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소원을 수정했다. 원래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건강한 것’이었다. 참 괜찮은 소원이라 여겨왔었는데, 여덟 살 배기의 질문 덕에 변화가 필요한 걸 알게 됐다.
“엄마는 악당이 죽으면 슬퍼할 거야?”
로운이가 샤워기로 온몸을 따뜻하게 적시다가 앙증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 큰 어른의 질문이었다면 바로 답했을 것이다. 악당이 죽는데 왜 슬퍼하냐고. ‘악당의 죽음’에 대해 어떤 확고한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별 생각 없이 하는 대답이라고 보면 된다. 솔직히, 나는 ‘악당의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저 영화나 드라마 속 극악무도한 인물이 죽으면 다행으로 여기는 정도일 뿐이다.
그런데, 엉뚱한 호기심을 품은 여덟 살의 질문에는 선뜻 답이 안 나왔다. 다른 주제도 아니고, ‘죽음’에 관한 것인데 것이니까.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어린이에게 하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일단, 녀석의 질문 의도를 제대로 파악해야 했다. 아이의 질문에 답할 때는 매우 중요한 점이다. 얼핏 보면 뜬금없이 물은 것 같지만 어떤 경험이 녀석의 조그만 머릿속에 물음표를 만든 것이다. 그때 얻은 답이 때로는 녀석이 삶의 가치관이나 기준을 세울 때 밑거름으로 작용한다. 그러니 어른은 신중하게 답해야 한다.
“로운이는 그게 왜 궁금해?”
“피아노 학원에서 친구들을 막 발로 차고 그런 애가 있는데…….”
로운이는 그 아이의 만행들을 알려줬다. 직접 당하지는 않았고, 다른 친구들이 당하는 걸 본 것이다.
“로운이가 보기엔 그 아이가 악당이라고 여겨지는구나?”
“응.”
“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좀 애매하기도 해. ‘금쪽같은 내 새끼’ 있잖아. 거기에는 막 폭력을 쓰거나 욕을 하는 아이가 나오기도 하거든. 그런데 알고 보니 자기 마음이 뭔가 불편한데, 그걸 바르게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랬던 거더라고. 그 아이들이 제대로 된 표현 방법을 배우니까 문제 행동을 안 하고 바르게 바뀐 거 있지. 그런 걸 보면 문제 행동을 하는 아이를 악당으로 보는 게 적절한가 싶어. 로운이 생각은 어때? 악당이라고 봐야 할까?”
“잘 모르겠어.”
“그래. 쉽지 않은 문제네. 일단 ‘악당’이라는 것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피아노 학원의 그 아이가 올바른 표현 방법을 몰라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일부러인지도 생각해보고.”
로운이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기발한 것이 떠오른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엄마가 만약 이순신 장군이라면, 일본의 장군이 죽으면 슬퍼할 거야?”
나는 알 수 있었다. 로운이에게는 악당의 기준이나 학원 아이에 대한 분석은 중요하지 않았다. 녀석은 처음에 내게 했던 물음에 대한 답, 즉 엄마가 악당의 죽음에 슬퍼할지 말지를 아는 게 더 중요했다. 초심을 잃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논점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려는 여덟 살의 집념에 박수를! 특정 인물을 예로 들어 다시 물은 점도 탁월했다. 나와 아무런 관계없는 악당의 죽음이라면 막연히 생각하고 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입장에서, 치열하게 맞서 싸운 악당의 죽음에 대해서라면 보다 깊이 있고 진지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물론, 임진왜란 때의 모든 일본 장군들을 악당으로 보는 부분에 대해 좀 더 얘기해볼 여지가 있다. 하지만, 그날의 로운이는 원치 않을 게 뻔했다.)
자주 느끼는 바지만, 로운이는 결코 만만한 아이가 아니다. 그러니 이번 질문에 더욱 신경 써서 대답해줘야 했다. 내가 잠시 생각 중인데, 몇 분 전에 먼저 샤워를 마치고 나간 열 살의 라온이가 나를 다급하게 불렀다. 나는 로운이에게 남은 이야기는 이따가 하자며 욕실 밖으로 나갔다.
