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둘 있는 친구가 청약에 당첨됐다. 군인 친구는 특진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가까운 사람의 좋은 소식은 웃음이 나게 하지만 한편으로 나쁜 눈을 하게 한다. 특진하기 위해 했던 그간의 노력이나 가정을 위해 열심히 사는 모습은 속절없이 외면당한다. 나이가 들면서 들려오는 경축 다발들이 이제 어른이구나 싶다가, 나는 아직 커다란 신생아 같다.
내가 어른이 됐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미성년자에게 판매할 수 없는 것을 아무 표정 없이 산다면, 혹은 직업을 갖게 된다면, 하고 생각했다가 이런 단순한 의미 말고 상대방에 대한 정보 없이 ‘어른 남자’ ‘어른 여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이 궁금했다.
누나에게 물었다. ‘누나는 언제 스스로 다 컸다고 생각해?’ 부모님 모셔오라는 말은 사라지고 법으로 따져 물을 때, 계획 없이 떠나도 그곳에 나를 걱정 없이 내버려 둘 수 있을 때, 생일날에도 케이크를 먹지 않을 때, 등을 얘기했다. 그에 비해 나는 되바라지게 대답했다. ‘감정을 표현하는 말보다 해명할 것이 더 많아지는 것.’ ‘내 잘못이나 상대방의 기쁜 일을 오롯이 인정하는 기능이 쇠약해지는 것.’
머릿속으로 한참 어른 타령을 하다가 원고를 펼쳤다. 이런 소재를 놓칠세라 얼른 끄적였다. 쓰는 행위로 밥 벌어먹을 심상이라 자질구레한 것도 그냥 넘기는 법이 없다. 운 좋게 내가 쓴 글이 당선되기도 했다. 문맹에 가까운 친구들부터 조예가 깊은 분까지 많은 사람이 응원해 주고 축하해 줬다. 나쁜 눈을 하고선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사치스럽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