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신화 May 28. 2024

고민 해결의 정석

  

  전등을 껐지만, 방안은 창문 밖 불빛 덕에 아주 캄캄하지는 않았다. 침대에 누운 아이들에게 밤 인사를 한 뒤 이마에 뽀뽀를 해주었다. 천천히 방 밖으로 나가려는 나를 라온이가 부르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얼마 전부터 어떤 생각이 자꾸 나서 답답하다고. 뭘 하다가도 그 생각이 떠올라 힘들다고. 하지만 무엇인지는 말해줄 순 없단다. 내가 알게 되면 엄청나게 충격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란다. 뭐든 엄마에게 다 말해왔던 녀석이 엄마를 위해 혼자 참아보려는 것이다. 열 살이 되니 이런 의젓한(?) 효심을 보이다니! 이토록 마음씨 고운 아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둘 수는 없었다.

  “그렇구나. 근데 아마 엄마는 괜찮을 거야. 그러니까 말해도 돼.”
  “아잉, 안 돼.”
  라온이는 민망해하며 웃음 짓다가 베개를 힘껏 끌어안아 얼굴을 묻었다. 무슨 생각이기에 이렇게나 부끄러워하는 건지……. 왠지 이성(異性)과 관련된 게 아닐까 싶었다. 지금까지 녀석에게 있어 ‘친구’란 성별 상관없이 그저 ‘같이 신나게 노는 아이’였을 뿐이다. 연애의 감정에 일찍 눈 뜬 친구들이 이성과 공식 커플이 되는 걸 봐도 라온이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성을 전과 다르게 보는 변화가 찾아온 것이 아닐까?
   나는 다정한 미소를 곁들인 채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라온이 머릿속에 떠오른다는 그 생각이 무엇인지 엄마가 알 수는 없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해줄 수 있어. 이상한 게 아니라는 거. 자라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그러니까 엄마한테 말해도 괜찮아.”
   라온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난감해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럼. 라온이가 말하고 싶을 때 편하게 말해.”
   다음 날 아침. 라온이는 전날 내게 얘기를 한 것만으로 마음이 조금 좋아졌다고 했다. 녀석이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답답했을지 다시금 알만했다. 나는 속 시원히 다 얘기하면 훨씬 더 괜찮아질 거라면서 부추겼다. 하지만 멋쩍게 미소지으며 고개 젓는 답만 돌아왔다.
 

  그날 저녁. 독서 시간에 온 가족이 거실에 모였을 때, 라온이가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며 내 손을 잡고 방으로 이끌었다. 여덟 살 로운이도 냉큼 따라 들어왔다. 형이 나가라며 분노 가득한 목소리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쏘아붙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나섰고 로운이는 내 말을 듣자마자 경쾌한 발걸음으로 거실로 나갔다. 알아서 방문까지 야무지게 닫아주었다. 녀석을 설득하는 건 어려운 게 아니었다. 거실로 나가주면 그날 밤은 내가 같이 자 주겠노라고 말했을 뿐이다. 엄마 품이 좋아서 엄마와 같이 자고 싶어 하는 녀석이기에 내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나와 마주 앉은 라온이는 본론에 들어가길 망설였다. 내가 충격을 받을 거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라온아, 엄마가 충격받지 않을 거라는 건 100%야. 어떤 얘기라도, 절대 놀라거나 충격받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사실은…… 요즘 자꾸 내가 죽는다는 생각이 나.”
   평소에도 죽는 게 무섭다는 얘기를 이따금 했던 라온이다.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 또래 아이들이 보이는 반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게 왜 엄마가 알면 충격인 거지?”
   “엄마가 그랬잖아. 모든 일은 생각하는 대로 된다고.”

