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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

by 남상훈

저녁에 산책하러 나갔을 때였어. 단골 카페에서 커피 한잔 사고 근처 공원으로 갔지. 늦지 않은 시간이라 아이들과 동네 어르신들까지 제법 많이 모여있었어.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리면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는 거야. 처음엔 아니겠지 싶었는데 또 한 방울 떨어지는 거 있지. 공원에 있던 사람들이 분주해지고, 나도 냉큼 엉덩이 털고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걸었어. 하필 스웨이드 소재로 된 재킷을 입었는데, 가로등에 비치는 빗방울을 보니 마음은 조급해지고 횡단보도 신호는 왜 이리 길게 느껴지던지. 빗방울도 점점 굵어지더라니까.

근데 있지, 별안간 그 사람이 생각나는 거야. 항상 비 소식이 있을 땐 우산 잘 챙기라고 내가 일러줬는데. 곧 일 마치고 돌아올 시간인데. 이대로면 그 사람도 비를 맞을 텐데. 집에 들러 우산 하나 챙겨서 우연처럼 역으로 데리러 갈까 생각했어. “산책하다가 지나는 길인데 비가 온다. 괜찮다면 같이 쓸래? 오늘 바쁘지는 않았어? 고생 많았네.” 이런 일회용 담소도 나누게 되겠다. 어쩌면 기약 없는 저녁 약속을 할지도 몰라. 핑곗거리가 될 만한 우연을 생각하며 서둘러 집 앞에 도착했는데, 야속하게도 더 이상 비는 내리지 않았어. 총알 같은 찬 바람만 불어대고 말이야.

참, 이런 게 사는 거지 싶더라. 바라는 데로 될 리 없고, 생각과 포개어지지 않는 반대의 현실. 마음 급급하게 달려와도 허탈한 결과. '차라리 산책을 안 했으면 비 오는 것도 몰랐을 텐데..' 같은 쓸데없는 후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에 대한 기대감. 정말이지, 스웨이드 재킷의 한쪽이 젖는 것쯤 아무렇지 않았는데. 결국 계단에 앉아 애꿎은 하늘이랑 신나게 눈싸움만 하고 집에 왔어.


그 사람은 별안간 비가 왔다는 걸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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