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난 죽는 게 무서워.”
일곱 살 로운이가 한 말이다. 내가 자장가를 불러준 뒤 불을 껐을 때였다. 바로 옆에 아홉 살 라온이가 누워 있는데도 무서운 모양이었다. 조금 신기했다. 이맘때 아이들의 특징인 건가? 라온이가 일곱 살 때 했던 말을 이제 막 그 나이가 된 로운이도 하다니!
“걱정 마. 우리 로운이는 지구에서 충분히 행복하게 잘 지내다가 하늘나라에 갈 거니까. 거기서도 물론 잘 지낼 거고. 엄마가 먼저 하늘나라에 가 있을 거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엄마랑 하늘나라 같이 갈래.”
그동안 녀석이 내게 했던 천진난만한 애정표현들은 언제나 나를 미소짓게 했다. 반드시 엄마와 결혼할 거라고,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평생 엄마하고 같이 살 거라고……. 하지만 이번에는 하마터면 녀석을 나무랄 뻔했다. 그곳이 어디라고 나와 같이 가겠다는 건지……. 내 심장이 싸늘해지고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이었다.
자기가 얼마나 위험한(?) 말을 했는지 모르는 이 꼬마를 어찌 할꼬? 나는 어둠 속에 내 심각한 표정을 감춘 채 눈을 이리 저리 굴리며 뭐든 생각해내려 했다.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났다. 한편 설레기도 했다. 나와 함께라면 그 어디라도 갈 마음을 품고 있다니! 세상에 나만큼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 이토록 깜찍한 사랑꾼의 위대한(?) 사랑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함께 하늘 나라로 갈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명랑하면서도 다정한 말투로 내뜻을 전하기 시작했다.
“음…… 우리 라온이랑 로운이가 지구에 올 때도 엄마가 먼저 지구에 와 있었잖아. 그래서 너희가 이렇게 잘 지낼 수 있도록 준비하면서 기다렸고.”
“근데, 엄마는 할머니 때 하늘나라 가는 거야?”
“아마 그럴 거야. 엄마도 지구에서 하고 싶은 것들 다 하고 나서 갈 거야.”
잠자코 있던 라온이가 끼어들었다.
“엄마가 하고 싶은 게 뭔데?”
“많지. 일단 우리 라온이랑 로운이가 행복하게 지내는 거 모두 다 보는 거. 또…… 지구에 있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지내는 것도 보고 싶어. 그들이 그렇게 지낼 수 있도록 엄마가 노력도 해야지. 아! 지구에 있는 모든 사람 말고, 마음이 곱고 착한 사람들이 행복하게 지내는 걸 봐야지. 엄마는 마음이 고약한 악당들이 행복한 건 바라지 않아.”
뒤이어 로운이가 상상력과 엉뚱함이 충만한 아이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그럼 도깨비는?”
“도깨비? 음…… 만약 착한 도깨비라면 그 도깨비가 행복하기를 바랄 거야.”
“그럼 적당히 착한 도깨비는?”
“적당히 착한 도깨비? 흐흐. 만약 악당이 아니라면…… 그 도깨비도 행복하길 바랄 거야.”
이번에는 라온이가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동생과는 다른 차원의 질문을 했다.
“엄마는 정말로 착한 사람이야? 아니면 그런 사람인 척하는 거야?”
다른 사람이 물었다면 왠지 '의심'의 기운을 느껴져 살짝 내 미간을 찌푸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온이의 질문에는 미소가 절로 났다. 동심의 순수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녀석은 종종 이런 류(?)의 질문을 했다. 듣는 순간 오묘한 긴장감을 주고, 선뜻 대답하는 것보다 생각 바퀴를 부지런히 돌린 후 답해야 하는 질문 말이다. 얼마 전에는 “엄마, 도둑은 태어날 때부터 도둑으로 태어난 거야? 아니면 그렇게 되고 싶어서 된 거야?”가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최선의 대답을 찾으려 노력하고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해주려 애쓴다. 그리고 그 과정을 즐긴다.
“라온이 생각에는 어떤 거 같아?”
“정말로 착한 사람 같아.”
“나도 그런 거 같아. 흐흐. 솔직히 말하면 엄마도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는 몰라. 그걸 알기 위해서 계속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는 거지. 사람들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제대로 아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그래서 사고력이 매우 뛰어난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지. 그래도 일단, 엄마는 나쁜 사람은 분명히 아닌 거 같아.”
“맞아! 엄마는 가장 착하고, 지혜롭고, 예쁜 사람이야.”
라온이는 나에 대해서는 별 도장을 남발하는 아이였다. 나를 통해 나온 것은 언제나 과하게 칭송했다. 나의 그림, 요리, 창작 동화는 늘 최고 작품으로 대접받았다. 매우 감사한 일이지만, 앞으로 녀석이 느낄 실망을 어이 할꼬…….
“흐흐. 라온이가 보기에 엄마가 그런 사람 같아? 그런데, 엄마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야.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거지.”
“아니야! 엄마는 완벽한 사람이야!”
