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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신화 Jan 07. 2022

널 지켜주는 사람들이 지구에 꽉 찼어

  나의 작은 언니인 노신임 작가의 책 <7년 간의 마법 같은 기적>의 독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세상에 이런 딸이 있다니! 그들은 작은 언니가 치매 아빠를 우주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발휘했던 입담, 연기력, 엽기적인(?) 기발함에 매료되었다. 언니는 아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다. 너무나도 사랑했으니까. 그 사랑은 화내는 치매를 웃는 치매로 바꿨다. 아빠는 치매 속에서도 늘 껄껄 웃는 나날을 보냈다.  
   작은 언니의 유별난 사랑은 조카들, 그러니까 나의 아이들에게도 이어졌다. 라온이가 세 살 때의 일이다. 외할머니 댁에 놀러 간 녀석은 신임이 이모와 놀면서 쉴 새 없이 까르르거렸다. 감기에 걸린 탓에 열이 조금 있고, 콧물을 줄줄 흘렸지만 마냥 즐거워했다. 수시로 코를 푸느라 코밑이 빨갛게 헐었는데도 놀이를 멈추지 않았다. 하룻밤을 자고 집으로 왔는데, 저녁에 작은 언니가 내게 전화로 라온이의 몸 상태를 물었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알고 보니 감기를 옮았던 게다. 언니는 미안해하는 내게 괜찮다면서 라온이가 어떤지를 다시 물었다. 콧물도 열도 모두 사라지고 완전히 건강하다고 했더니 수화기 너머로 안도의 한숨이 들려왔다. 이어진 언니의 말은 감동 그 자체였다. 
   “다행이다. 내가 어제 ‘우리 라온이 감기 빨리 낫게 해주세요. 라온이 감기가 저한테 오게 해주세요.’라고 빌었었거든. 그게 이루어졌나 보다. 정말 다행이다.”
   눈물이 핑 돌았다. 작은 언니는 늘 그랬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제 몸을 녹여 빛과 온기를 주는 초와 같았다. 나의 아이들은 엄청난 행운아다. 이렇게나 든든한 이모를 두었으니.
 
   내 아이들에 대한 작은 언니의 애정은 엄마인 나의 애정 못지않았다. 때문에 라온이와 로운이는 이모를 너무나 좋아했다. 한 번은 내가 로운이를 병원에 데려가야 해서 작은 언니에게 라온이를 부탁한 적이 있었다. 언니는 하교한 라온이를 만나 치과 정기 검진에도 데려가고, 근사한 식당에서 맛난 음식도 사주었다. 내게 보내 준 사진과 영상에는 라온이의 차고 넘치는 즐거움이 오롯이 담겼다. 사진마다 녀석의 광대가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았다.
   라온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라온이의 말투, 표정, 행동 모든 것이 어쩜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냐며, 함께 있는 내내 행복했다고 했다. 그리고 고맙다고도 했다. 나의 부탁 덕분에 오랜만에 초등학교 앞에도 가보고 귀여운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면서. 언니가 녀석들을 보며 느꼈던 바를 전해주었는데, 울림이 큰 이야기였다.
  