  아이가 늘 바른 생각을 하길 바라며 수시로 강조했던 말인데, 그 때문에 아이가 힘들게 될 줄이야! 아무리 좋은 것도 지나치면 독이 될 수도 있음을 느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라온이가 기특했다. 엄마의 말을 이리도 깊이 새기고 있다니!
   “라온이는 그런 생각이 언제 나?”
   “물을 마실 때도 ‘이 물 마시면 죽는다.’는 생각이 나서 ‘아니야!’하고 마시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 생각나고 그래. 또…….”
   불편한 순간들을 줄줄이 나열하는 걸 보니, 일상생활에 제법 지장이 있었을 것 같았다. 그동안 남몰래 얼마나 힘들고 답답했을까? 이제 내가 알았으니 녀석이 혼자 감당했던 마음의 짐을 깃털처럼 가볍게 해주리라.
   “그건 라온이가 열 살이 돼서 그래. 몸과 마음이 자라서 더 이상 아주 어린아이가 아니고, 서서히 청소년으로 되어가는 과정에서 그럴 수 있어. 봉현이 형아(라온이의 사촌)도 그랬어. 라온이만 했을 때 어디를 가면 수시로 뒤 돌아보고, 또 돌아봤지. 물건을 흘린 거 같아서 걱정했던 거야. 엄마도 그런 거 있었어. 목에 뭔가 걸릴 거 같아서 엄청 킁킁거렸지.”
   라온이 표정이 조금 편해졌다가 금세 어두워졌다.
   “근데, 엄마는 죽는다는 생각은 아니었잖아.”
   “아, 맞다! 난 노란색 길을 안 밟으면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는다고 생각했어.”
   “나도 그러는데! 그래서 막 이렇게, 이렇게 밟고 가.”
   “맞아. 엄마는 집에서도 이렇게 양팔을 벌려서 중심 잡고 조심조심 걷는 연습을 수시로 했었어. 좁은 노란 길을 걷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말하다 보니 아주 진지하게 연습했던 내 어린 시절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는 그 생각이 언제 없어졌어?”
   “언젠가 자연스럽게 없어졌어. 라온이도 그럴 거야.”
   “언제? 1년? 한 달?”
   “오래 가지 않을 게 분명해. 일단 엄마한테 얘기했으니까. 어젯밤 대화 이후로도 좀 편해졌다고 했잖아? 오늘 이후는 더 괜찮아질 거야. 무엇보다 라온이는 마음이 엄청 단단하니까 더 빨리 이겨낼 거야. 물 마시다가도 ‘이거 먹으면 죽는다.’는 생각이 들면 ‘아니야!’하면서 그 생각을 물리쳤잖아. 그건 마음이 아주 단단해서 가능한 일이야. 너무 놀랍다.”
   “근데…… 죽는다는 생각을 자꾸 하니까, 나 정말 죽는 거 아니야?”

  “우리 라온이는 절대 그렇게 안 돼. 수호천사가 지켜줄 거니까. 그리고 라온이의 수호천사만 지켜주는 게 아니야. 엄마의 수호천사도 라온이를 지켜줄 거야. 라온이도 알다시피 엄마가 복이 엄청 많잖아. 그러니까, 라온이랑 로운이 같이 지구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엄마가 된 거고. 이건 엄마의 수호천사가 엄청 강력하다는 거지. 엄마의 수호천사는 라온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엄마가 슬퍼할 걸 아니까 라온이를 꼭 지켜줄 거야.”
   부디 내가 말한 대로 되길 바란다. 아니, 꼭 그렇게 되리라 믿는다.
   라온이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은 뒤, 특유의 귀여운 말투로 말했다.
   “엄마, 근데 이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그래, 알겠어.”
   “아! 아빠한테는 해도 되겠다. 엄마가 해 줘.”
   “그래, 아빠도 열 살 때 아빠를 힘들게 한 생각이 있었을 거야. 한 번 물어볼게. 그리고, 로운이한테도 얘기해도 괜찮을 거 같은데……. 로운이도 그런 생각이 생길 때 대비할 수 있을 거 같거든. 한 번 생각해봐.”
   “응.”

  조만간 라온이는 동생과 단둘이 침대에 누웠을 때 가벼운 마음으로 얘기해 줄 것이다. 자신의 고민이 부끄러운 것도, 심각한 것도 아님을 완전히 깨달을 테니까. 표정을 보니 당장 그날 밤 얘기할 것도 같았다. 고민의 늪에서 빠져나온 기색이 역력했다.
   진작 털어놓았다면 편안함이 더 빨리 왔을 텐데…… 라온이가 며칠간 홀로 속앓이를 했던 것은 고민에 빠졌을 때 흔히들 하는 실수를 해버려서다. 자신의 고민을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고민’으로 규정하는 것 말이다. 그것은 시간이 갈수록 고민의 무게를 점점 버겁게 하고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지경으로 이끌기 일쑤다. 고민의 늪에서 빠져나올 가능성은 낮아질 수밖에. 다행히 라온이는 생각을 바꿔 엄마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힘듦에서 벗어났다.

