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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신화 Apr 13. 2024

언제나 '더 나은 곳'에서 지내는 비결

 갑작스레 이사를 결심한 다음 날, 바로 집을 찾아냈다.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 라온이와 로운이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간 익숙했던 장소, 친구 등과의 작별이 불가피한 계획에 대해 열 살, 여덟 살 형제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일단 놀람과 걱정을 내비쳤지만, 호기심도 곁들였다. 이사 후 펼쳐질 좋은 점들에 대해 내가 실감 나게 나열했더니, 두 아이의 요정 같은 눈망울이 점차 빛났다. 결국엔 “엄마, 우리 이사 가자!”라는 외침까지 나왔다.
   유쾌한 동의를 얻어낼 줄 알았다. 녀석들이 그간 ‘낯섦’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알기 때문이다. 둘은 낯선 사람, 낯선 장소, 낯선 음식 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대감을 품고 즐기기까지 한다. 이처럼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는 앞으로도 내내 간직하길 바란다. 사는 동안 여러모로 도움이 될 강점이니까.
   이사 당일, 학교를 마치고 아빠를 따라와 현관에 들어선 형제는 약속이나 한 듯 “우와!”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만큼 멋진 집이라서? 아니다. 전에 살던 집과 같은 크기에다, 구조도 별만 다른 게 없었다. 오히려 이삿짐들이 곳곳에 늘어져 있어 어수선하기까지 했다. 라온이와 로운이는 그저 이사를 왔다는 자체가, 즉 변화가 생긴 것이 마냥 좋았던 게다.
   집구경을 빠르게 마친 형제는 피구공을 들고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전에 살던 동네에선 피구 놀이의 중심축이던 녀석들이다. 둘이 피구공을 들고 나타나면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모여들어 피구가 시작됐고, 둘이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면 피구가 끝났다. 우리집 이사 소식에 동네 아이들은 피구를 더 이상 못할까 봐 걱정했다. 우리는 작별 선물로 새 피구공을 기증하고 왔다. 그 동네의 피구 문화가 계속되길 바라며.
   새로 이사 온 동네에서의 첫 피구를 기대하며 나갔던 라온이와 로운이가 예상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어? 벌써 왔네? 너희들 피구 했어?”
   “아니. 누가 먼저 피구를 하고 있었어.”
   “그래? 그럼 같이 하자고 말해봤어?”
   “응. 그런데, 안 된대.”
   “같이 하자고 말했는데 안 된다고 했다고? 왜? 무슨 이유가 따로 있던 거야?”
   “그냥 안 된대.”
   그전 동네에서 라온이와 로운이는 누구든 피구를 하고 싶어 하면 끼워줬었다. 처음 보는 아이여도, 피구를 잘 못 해도 문제 삼지 않았다. 가만히 구경만 하는 아이에게는 “같이 피구 할래?”파고 물으며 함께 했었다. 그러니 새로 이사 온 동네 아이들의 거절에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이 동네의 분위기가 그런 걸까? 다음 날은 나도 함께 나가서 분위기를 살펴봐야겠노라 생각했다.