“어머나!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마워. 그렇지만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단다. 엄마도 한때는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사람을 찾았어. 그 사람을 따라 하고 싶었거든. 그런데,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달았지. 그리고, 차라리 나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게 더 좋다는 걸 알게 됐어. 물론, 아무리 노력해도 엄마가 완벽한 사람이 되지는 않을 거야. 다만 꾸준히 노력하면 더 멋지고 좋은 사람은 될 거야.”
속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언젠가 아이들과 꼭 나누고 싶었던 주제였는데 드디어 나누다니! 아홉 살, 일곱 살에게는 이른 감이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미루고 있던 차였다. 지금 보니 진즉에 해도 괜찮았을 것 같았다. 욕심 같아서는 계속하고 싶었지만, 그날은 맛보기 수준에서 마무리했다. 더 깊은 이야기는 밝은 곳에서 눈빛과 표정도 주고받으며 나누고 싶었다.
다음 날 아침, 창 너머 들어 오는 햇살 아래 두 꼬마가 야무진 손놀림을 시작했다. 장난감 자동차 두 대가 순식간에 로봇으로, 다시 자동차로 바뀌었다. 그 과정은 볼 때마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로 신기했다. 변신 놀이가 끝났을 때, 나는 어제 못다 한 이야기를 이었다.
“얘들아, 어젯밤에 했던 얘기 조금 더 해보자.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있는 거 같아?”
“음…… 세종대왕!”
라온이가 변했다. 어제부로 엄마가 완벽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접은 듯했다. 다행이었다.
“세종대왕님도 정말 훌륭하신 분인데,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는 않았어.”
“아, 맞다. 건강.”
“그래. 아쉽게도 건강 관리는 잘하지 못했지. 또 완벽한 사람이 누가 있는 거 같아?”
아이들은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젓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세종 대왕도, 이순신 장군도 정말 훌륭한 사람은 맞지만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단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어.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를 완벽한 사람이라고 믿고 그 사람을 따라 하려고 해. 바로 ‘멘토’를 따라 하려는 거지.”
“멘토가 뭐야?”
꼬마 형제가 작은 눈을 반짝이며 동시에 물었다. 대화 중에 낯선 단어가 나오면 어김없이 볼 수 있는, 언제 봐도 사랑스러운 반응이었다.
“가르침을 주는 사람. 많은 사람이 멘토에게서 가르침을 얻으려 하고, 그 멘토를 따라 하려고 하지. 그런데 멘토에 너무 빠지다 보면 문제가 있을 수가 있어.”
“무슨 문제?”
“혹시 멘토가 잘못된 행동을 하더라도 ‘괜찮아. 우리 멘토님은 그럴 수 있어. 멘토님이 하신 행동이니까 문제없어. 그분은 완벽한 분이니까.’ 이러면서 멘토의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할 수도 있지.”
“정말로 그래?”
라온이와 로운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좀처럼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보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물론, 누군가를 멘토로 두고 그의 좋은 면을 본받고자 노력하는 일은 바람직하다. 다만, 지나친 몰입은 경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멘토의 함정’에 빠지기 십상이다.
특정 분야에서 빼어난 업적을 이뤄낸 유명인을 멘토로 삼고 열정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현상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멘토의 심각한 잘못마저도 아름답게 보며 진실을 외면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멘토의 잘못을 알게 되었을 때 몹시 괴로워하는 이도 있다. 열렬히 믿고 따르던 존재의 못난 실체(?)를 직시했을 때 몰려오는 배신감과 실망에 무너지고, 삶의 방향을 잃은 사람처럼 방황하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그런 사람들이 정말로 있어. 자, 그런 문제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젯밤 대화에서 이미 해주었다. 다행히 라온이가 기억했다.
“내가 완벽한 사람이 돼.”
“옳지. 누군가를 닮으려고 하는 것보다는 나 스스로가 완벽한 사람, 멋진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거지. 그럼, 또 생각해보자. 열심히 노력하면 나 스스로가 완벽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과연 ‘나는 완벽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괜찮을까?”
“아니.”
“왜?”
“자기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면 더 노력하지 않으니까.”
“우와! 그래, 그래. 어떻게 하든 완벽한 사람은 되기 힘들다는 걸 알고 꾸준히 나 자신을 성찰해보고 더 멋진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게 중요하지. 와우! 이 중요한 사실을 벌써 알고 있다니! 우리 라온이랑 로운이는 꼭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엄마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노력 중이고.”
문득 걱정이 스쳤다. 혹시 이번 대화로 내 아이들이 모든 사람을 부족하기만 한 존재로 보면 어쩌지? 남들에게서 본받을 점을 찾는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하지만 걱정은 이내 사라졌다. 앞으로 ‘멘토의 함정’에 대해 수시로 대화하며 오해가 없도록 하면 된다. 그 대화에는 ‘배움의 자세’를 꼭 담을 것이다. 즉, 모든 존재에게는 배울 점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할 것이다.
대화가 쌓일수록 라온이와 로운이가 두 축의 균형을 갖춘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한 축은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없음을 아는 것이고, 다른 축은 깨알처럼 작은 개미 한 마리에게조차도 배울 점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