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책을 내 아이가 읽는 순간이 드디어 왔다. 예상보다 빨랐다. 여덟 살 로운이가 저녁 독서 시간에 <비가 와도 꽃은 피듯이>를 집어 들고 책상에 앉았다. 요 며칠 글 밥이 제법 많은 책을 읽는 재미에 빠진 터였다. 나는 이 작고, 특별한 독자의 반응이 궁금했지만, 티 내지 않았다. 다른 책을 읽으며 이따금 고개를 돌려 슬쩍 봤을 뿐이다. 내 책은 아기자기한 그림은 없고, 글자만 담겼다. 그런데도 로운이는 자세 하나 흐트러짐 없이 빠른 속도로 읽어 나갔다. 어느덧 세 번째 소제목 부분을 펼쳤다. “로운이 벌써 거기 읽는구나! 어때?” “엄청 재밌어! 처음 시작부터 엄청 재밌어.” 녀석은 책장을 이전으로 빠르게 넘기더니 집게손가락으로 책의 한 부분을 짚었다. “봐봐, 처음 시작이 ‘정적을 깨는 전화벨이 울렸다’잖아. 다른 긴 책들은 처음엔 일단 사람을 소개하는 부분이 한참 나와서 좀 지겹다가, 본격적으로 사건이 나오면서부터 재미있어지거든. 그런데 <비가 와도 꽃은 피듯이>는 처음부터 재밌어.” 한참을 몰입해 읽던 로운이는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시간이라는 말에 몹시 아쉬워했다. “로운아, 그렇게나 재미있어?” “응, 엄청 감동적이야!”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이야기라 그럴 거야.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그 점에 감동을 많이 받았지.” 다시 한번 느꼈다. ‘가족’이라는 테마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누구나의 마음에 울림을 준다는 것을. 그만큼 소중한 것임을. 옆에서 <모모>를 읽던 열 살 라온이가 끼어들었다. “엄마, 세상에 <모모>를 읽은 사람이 많아? <비가 와도 꽃은 피듯이>를 읽은 사람이 많아?” “<모모>는 전 세계 사람들이 읽었고, 엄마 책은 한국 사람이 주로 읽었지. 아! 일본 사람이 읽고 나서 후기를 남긴 것도 있네.” 라온이가 나를 향해 눈동자를 반짝이며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그럼, 앞으로 엄마 책을 전 세계 사람들이 읽게 될 거야. <해리포터>처럼.” “우와! 정말?” 이토록 사랑스러운 축복의 말을 듣다니! 라온이를 꼭 안아 올려 빙그르르 돌려주었다. 내가 받은 행복에 비하면 보답이 너무 작았지만, 녀석은 세상을 다 가진 아이처럼 행복하게 내 품에서 까르르거렸다. 문득, 내가 기뻐하는 이유를 아이들이 오해하지 않게 해줄 필요성을 느꼈다. “라온이 말대로 되면 진짜 좋겠다. 생각만으로도 너무 행복해. 그런데, 엄마는 유명해지는 게 좋아서 그런 게 아니야. 이 책으로 전 세계 많은 사람이 가족의 소중함도 알고, 마음이 따뜻해지면 좋다는 거야. 그리고 사실, 엄마는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아. 유명인은 자유가 없거든.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쳐다보고, 사인(sign)해달라고 하고, 사진 찍어달라고도 하고 그래. 가족들이 식당에서 편하게 식사를 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지. 놀이공원 같은 곳에 가도 마찬가지일 거야.”