  “라온아, 지금 마음은 답답하지 않고 편해졌지?”
   “응.”
   “아마 엄마한테 얘기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거야. 고민이 있는데 혼자서만 끙끙 앓고 답답해하면 해결이 안 되거든. 그럴 땐 이렇게 누군가에게 말을 하는 게 좋아. 말로 하기 어렵다면 편지든 뭐든 어떤 식으로든 표현을 하는 거지. 그래야 해결 방법이 생겨. 앞으로도 고민이 있을 때면 오늘처럼 현명하게 하면 돼. 아주 잘했어.”
   참으로 알찬 대화였다. 그날 이후 라온이가 ‘죽는다’는 생각으로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녀석이 고민을 다루는 현명한 방법을 알게 되어 더욱 만족스러웠다.


   그러다 며칠 뒤, 문득 내가 놓친 것이 생각났다. 나는 라온이에게 중요한 하나를 알려주지 않았다. 고민을 누구에게 말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다. 그대로 있다간 ‘고민은 아무에게나 털어놓는 게 상책’이라 오해할 수도 있으니 바로 잡아주어야 했다.
   학교에서 돌아와 동생과 나란히 앉아 간식을 먹고 있는 라온이에게 물었다.
   “라온아, 앞으로 고민이 생기면 어떻게 할 거야? 혼자만 고민할 거야?”
   “아니, 말해야지.”
   “오호. 그래, 도무지 혼자 해결할 수 없는 건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게 좋아. 그런데 누구에게? 아무에게나 말하면 될까?”
   “아니. 엄마한테 말해.”
   “만약 엄마가 없다면?”
   “아빠한테 말해.”
   나도 그맘때는 라온이처럼 부모를 우선 떠올렸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친구나 지인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부모에게는 오히려 감췄다. 결과는 어땠을까? 괜찮은 적도 있지만 큰 화를 당할 뻔한 아찔한 적도 제법 있다. 돌이켜보면 상대가 깊은 생각 없이 내놓은 해결책을 내가 덥석 물었었다. 너무 고민스러운 나머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던 게다.
   부디 내 아이는 나처럼 어리석은 짓은 안 하면 좋겠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부모에게만 고민을 상담하길 바라는 건 아니다. 내 고민에 대해 나 만큼이나 고민해 줄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길 바란다. 그런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나는 여러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그 기준을 정할 수 있었다.
    “그래, 라온아. 엄마도 좋고, 아빠도 좋아. 그런데 살다 보면, 부모님 말고 다른 사람하고 고민을 상의할 때가 생길 거야. 그땐 누구에게 말하는 게 좋냐면…… 라온이를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에게 하는 게 좋아. 특히, 아주 중요한 고민이면 더더욱 그래. 엄마는 예전엔 아무한테나 고민을 말하고 방법을 찾았거든. 이런 적이 있었더. 엄마가 스물몇 살 때쯤…….”
   나는 엉뚱한 사람에게 고민 상담을 하고 큰 화를 당할 뻔했던 경험을 얘기해 주었다. 라온이는 언제나처럼 엄마의 추억(?) 얘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몰입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사람이 말해준 방법은 엄마를 위한 게 아니었어. 정말 큰일 날 뻔했지. 이제 엄마는 고민이 생기면 엄마를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에게 말하지. 라온이도 꼭 그러길 바라. 그런 사람은 라온이를 위한 최선이 뭔지 신중하게 생각하고,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해 정성을 다할 거야. 알겠니?”
   “응.”
   “좋아! 자, 앞으로 고민이 생기면 누구에게 말하고 방법을 찾는다고?”
   “나를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
   라온이가 두 눈을 반짝였다.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여덟 살 로운이도 마찬가지였다.
   고민에 빠졌을 때, 처한 상황에 따라 해결책을 찾는 방법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본으로 삼아야 할 핵심은 있다. 말하자면 ‘고민 해결의 정석’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그것을 알려주었고, 다행히 녀석들은 잘 이해한 듯 보였다.
   ‘혼자만 고민에 빠져 있지 말고 말하자. 진심으로 나를 아끼는 사람에게.’

매거진의 이전글 언제나 '더 나은 곳'에서 지내는 비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