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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급 5만원 알바

백수인 우리에게 10만원은 꽤 쏠쏠한 금액이었다.

by N의 노트

려원 언니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보니, 아르바이트 채용 공고가 떴다.


리뷰 체험단 모집

리뷰 작성 10만원

선착순 20명

#단기알바 #리뷰알바 #솔직리뷰



채용 공고를 올린 업체는 누구나 아는 A생명이라는 대기업이었다.

하루 2시간 동안 간단한 후기를 남기고 10만원을 받을 수 있다니 눈이 번쩍 뜨였다.


반신반의하면서도 A생명이 올린 공고이니 아주 이상한 아르바이트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착순’ 채용이라는 말은 의심을 마비시키고 ‘일단’ 지원부터 하게 했다. 지원도 원 클릭으로 매우 간단했다. 려원 언니(가명. 배우 려원을 닮은, 키가 크고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이 친구를 이렇게 칭하겠다.)와 나는 곧바로 담당자에게 강남구에 있는 A생명 빌딩으로 오면 된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제야 의심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나는 려원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 SNS 주소도 안 물어보고 후기 알바인데 선착순이라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듣고 보니 그러네.”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

“이런 데 갔다가 장기 털리는 거 아니에요?”

“그래도 둘이니까 괜찮을 거야. 건물 앞에 가보고 이상하면 안 들어가면 되지.”

10만원이라는 보수에 우리는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백수인 우리에게 10만원은 꽤 쏠쏠한 금액이었다.


아르바이트 전날, 손해인(가명. A생명 인사 담당자)이라는 담당자에게 전화가 왔다.

대기업이니 깔끔한 정장을 입고 방문해달라는 것이었다. 리뷰 알바에 정장까지? 조금 석연치 않았지만 알겠다고 했다. 당일, 나와 려원 언니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서울 강남구 빌딩 숲에 있는 A생명 빌딩에 들어섰다. 로비 데스크에 경비원이 있고 입구에는 회전문이 두 개 있는 큰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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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6층에 있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우리 같은 아르바이트생들이 스무 명 정도나 있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긴 책상에는 자리마다 우리가 아르바이트 사이트에서 냈던 이력서가 출력되어 놓여있었다. 후기 작성 알바인데, 이력서까지 뽑아놓는 철저함에 나는 조금 놀랐다.


스트레이트 단발머리에 정장을 입은 중년 여성이 회의실 스크린 앞에 섰다.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본부장이라고 했다. 그는 PPT를 띄우고 능숙한 말솜씨로 이 자리의 취지와 목적을 설명했다. 카랑카랑한 발성과 말투가 쇼호스트 내지는 강사 같았다.

“알바비가 2시간에 10만원이라니, 정말 파격적이지 않나요? 보통 이 정도면 박수가 나오는데.”

일동, 우르르 박수.

“이런 조건을 내건 만큼 여러분들에게 바라는 게 있겠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본부장의 입을 주시했다. 그가 하는 말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A생명이 영업직 직원들을 모집할 때 하는 채용설명회를 우리가 듣고 후기를 쓰면 된다는 것이었다. A생명이 원하는 인재상이 우리의 후기를 보고 ‘이 회사에 입사하면 좋겠구나’라고 설득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상세한 후기를 위해 인적성 검사를 받아야 하고 가이드 라인에 맞춰 쓰는 게 조금 번거로울 것 같긴 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안심했다. 그래, 10만원을 거저 줄 리는 없지.


그런데 본부장은 모두가 10만원을 받을 수는 없다고 했다. 간단한 설문지 작성 후에 선정되지 않은 사람은 현금 5만원을 받고 돌아가면 되고, 나머지 사람들만 남아 후기 작성을 하면 된다고. 나는 애초 채용 공고에 나온 금액과 다르기는 하지만 5만원만 받고 일찍 집에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자위했다.


공책에 필기까지 하며 집중해서 채용설명회를 들었다. 리뷰에 쓸 홍보 문구도 머리를 짜내 썼다. 내가 생각해도 이 정도면 사람들이 혹할 만했다. 내 설문지를 보고 려원 언니는 “잘 적었다. 넌 뽑히겠어. 난 너 기다리고 있을게.”라며 웃었다.

