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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신화 May 11. 2021

죽음에 대하여

어린아이에게 죽음에 대해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

  나는 라온이가 다섯 살, 로운이가 세 살 때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첫 책 <비가 와도 꽃은 피듯이>가 집에 도착한 날이었다. 돌아가신 친정 아빠와의 마지막 76일을 담은 책이다. 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히는 내게 꼬마 형제가 다가와 이것저것을 물었다. 둘은 내가 아빠를 보고 싶어 하면서도 만날 수 없다고 하니 머리를 갸웃하며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지구본을 들고 와서 동심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지구에 살고 있지만, 할아버지는 하늘나라에서 살기에 지구에는 올 수 없다고. 그제야 녀석들은 의문이 풀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할아버지가 비록 하늘나라에서 살지만, 지구의 가족들이 잘 지내는지 궁금하기에 늘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언젠가 녀석들이 맞이할 순간을 위한 이야기였다. 나와 영원한 이별을 하더라도 내가 늘 지켜봐 주고 있음을 알고, 슬퍼하지 않기를 바라서였다. 덕분에 두 작은 천사는 죽음을 어두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지금도 보고 있냐며 흥미를 담아 말하곤 했다.

  

 
  시간이 흘러 일곱 살이 된 라온이가 잠자리에 누워 어리광스레 말했다. 

  “엄마, 난 죽는 게 무서워.”

  “왜?”

  “죽으면 엄마랑 같이 있을 수 없잖아.”

  “걱정 마. 엄마가 먼저 하늘나라에 가 있을 거라서 엄마랑 같이 있을 수 있어.”

  “엄마 못 만나면 어떡해?”

  “엄마가 지켜보고 있다가, 우리 라온이가 올 때 ‘어서 오렴!’하고 맞아줄 거야. 걱정 마.”

  “그래도 죽는 게 싫어. 하늘나라에는 장난감도 없잖아.”

  “하늘나라에도 장난감이 물론 있지. 지구에 있는 건 물론이고, 하늘나라에만 있는 특별한 장난감도 있을 거야. 아마 구름을 타고 다닐 수도 있을 걸.”

  내가 걱정거리를 지워주면 녀석은 계속해서 새로운 걱정거리를 끄집어냈다. 

  “음……, 우리 라온이가 걱정이 많구나. 혹시 그거 알아? 걱정을 습관처럼 하는 사람들이 많거든.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학자가 연구를 했어. 사람이 하는 걱정이 과연 실제로 일어나는지 확인해본 거지. 알고 보니, 걱정 100개 중에 실제로 일어나는 건 단 3개도 안 된대.(실제 연구 결과는 다르다. 미국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조지 월튼의 연구에 의하면,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일에 대한 걱정이 40%,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걱정이 30%, 별로 신경 쓸 일이 없는 사소한 일에 대한 걱정이 22%, 우리가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일에 대한 걱정이 4%,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일에 대한 걱정이 4%’라고 한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 라온이는 지구에서 아주 행복하게 잘 지내다가 하늘나라에 갈 때가 되면 그때 가면 돼. 거기서도 잘 지내면 되고.”

  “유치원 친구가 그러는데……, 하나님 믿어야 천국에 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간대.”

  라온이에게 죽음에 대한 불안감이 피어난 이유는 이 때문이리라. 나는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아빠가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는 두 손 모아 하나님에게 간절히 기도했었다. 그처럼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유치원 친구의 말이 불편했다. ‘흑백논리’이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를 흑 아니면 백, 선 아니면 악, 득 아니면 실처럼 두 가지로만 구분하려는 논리 말이다. 세상의 많은 일은 무 자르듯 토막을 내서 구분하기 어렵다. 우리가 발을 딛고 숨 쉬는 이곳은 그리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한 바다. 
   고백건대, 나는 한때 흑백논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함께 했던 사람이다. 때로는 기어이 구분을 지으려다가 생각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어지기도 했다. 그 여파로 다른 쪽을 곱지 않게 보고 배척했으며,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실수도 범했다. 당시의 내가 얼마나 비좁은 공간에서 간장 종지만 한 생각의 그릇을 지녔는지를 생각하면 낯이 뜨거워진다. 

  부디 내 아이들은 억지스러운 구분선을 그리는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 때문에 녀석들에게 책을 읽어 주거나 대화를 나눌 때면 다양한 측면에서 알려주고자 노력 중이다.

  “이 책에서는 새엄마가 나쁘게 나왔지만 착한 새엄마도 있단다.”

  “앞을 보지 못해서 슬픈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

  “아프리카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다 가난하고 물을 쉽게 못 마시는 건 아니야. 그런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어.”

  “돈 많은 사람 중에는 욕심쟁이도 있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기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


  라온이의 유치원 친구가 해준 이야기는 매우 조심스러운 흑백논리의 전형이다. 간결하면서도 강렬하기까지 해서 상당한 자극이 되어 마음을 흔들기 십상이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빠뜨리고 있기에 말을 내뱉는 사람도, 받아들이는 사람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몸을 움츠린 채 내 손을 꼭 잡은 라온이에게 나는 차분하고도 다정하게 말을 시작했다.

  “라온아, 만약 하나님만 믿고 막 나쁜 짓을 한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 갈까?”

  “아니.”

  “그래. 그러니까 지구에 사는 동안 아주 올바르게 살아야 하겠지?”

  “응.”

  “우리가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알아야 하는 게 있어. 사람들은 누구나 지구에서 어느 정도 지내다가 때가 되면 하늘나라로 가거든. 그때 중요한 것은 하늘나라로 가는 순간에 두렵지 않아야 하는 거지. 사는 동안 지혜롭고, 올바르게 산 사람들은 죽음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단다. 그 사람들은 하늘나라로 갈 때가 되면 아마 이런 생각이 들 거야. ‘그동안 지구에서 참 잘 지냈네. 이제 하늘나라로 가는 시간이구나. 거기에서도 잘 지내야지!’라고. 만약, 사는 동안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이라면 죽는 순간에 엄청 무서울 거야.”

  “도둑은 아마 안 무서워할지도 몰라. 자기가 잘못한 것도 모를 수 있으니까.”

  나는 평소에 아이들에게 사고력, 감사, 성찰의 중요성을 강조했었다. 아주 나쁜 도둑은 성찰 능력이 아예 없어서 잘못을 저질렀다는 자체를 모른다는 얘기를 해준 적이 있었는데, 라온이가 그 이야기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정말 나쁜 사람은 성찰을 못하니까. 하지만, 분명한 건 정말 나쁜 사람은 죽고 나면 행복할 수가 없다는 거지. 그러니까 우리는 죽는 게 무섭다고 걱정할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지구에서 바르게 살지를 더 생각하자.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살도록 실천하는 것도 중요해. 그래서 하늘나라에 갈 때 기분 좋게 가는 게 좋겠지?”

   “응.”     

   문득 라온이의 친구가 염려되었다. 아마도 녀석은 그동안 누군가로부터 들어온 바를 유치원에서 나눈 것이리라. 부디 그 아이도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함께 올바르게 사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를. 모두 알고 있지만 라온이에게는 ‘믿음’에 대한 얘기만 해준 것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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