   교문 앞에서 라온이를 기다리는 동안 언니의 눈과 마음은 맑아지는 것 같았다. 교문을 나서는 아이들은 살아 숨 쉬는 인형처럼 귀여웠다. 귀염둥이들이 함박웃음을 머금고 달려오자 엄마들이 안아주고 엉덩이와 등을 토닥였다. 그 어떤 영화 속 장면도 이보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울 순 없었다. 그들을 물끄러미 보던 언니는 문득 가슴 한쪽이 아려오는 걸 느꼈다.
   ‘그분도 딸을 저렇게 애지중지 키웠을 텐데…….’
   얼마 전 사무실에 왔던 중년 여성이 떠올라서였다. 그녀는 자식의 억울함을 풀고자 법적 소송을 준비 중이었다. 이십 대 초반의 꽃 같은 나이에 스스로 생명의 끈을 놓아버린 외동딸을 위한 투쟁이었다.(작은 언니는 직업상 소송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 딸은 학교에서 괴소문의 주인공이 되어 모함을 견뎌야만 했다. 하지만 커가는 스트레스와 우울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딸이 죽음으로 이른 과정을 애써 덤덤하게 설명하는 한 엄마의 모습에 작은 언니는 눈물을 흘렸다. 자식을 위해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는, 이토록 강인한 엄마가 있건만……. 하지만 그 딸은 마지막 순간에 한 가지 생각에만 사로잡혔을 것이다.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여길 떠나야지.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어.’
   작은 언니는 초등학교 교문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장면 속 주인공들에게는 부디 그런 비극이 없길 바랐다. 그리고, 라온이를 만나면 꼭 해줄 이야기를 생각해냈다.   
   드디어 라온이가 교문을 나섰다. “이모!” 하며 달려올 녀석을 안아주고자 두 팔을 활짝 벌렸건만 라온이는 친구와 얘기를 하느라 눈짓으로 살짝 인사했을 뿐이다. 언니의 마음 속에 서운함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라온이가 친구에게 격렬하게 손을 흔들어준 뒤, 이모를 향해 수줍게 미소 짓는 걸 보니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식당에서 작은 언니는 준비했던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이모가 궁금한 게 있어. 라온이는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누가 지켜줘?”
   “가족!”
   “그렇지. 가족이라고만 하지 말고, 누구누구인지 말해봐.”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고, 로운이도 있어.”
   두 살 동생도 자신을 지켜주는 존재로 여기다니! 언니는 놀랐지만, 티 내진 않았다.  
  “그렇구나. 엄마, 아빠, 로운이만 있을까?”

  “아니.”

  “또 누가 있어 그럼?”
  “할머니도 있고, 신임이 이모도 있고, 신희 이모도 있고, 이모부도 있고, 봉현이 형아도 있어. 그리고…… 음…… 봉자도 있고.”
   큰 언니네 반려견 ‘봉자’도 넣다니! 자신을 지켜주는 존재를 알고 그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건 마음이 건강하다는 신호다. 여덟 살 조카의 마음 건강을 다시금 확인한 작은 언니는 너무나 흐뭇했다. 녀석의 믿음을 더욱 키워주고 자물쇠를 채워주기로 했다.
   “그래. 모두들 라온이를 지켜주지. 그런데, 그들만 있는 게 아니야. 이모 주위에는 힘센 경찰들이 엄청나게 많거든. 그 사람들도 모두 우리 라온이를 지켜줄 거야. 그러니까 라온이를 지켜줄 사람들은 이 지구에 꽉 차 있어. 굉장히 많지.”
   잠자코 듣고 있는 라온이를 보며 작은 언니는 궁금했다. 이 아이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 혹시 가슴 벅차 할까? 머릿속에 어떤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있을까? 녀석의 반응에 한껏 맞장구를 쳐주고 폭풍 감동을 안겨줄 참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신이 났다. 마침내 라온이가 입을 뗐다.
   “근데, 엄마는 언제 온대?”
   천진난만하게 대화의 맥을 끊는 동심의 위력이란! 임기응변에 강한 언니지만,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야심 차게 준비한 이야기가 라온이의 한 귀로 들어갔다 한 귀로 흘러나온 것 같아 아쉬웠다. 녀석의 깊은 곳에 새겨질 줄 알았는데……. 언니는 아쉬움을 삼키고 녀석의 질문에 답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조만간 다시 기회를 만들겠노라 다짐하면서.
 
   이렇게나 귀한 이야기를 정말로 흘려보낸 거란 말인가? 그날 밤, 나는 라온이에게 물었다.

   “라온아,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라온이를 지켜주는 사람이 누구지?”
   “엄마, 아빠, 로운이, 할머니, 신임이 이모, 신희 이모, 이모부, 봉현이 형아, 봉자.”
   “우와! 엄청 많네.”
   “또 있어. 신임이 이모가 아는 힘센 경찰들이 지구에 꽉 차 있는데, 그 사람들도 다 나를 지켜줄 거래.”
  라온이가 잠든 이후, 곧바로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니 언니가 너무나도 기뻐했다. 참으로 아름답고, 따뜻하고, 흐뭇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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