푸짐한 저녁 식사 직후, 내가 과장되게 놀란 표정으로 로운이의 배를 보며 혹시 공이 들어있는 거냐 물었더니, 녀석은 씨익 웃으며 배를 한껏 부풀려 바람 빵빵한 공 모양을 만들었다. 익살을 발휘할 기회라면 어떻게든 살려내는 귀염둥이 덕에 나는 목청껏 웃어댔다.
나도 장단을 맞춰 또 다른 장난을 이어가려다가 참았다. 샤워 시간에 중단했던 얘기를 더 늦어지기 전에 마무리할 필요가 있었다. 악당이 죽으면 슬퍼할 건지에 대해 다시 얘기해 보자는 나의 제안에 로운이는 기다렸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익살쟁이 모습이었다가도 진지한 얘기를 할 때면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꾸는 건 로운이의 또 다른 매력 중 하나다.
“만약 엄마가 이순신 장군이라면 일본 장군의 죽음에 슬퍼하지는 않고, 대신 안타까워할 거 같아.”
“왜?”
“왜냐하면 지구에 와서 이왕이면 바르고 멋지게 살 것이지, 그렇게 못하게 살다가 죽으니까 그게 안타까운 거지. 슬픈 건 아니고. 아마 이순신 장군님도 그러지 않았을까?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 의사도 마찬가지였을 거 같아. 아! 안타까워하는 한편 슬퍼하기도 했을 거 같네. 그런데 이토의 죽음이 슬픈 게 아니라,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아야만 하는 상황이라서 그런 현실이 슬펐겠지. 이순신 장군도 그 점이 슬펐을 거야.”
내가 두 위인의 마음을 어찌 알 수 있으랴! 다만 그간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이해한 그들의 성품을 보면 내 추측이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리라.
“정리하자면, 엄마는 악당이 죽으면 슬퍼하진 않고, 대신 그렇게 못나게 살다가 죽은 걸 ‘쯧쯧’하며 안타까워할 거야. 그리고, ‘나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하고 생각할 거야.”
누군가의 못난 행동을 보면 속으로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로운 이에게 익숙한 이야기다. 내가 논어 속 공자의 말을 빌어 수시로 강조해 왔던 바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현명한 사람을 보면 (그와) 같아질 것을 생각하며, 현명하지 못한 사람을 보면 속으로 스스로 반성한다.”
- <논어> 중에서
‘악당의 죽음에 슬퍼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해준 뒤, 같은 질문을 로운이에게 했다. 녀석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슬퍼하진 않고 안타까워할 거라고.
로운이가 그런 질문을 해준 것이 고맙다. 내가 놓치고 있던 것을 깨닫게 해주었으니까. 이번 대화에서의 핵심은 ‘악당의 죽음에는 슬퍼하지 말자.’가 아니다. ‘악한 것과 선한 것을 대하는 태도에 구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차별을 안 좋아하고, ‘평등’을 중요시해 왔다. 육아를 할 때도 누군가를 대할 때도 그 점이 반영된다. 그런데, 이제는 깨달았다. 악당의 죽음이건 선한 자의 죽음이건 동일한 슬픔을 보이는 게 바람직하지 않음을. 바른 지혜를 가졌다면 악한 것과 선한 것을 구별할 줄 알고, 그것을 대하는 태도도 달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를 통해 우리 사회 분위기가 올바른 쪽으로 기우는 데 기여해야 한다. 악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하는 쪽으로 말이다.
이번 대화를 계기로 내 소원도 바꿨다. 그리고 이 변화의 일등공신에게 나누었다.
“로운아, 엄마 소원이 뭐게?”
“세상 사람들이 행복한 거.”
“그래. ‘세상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건강한 거’야. 그런데 소원을 좀 바꿨어.”
“어떻게?”
“‘세상의 선한 사람들이 행복하고 건강한 것’으로. 엄마는 악당의 행복과 건강을 바라진 않거든. 그리고, 소원이 하나 추가됐어.”
“뭔데?”
“세상 사람들이 마음이 선한 사람이 되는 거. 엄마 소원이 이루어지면 정말 좋겠다.”
나의 아이들이 나의 소원이 이루어진 세상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막연히 바라고만 있진 않을 것이다. 때문에 오늘도 이렇게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