다음 날, 학교를 마친 로운이와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가는 방향이 같은 반 친구들도 함께였다. 한 아이가 OOO을 실제로 봤고, 엄마 휴대폰으로 사진도 찍었다며 자랑스레 보여줬었다. 친구들이 ‘우와!’라고 했지만, 로운이는 내 손을 끌어당겨 OOO이 누군지 조용히 물었다. 집에 텔레비전이 없으니 모를 수밖에. 내가 유명한 사람이라고 알려주었더니, 로운이는 내 휴대폰을 잠깐 빌려달라고 했다. 그리곤 뭔가를 검색 후 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엄마도 유명한 사람이야. 봐봐. 우리 엄마 이름으로 검색하면 이렇게 나와.” 로운이가 보여준 휴대폰 화면에는 인터넷 포털에 있는 나의 정보(사진, 이름, 작품명 등)가 있었다. 아이들이 신기해하며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이게 너네 엄마야?” “응, 우리 엄마는 작가거든.” 한 어머니도 로운이가 기대한(?) 반응을 해주었다. “우와! 로운이 어머니께서 작가셨군요!” “아…… 예…… 뭐……” 평소 같으면 붙임성 좋게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였을 나지만 그날은 멋쩍게 웃기만 했다. 로운이는 이어서 친구들에게 내 책의 표지 이미지들을 하나씩 보여줬다. 내 책 이름을 검색하면 자신의 사진도 나온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아이들은 내 휴대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 아이는 내 책을 읽은 것 같다고도 했다(아마 녀석의 착각일 가능성이 크다). 유명인 OOO 사진을 자랑했던 아이는 급기야 이런 말까지 했다. “엄마도 작가 해.” “엄마도?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아들과 가볍게 미소 짓는 엄마를 보며 나는 그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대게 그럴 땐 그 아이의 마음을 풀어줄 말을 해주곤 했는데, 그날은 달랐다. 대화 주제가 빨리 나 외의 것으로 옮겨가길 바랐다. 그 모든 상황의 연출자인 로운이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흐뭇해했다. 어깨에는 살짝 힘이 들어간 채로. 그날 녀석은 알림장에 부모님 확인 서명을 받을 때 평소와 달랐다.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공손하게 알림장을 받쳐 들었다. 마치 중세의 기사가 왕에게 진귀한 것을 바칠 때의 모습 같았다. “오! 노신화씨! 노신화씨는 유명한 사람이니까 여기 사인(sign) 좀 해주세요.” 나는 피식 웃음이 났지만,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뒤 굵은 목소리로 “오냐”하고는 서명을 해주었다. 근엄한 왕처럼 말이다. 그럴 때마다 깨닫는다. 로운이의 엉뚱함과 장난기는 나를 닮았음을. 우리는 죽이 잘 맞는 서로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로운이는 유명한 게 좋은 거 같아?” “응. 유명하면 사람들이 막 사인해 달라고 하고 좋아하잖아.” 로운이의 눈동자가 빛났다. 유명인이 됐을 때를 상상만 해도 기쁜 모양이었다. 전날 저녁 독서 시간에 ‘유명하면 자유롭지 못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으면서도 신경 쓰지 않는 게다. 장래희망으로 ‘연예인 되기’를 꼽는 아이가 많다던데, 내 아이도 그런 걸까? 하지만 선뜻 응원해줄 순 없다. 유명세 때문에 괴로움을 겪거나, 급기야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맞이한 이들에 대한 소식을 심심치 않게 들어서다. 로운이 마음에 혹시 있을지도 모를, 유명인이 되려는 생각을 지워주고 싶었다. 하여 유명세의 단점을 확실히 알려줄 얘기를 생각해보았다. 그러다 이내 머리를 저었다. 큰 잘못을 저지를 뻔했음을 깨달았다. 아이의 미래에 대해 선을 긋고, 그 길로 가는 가능성의 씨앗을 미리부터 뽑아버리려 하다니! 걱정에 사로잡힌 탓이었다. 사람의 앞날은 누구도 알 수 없다. 로운이가 유명인이 될 가능성을 열어두었을 때, 내가 걱정만 하고 있을 순 없다. 녀석이 유명한 것에 대해 현명함을 갖추도록 돕는 게 바람직했다. ‘유명한 것은 좋은 것’이라 생각 중인 아이에게 어떤 얘기를 해주면 좋을까나? 선뜻 떠오른 것은 ‘인기에 연연하지 말기’였다. 하지만 여덟 살에게는 적절해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자기를 좋아해 주면 일단 기분 좋은 게 자연스러울 나이인데, 그걸 즐기지 말라는 말이나 다름없으니까. 이런저런 고민을 해봐도 딱히 좋은 생각이 나지 않던 차에 소크라테스의 지혜가 담긴 <크리톤>을 읽었다. 사형을 앞둔 소크라테스에게 친구 크리톤이 찾아와 탈옥을 권했지만, 소크라테스는 거부했다(당시는 탈옥이 충분히 가능했다). 크리톤은 이대로 사형이 집행되면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막아내지 못한 친구들이 대중의 비난을 받을 것이라며 다시 한번 설득하려 했다. 소크라테스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
- 소크라테스 : 좋은 의견은 존중하고 나쁜 의견은 존중하지 말아야겠지? - 크리톤 : 그렇지.
