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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신화 Apr 14. 2021

교실에서의 첫날을 보낸 아이에게 건네면 좋은 말

  초등학교 1학년생의 설렘, 긴장과는 결이 다르겠지만 아이를 학교에 보낸 첫날 학부모의 마음도 오묘하기는 마찬가지다. 수업을 마치고 나올 라온이를 기다리는 시간. 학교 운동장에 서 있었을 뿐인데 왠지 분주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바빴다. 나를 비롯한 운동장에 모인 학부모들은 한 무리의 기린을 연상케 했다. 우리는 목을 길게 늘인 채 문을 응시했다. 그런다고 보다 많은 것을, 보다 빨리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거늘.

  드디어 모습을 보인 선생님이 뒤로 걸으면서 손짓과 함께 무어라 얘기를 하자, 담임을  마주하고 선 새싹 같은 아이들이 한 줄 기차 대열을 만들었다. 저마다 등에 거북이 등딱지를 메고 있는 것 같았다. 엎드려서 그 아래로 머리, 팔, 다리를 모두 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가방이 컸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들이 그만큼 작았다. 녀석들은 알록달록한 등껍질에 숨는 대신 조용한 늠름함을 지키며 선생님의 지도를 따라 문밖으로 나왔다.

  분명히 개구쟁이, 말썽꾸러기, 새침데기, 부끄럼쟁이가 있을 텐데,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세상에서 가장 모범적인 아이처럼 굴었다. 생김새도 제각각이었지만 같은 표정을 짓는 것도 흥미로웠다. 낯설지만 묘한 꿈속 공간에 온 꼬마 여행자가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선생님에게 인사를 마친 후 찾아온 가족 상봉의 시간. 어떤 아이는 부모에게 달려가 와락 안겼고, 또 어떤 아이는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 조심조심 걸어갔다. 라온이는 후자였다. 나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두 팔을 벌렸다가 내게 도착했을 때 있는 힘껏 안아주었다.

  여기저기서 부모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뭐 배웠어?”, “오늘 어땠어?”. 학생으로서의 첫날을 보내고 온 아이에게는 무난한 질문들이었다. 하지만 왠지 아쉬웠다. 문득, 유대인 부모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들은 아이가 학교에서 오면 “오늘은 어떤 질문을 했니?”라고 물어본다고 한다. 괜찮은 질문이기는 했지만 낯섦의 긴장을 견뎌냈을 라온이에게는 알맞지 않았다. 녀석은 내 손을 잡고 걷기만 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유치원에 다녔을 때는 내가 물어보지 않아도, “엄마, 오늘 정말 재미있었어!”, “엄마, 오늘 완전히 좋았어!”라면서 흥분하며 시시콜콜한 것까지 말하곤 했었는데……. ‘처음’에 대한 긴장이 내게도 있었던 건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도 뭐든 묻고는 싶었다. 

   “라온아, 오늘 어땠어?”

  나도 무난함을 택했다. 라온이는 멋쩍은 듯 살짝 웃어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좋았는지, 싫었는지 만이라도 알려주면 좋으련만……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녀석에게 생각의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나는 더 이상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녀석의 손을 잡고 있던 손아귀에 조금 더 힘을 준 뒤 가볍게 흔들었다. 그렇게 무언의 응원을 전했다.


   

라온이는 집에 와서도 인형처럼 얌전했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일단, 서둘러 밥을 차렸다. 좋아하는 음식이 긴장을 풀고, 입을 자물쇠도 풀 수 있을 테니. 라온이가 좋아하는 양념 김을 천천히 집더니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라온아, 오늘 학교에서 어땠어?”

   “…….”

   “음……, 혹시 내일도 학교에 가고 싶어?”

   “…….”

   라온이는 내 물음에 고갯짓조차도 하지 않았다. 집안에 고요함만 감돌았다. 분위기가 축 가라앉은 것이 매우 어색했다. 그동안 이 아이가 우리들의 공간을 발랄함과 밝음으로 채우는 일등공신이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녀석 특유의 천진난만한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졌다.

  “그래, 라온아. 얘기하고 싶을 때 해줘. 그런데, 이것만은 얘기해주면 정말 좋겠어.”

  “뭐?”

  “오늘 학교에서 얼마나 웃었어?”

  “한 번도 안 웃었어.”

  “뭐라고! 안 웃었다고? 단 한 번도? 세상에나! 지금 당장 학교에 전화를 좀 해야겠어.”

  “왜?”

