과 부피 생장을 동시에 합니다. 높이 생장은 멎더라도 부피 생장은 계속되지요. 생물학적으로 부피 생장까지 멈춰야 죽었다고 합니다. 나무는 풀에는 없는 '리그닌'이라는 성장 호르몬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요. 리그닌이 나무의 부피 생장을 촉진하고, 껍질을 만드는데, 멈출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면 스스로 멈춥니다.
나무는 1년을 주기로 오롯이 지구의 공전과 궤를 맞춥니다. 봄이 오면 잠에서 깨어나 활력을 찾고, 여름이면 성장은 최고치에 다다릅니다. 가을이면 열매를 성숙시켜 후손을 준비하고, 겨울이 되면 긴 휴식의 시간을 갖습니다. 꼭 필요한 만큼의 영양분만 취득하고, 다음 해를 준비하기 위해 성장을 멈추는 나무의 지혜는 경이 그 자체입니다.
나무는 해마다 줄기 깊숙이 동심원 – 나이테 – 한 줄을 새깁니다. 나이테는 사계절이 뚜렷한 지역에 사는 나무만 가집니다. 봄부터 여름까지 활발히 생장하며, 가을에는 줄이고, 겨울에는 멈춥니다. 봄에서 여름까지 생장한 부분의 색깔은 엷고 넓으며, 가을에 생장한 부분은 진하고 가늘지요. 이것이 반복되어 나이테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겨울의 추위와 여름의 더위를 겪지 않으면 나이테라는 훈장은 없는 것이지요. 쌓이고 쌓인 경험을 연륜(年輪)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연륜은 곽재구 시인의 표현대로 "사물의 핵심에 가장 빠르게 도달하는 길"이기도 하고요.
직장에서도 높이 오르기를 멈춰야 할 때가 있습니다. 승진과 보직, 연봉이 마음에 들지 않아 멈추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어 닥쳐오는 퇴직만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가장 민감하고 강력한 충격파가 다가오는 시기이지요. 지위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서점에 가면 퇴직과 은퇴와 관련한 책만도 수백 종이 넘습니다.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불안(Status Anxiety)』의 서문에서 “지위의 상실이 가장 큰 불안이며, 비통한 마음을 가지기 쉽다.”라고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퇴직은 일생 단 한 번 경험하는 사건입니다. 그 길은 외롭고 고독하며, 그 두려움은 피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아무리 정신승리를 외쳐야 현실도피일 뿐입니다. 한 가지만은 확실한데, 누구도 나만큼 내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관심을 가진 척할 뿐이지요. 저도 경험했고 모두가 그랬지 않습니까?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지요. 예비 퇴직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는 이형기 시인의 <낙화>입니다. 아름답게 떠나고 싶거든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33년을 근무하고 퇴직했습니다. "꼭 연락 주셔야 합니다.", "우리 끝까지 가는 거죠." 같은 말로 축하와 위로를 받았습니다. 허언신공(虛言神功)에 불과하다는 사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축하건 위로 이건 마음에 달린 거지요. 저는 축하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sy)'은 아시지요? 자기실현적 예언이라고도 합니다. 어떤 목표가 실현될 것이란 기대를 하고 그렇게 행동하면, 기대했던 대로 이루어지는 현상을 말하는 심리학 용어입니다. 조만간 제가 간 길을 따라 올 후배들이 조언해 달라길래 웃으며 말했습니다.
유언장 쓰듯 밀 퇴직 인사를 써봐라. 직장생활 주마등같이 흐르고, 회사에 감사한 마음 간절해질 거다.
혼자 보낼 수 있는 일 반드시 찾아라. 나는 숲해설가 자격증을 땄고, 클래식 기타 열 곡 완성할 거다. 그리고 방송통신대 편입할 생각이다.
퇴직은 마땅히 축하를 받아야 한다. 그동안 못했던 공부도 하고, 글을 쓰려고 한다. 아름다운 일탈이 될 것이다.
퇴직이 임박했을 무렵 아내가 사주를 보고 와서 말하더군요. “당신의 전성시대는 2년 후라네요. 그때면 돈도 많이 벌 것이니 아들 결혼도 시키라네요.”라고. ‘바넘 효과(Barnum Effect)’를 생각했습니다. 모두에게 해당하는 내용을 자신의 특징으로 받아들이는 심리 상태를 말하지요. 점성학 같은 겁니다. 좋은 말이니 그리 믿고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화려한 꽃도 가을이면 지고, 풍성한 잎도 겨울이면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언제, 얼마나 아름답게 떨어지느냐만 결정하면 됩니다. 나무가 왜 키와 몸을 더 키울 수 있음에도 스스로 멈추는지 생각해 봅니다. 새로운 라운드가 시작되었습니다. 직장인들은 대부분 55세 전후로 퇴직을 하지요. 도스토옙스키는 『백치』에서 쉰여섯 – 비슷한 나이로 여기세요 -의 나이를 '진짜 인생이 시작되는 나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믿습니다.
사실 나이로 볼 때 예빠친 장군은 물이 한참 오른 시기였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쉰여섯이라는 나이는 어디로 보더라도 최고의 전성기였다. '진짜' 인생이 시작되는 나이가 아닌가.
As to age, General Epanchin was in the very prime of life; that is, about fifty-six years of age, — the flowering time of existence, when real enjoyment of life begi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