- 소크라테스 : 현명한 사람의 의견은 좋고, 현명하지 못한 사람의 의견은 나쁘겠지? - 크리톤 : 물론. - 소크라테스 : 체조 연습에 열중하고 있던 학생은 모든 사람의 찬양과 비난과 의견을 경청해야 할까, 아니면 그가 누구든 의사 또는 체육가 한 사람의 말만 들어야 할까?
- 크리톤 : 한 사람의 말을 들어야지.
- 소크라테스 : 그리고 그는 많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한 사람의 책망을 두려워하고 또 칭찬을 반가워해야겠지? - 크리톤 : 물론 그렇지. - 소크라테스 : 그리고 그는 모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종합해서 그것에 따르기보다는, 분별력이 있는 한 사람의 교사가 좋다고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 행동하고, 훈련하고, 먹고, 마셔야겠지? - 크리톤 : 그렇지. (중략) - 소크라테스 : 우리가 지금 검토하고 있는 문제인 ‘정의’와 ‘부정의’,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선과 악’의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많은 사람의 의견을 따르고 그 의견을 두려워해야 할까? 아니면 분별력이 있는 한 사람의 의견을 따르고 그 의견을 두려워해야 할까? 세상의 모든 사람의 의견을 따르고 그 의견을 두려워해야 할까? (중략) - 소크라테스 : 그렇다면, 나의 벗이여. 우리는 많은 사람이 우리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 괘념하지 말아야 하네. 오직 ‘정의’와 ‘부정의’를 분별할 줄 아는 한 사람, 그 사람이 말하는 것, 그리고 진리를 존중해야 하네.
<크리톤> 중에서
오직 참된 진리를 갖춘 자의 의견만 신경 써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머릿속이 번쩍했다. 로운이에게 줄 근사한 지혜가 떠올랐다. 녀석 뿐 아니라 내게도 도움 될 지혜였다. 로운이와 손을 잡고 길을 걷다가 질문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로운이는 어떤 게 더 좋을 거 같아?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거, 아니면 지혜롭고 참된 마음을 지닌 한 사람에게 사랑받는 거.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다면 다양한 사람이 있다 보니 그중에는 평범한 사람뿐 아니라 고약하거나, 많이 이상한 사람도 있을 수 있어.” “음…… 지혜로운 한 사람에게 사랑받는 거.” “어머나! 우리 로운이가 소크라테스만큼이나 지혜롭구나. 소크라테스가 그랬거든. 모든 사람 말에 신경 쓰지 말고, 현명하고 바른 한 사람의 말에 신경 써야 한다고. 이 말을 이해하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신경 쓰지 않게 돼.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지혜롭고 참된 마음을 가졌는지가 중요할 뿐이지. 로운이도 이 생각을 늘 하면 좋을 거야. 그러면 실제로 지혜롭고 참된 사람이 로운이를 좋아할 거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니?” “응.” “대단한걸! 솔직히 말하면 한때 엄마는 인기 많은 사람이 부러웠거든. 이제는 아니야. 많은 사람이 엄마를 좋아해 주는 걸 바라지 않아. 지혜롭고 참된 사람이 엄마를 좋아해 준다면, 단 한 사람이어도 좋아. 그런 의미에서 엄마는 참 행복한 사람이야. 지혜롭고 참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엄마를 좋아하고 있으니까.” “누구?” “바로 바로 로운이!” 로운이가 흡족한 미소를 보였다. 그 대화 이후, 녀석은 알림장 부모님 확인 서명을 받을 때 ‘유명한 사람’에게 내미는 시늉을 더이상 하지 않았다. ‘유명함’에 대해 마음에 변화가 생긴 것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