  “아주 심각한 일이 벌어졌잖아. 우리 라온이가 학교에서 단 한 번도 안 웃었다니! 매일 깔깔깔 웃어대는 아이인데! 지금 상황의 심각성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야. 어마어마 해.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건지 학교에 확인해봐야겠어!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1학년 3반 김라온 엄마인데요. 큰일입니다. 오늘 라온이가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네요.’ 하면서.”
   나는 극도로 흥분한 사람처럼 얼굴 곳곳의 근육들을 다 움직여가며 과장된 표정을 짓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야말로 1인 코믹극을 하듯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드디어 라온이가 웃기 시작했다. 나의 연기가 격렬해질수록 녀석의 웃음소리도 커지더니 배꼽을 잡고 숨을 헐떡거리며 웃기까지 했다. 나도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꾹 참았다. 내가 진지할수록 녀석의 즐거움이 커졌으니까. 조금 뒤 내가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차분히 말했다.

  “라온아, 재미있어?”

  “응. 너무 웃겨.”

  “그래. 다행이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웃음’은 정말 중요하거든. 앞으로 학교에서도 웃는 일이 꼭 있길 바라. 웃을 일이 없으면 라온이가 웃을 일을 만들면 돼. 라온이가 다른 사람도 웃을 수 있게 해 주면 더 좋고.”

  “엄마, 그런데…… 유치원에서 봤던 영상에 있었던 것들이 OO초등학교에는 왜 없어?”

  “그랬어? 어떤 것들이 없는데?”

  “도서관도 없고, 과학실도 없고, 보건실도 없어.”

  드디어 알아냈다. 라온이가 하교 이후 줄곧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얌전하게 있었던 이유를. 사실 녀석은 하루빨리 학교에 가고 싶어 했었다. 유치원에서 학교 생활 안내 영상을 보고 왔던 날 흥분하며 말했었다. 학교에는 도서관, 과학실, 보건실이 있고, 화장실도 교실 밖에 있다고. 학교에 가면 도서관에 제일 먼저 가보고 싶다고 강조했었다.

  “OO초등학교에도 도서관, 과학실, 보건실이 물론 있어. 오늘은 첫날이라 가보지 않았던 거야. 학교 안내문을 보니까 조만간 갈 거래. 6학년 형. 누나가 여기저기를 알려줄 거래.”

  “그래?”

  “물론이지. 그리고 좋은 소식이 또 있어. 유치원에서는 라온이 자리에 앉아서 밥 먹었었지? 그런데 OO초등학교에는 식당이 따로 있어. 내일부터는 점심을 그 식당에 가서 먹을 거야. 들어보니까 밥이 엄청 맛있다고 하더라.”

  “그래?”

  외식의 기회가 적기에 ‘식당’에서 먹는 거라면 뭐든 좋아하는 라온이다. 그리도 좋아하는 ‘식당’에 매일 갈 수 있다는 희소식에 녀석은 눈을 반짝이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어때? 내일도 학교에 가고 싶어?”

  “응!”

  “좋아. 그리고 기억하자. 학교에서 많이 웃기! 안 웃으면 엄마는 학교에 전화할 거야.”

  “흐흐흐. 알겠어.”

  다음 날, 수업을 마친 라온이가 내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하면서 자랑 섞인 말투로 말했다.

  “엄마, 나 오늘 몇 번 웃었게?”

  “어머나! 오늘은 웃었어? 얼마나 웃었을까?”

  “두 번이나 웃었어.”

  “그래? 와우! 두 번이나? 뭐가 그리 웃겼어?”

  녀석은 내 손을 잡고 폴짝폴짝 뛰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들어보니 살짝 미소를 지을만한 소박한 일이었다. 기특하게도 웃음의 기회로 잡았고, 기억해두었다가 내게 들려준 것이다. 이어서 학교 식당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점심 메뉴를 하나하나 소개하며 너무너무 맛있었다는 말을 하고 또 했다. 급식 때문에 내일 또 학교에 가고 싶다고도 했다.

  어제 같은 시간까지만 해도 굳게 닫혀있던 녀석의 입을 열어준 열쇠는 ‘웃음’이었다. ‘웃음’은 앞으로 우리가 사는 동안 만날 수많은 난관을 헤쳐나가는 데 큰 역할을 해주리라. 이틀 전 입학식 때 교장이 소개해주었던 맥아더 장군의 시 한 소절이 다시금 생각났다. 학교 생활 얘기를 해주는 라온이를 보는 내 마음은 맥아더 장군의 마음과 같을 것이다.


제 아들에게 넘치는 유머 감각을 더해주소서.
매사에 진지하지만, 지나치게 심각하지는 않게 하소서.

    - 더글라스 맥아더, ‘아버지의 기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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