   다음 날, 전학 간 학교에서 첫날을 보내고 온 로운이에게 학교는 어땠는지 물었다.
   “선생님이 너무 무서워.”
   “그래?”
   “혹시 혼났어?”
   “아니. 나는 안 혼났는데 선생님이 친구들 무섭게 혼낼 때 내 마음이 불편해.”
   “아…… 그렇구나.”
   “엄마…… 나 원래 집으로 다시 이사 가고 싶어.”
   이 말이 나올 수밖에. 이사를 왔더니 새로운 학교에서는 마음이 편치 않고(전의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특히 아주 친절하고 재미있다며 만족스러워했음), 동네에서 매일같이 즐겼던 피구를 할 수 없는 분위기이니 오죽할까! 여덟 살밖에 안 된 아이가 이 상황들을 의연하게 견뎌내길 바라는 건 무리다.
   만약 로운이가 조금 더 컸다면, 기대했던 바와 다른 새로운 환경에도 시무룩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이의 문제는 아닌 듯했다. 남편이 들려줬던 옆 부서 직원 얘기가 떠올랐다. 그 부서에 온 지 한 달 정도 된 직원이었다. 한 부서에서만 10년 가까이 근무하다 발령이 나서 이동한 것이었다. 그 직원이 우연히 남편과 차를 마시면서 그간의 심정을 토로하며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낯선 환경, 낯선 업무도 힘든 이유였지만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서운함이 커서였다. 같은 부서 직원들이 자기에게 먼저 다가와서 챙겨 주지 않는 게 서운했던 게다.
   그 직원은 이전의 부서가 몹시도 그리울 것이다. 하지만, 알아야만 한다. 그 이유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음을. 또한, 앞으로도 다른 부서로의 발령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음을. 안타깝게도 새로운 부서가 마음에 쏙 들리란 보장은 없다. 그때마다 매일 힘겨움을 꾹 참은 채 언젠간 좋은 부서로 갈 거라는 불확실한 희망 속에서 지내야 할까?
  살다 보면 한동안 지내야만 하는 곳이 불편하고 힘들지만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인 경우는 언제든 생긴다. 남편 회사의 그 직원도 그랬고, 여덟 살 로운이도 그런 상황에 맞닥뜨렸다. 나는 그들에게 어떻게든 참아내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대신 좋은 방법을 하나 알려주려 한다.  
   로운이의 조그만 두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 로운이가 이사 와서 아직은 이것저것이 좀 불편하지? 아마 처음이라 더 그럴 거야. 다시 원래 집으로 이사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해. 그런데 앞으로도 로운이는 어디든 익숙했던 곳을 떠나서 새로운 곳에서 지내야 할 경우가 생길 거야. 다른 집에서 살 수도 있고, 다른 학교에 다닐 수도 있어. 만약 회사원이 된다면 사무실을 여기저기 이동할 수도 있어. 아빠도 그랬잖아. 원래 여의도에 있었다가 지금 다니는 곳으로 이동한 거야. 엄마도 회사에 다닐 때 이동을 많이 했었지. 이렇게 새로운 곳으로 가서 지낼 일이 많은데 그때마다 마음에 안 들어하고 ‘아우, 원래 있던 곳으로 가고 싶다.’라면서 아쉬워만 하면 어떨 거 같아?”
   “안 좋아.”
   “그래. 많이 곤란하고 힘들 거야. 아빠 회사에 어떤 분이 다른 곳에서 일하다가 이번에 아빠 사무실 있는 곳으로 왔는데 힘들어한대. 사람들이 자기를 잘 챙겨 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한다는 거야. 엄마는 그 얘기 듣고 안타까웠어. 사무실이 누군가를 챙겨 주는 분위기가 아니라면, 새로 왔다는 그 직원이 분위기를 바꾸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지. 자기가 먼저 사람들을 챙겨 주다 보면 다른 사람들도 서로를 챙겨 주는 분위기가 되지 않을까? 그렇게 자기가 있는 곳을 스스로가 ‘better place’로 만드는 거야.”
  “배러 플레이스(better place)가 뭐야?”
  “더 나은 곳. ‘배러(better)’ 는 ‘더 나은’이고, ‘플레이스(place)’는 ‘장소’라는 뜻이야. 우리 로운이도 교실을 ‘배러 플레이스(better place)’로 만들 수 있을 거야. 선생님이 친구를 무섭게 혼내는 걸 보는 게 불편하다고 했지? 그렇다면 친구들이 혼나지 않도록 로운이가 도와주는 게 어때?”
   “좋아.”
   시무룩하던 녀석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 그러면 로운이 덕분에 친구들은 덜 혼날 거고, 친구들 간에 점점 서로를 도와주는 분위기가 될 거야. 그야말로 better place가 되는 거지. 상상만 해도 너무 멋지고 좋다.”
   상상력이 풍부한 로운이는 내가 말한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더니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참! 로운아, 이제 이 아파트 피구 놀이 문화도 우리가 바꾸는 게 좋겠다. 그거 알아? 전에 살던 곳도 우리가 바꾼 거였어. 우리가 처음 피구를 시작했고, 점점 더 많은 동네 아이들이 함께했던 거야. 다들 피구 덕분에 엄청 즐겁고 행복했잖아. 우리는 누구든 피구를 하고 싶어 하면 다 끼워줬었지? 이 아파트도 그런 분위기가 되도록 우리가 바꿔보는 게 어때?”
   “좋아!”
   “그래, 해보자!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아자아자!”
   “아자아자!”
   로운이의 두 눈이 넘치는 의욕으로 반짝거렸다.
 
   조금 뒤 라온이가 학교에서 돌아오자, 로운이는 기다렸다는 듯 피구공을 집어 들고 말했다.
   “엄마, 나 better place 만들러 갈래.”
   “좋아. 얘들아, 이번에는 엄마도 같이 나갈게.”
   밖에는 아이들이 아무도 없었다. 우리 셋은 곧바로 피구를 시작했다. 셋이어도 얼마든지 깔깔거리며 즐거웠다. 한참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지나가다 멈춰 서서 우리를 구경했다. 로운이가 천천히 다가가서는 부드럽게 말했다.
   “같이 놀까?”
   그 아이가 기대에 찬 얼굴로 엄마를 바라보자, “너 피구 한 번도 안 해봤는데 괜찮겠어?”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가 그날 처음으로 피구를 한다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라온이와 로운이가 친절하게 가르쳐줬으니까.
   나, 라온이, 로운이, 그 아이까지 넷이 신나게 피구를 하고 있는데, 두 아이가 지나가다 멈춰서서 우리를 구경했다. 이번에도 로운이는 그들에게 바로 다가갔다. 그렇게 자기가 지내야 하는 곳을 ‘better place’로 만들어가는 작업을 충실히 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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