우리는 설문지를 내고 심사가 끝나길 기다렸다. 약 스무 명의 심사를 마치기에는 시간이 짧지 않나, 우리끼리 얘기하는 동안 5분여의 짧은 시간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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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본부장이 마치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처럼 말했다.

“지금 이름이 불리신 분들은 짐을 챙겨서 나가주시면 됩니다.”

이름이 불리면 탈락이라는 얘기였다. 다섯 명의 이름이 불렸고 그중에 내 이름도 있었다.


내가 탈락했다는 사실보다도 탈락자가 적어서 더 놀랐다. 고작 20%의 탈락 확률에 내가 들다니! 게다가 세미 정장으로 입고 온 나와 달리 캐주얼 복장으로 입고 온 사람들이 전체의 절반은 되었다. 나는 탈락 이유를 찾느라 머리를 바쁘게 굴렸다. 처음에는 SNS 팔로워 수가 적어서인가 의심했다.


하지만 려원 언니는 SNS 아이디도 없다고 적어냈지만 합격했다. 심지어 SNS 아이디가 없으니 카카오톡으로 후기를 보내 주기만 해도 된다고 편의를 봐줬다.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카카오톡으로 연락이 온 인사 담당자, 세미 정장을 입고 오라고 한 것, 턱없이 짧은 심사 시간, 후기 작성 알바인데 SNS에 올리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


이런 정황들을 검토한 결과 나 자신도 모른 채 보험 영업직 면접을 봤음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설문지를 통해 우리를 심사한 게 아니었다. 우리의 '인상'을 보고 합격·불합격을 판단했다. 그래서 정장 차림이어야 했고, 심사에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속았다는 게 기분 나쁘면서도 묘한 흥분이 느껴졌다. 채용설명회 내용은 재미있었고 사소한 사기극도 인생의 이벤트로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 손에는 빳빳한 5만원 권 지폐가 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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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나는 열 군데 가까이 면접을 봤지만, 모두 중소기업이어서 그런지 면접비를 주는 곳은 없었다. A생명이 나에게 면접비를 준 유일한 회사인 셈이다. 1시간 일하고(사실상 일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5만원을 벌다니 돌아오는 길에는 신나기까지 했다.


이 얘기를 같이 사는 친구에게 재미있는 에피소드처럼 말하자, 친구는 내가 얼굴로 떨어졌다며 깔깔대며 웃었다.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도대체 탈락 확률 20%라는 낮은 확률에 드는 인상이란 어떤 걸까? 려원 언니는 호락호락하지 않게 생겼다는 거야, 좋은 거(?)라며 나를 위로했지만 지난 평생의 일들이 스치며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그렇게 말하는 언니는 합격도 했고 10만원도 받았다. 한 번 반전된 나의 기분은 우하향 그래프를 그렸다. 5만원은 속았다는 불쾌감을 상쇄하기엔 충분할지라도, 다른 불쾌감까지 덮기엔 턱없이 적은 액수였다.


나의 찝찝한 감정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지분을 차지했다.

1. 후기 알바인 줄 알고 갔는데 영업직 면접이었다는 점
2. 10만원을 예상하고 갔는데 5만원만 받았다는 점
3. 인상 때문에 탈락했다는 점.


5만원이 아니라 10만원, 20만원이었다면 1과 3의 요인쯤은 웃으며 넘어갈 수 있을 터였다. 누군가는 그것도 적다고(혹은 너무 많다고) 하겠지만 금액은 상대적인 거니까.




려원 언니는 인적성 검사를 받기 위해 손해인 씨를 한 번 더 만난다고 했다. 나도 같이 껴서 만나볼까 싶었다. 10만원을 받기는 글렀지만, 잘하면 좋은 글 소재를 얻을지도 몰랐다. 돈은 안 받아도 좋으니 나도 껴서 만나고 싶다고 언니에게 말했다. 그렇게 우리 집에서 1시간 넘게 걸리는 강남까지 가서 인적성 검사를 받았고, 이후에도 한 번 더 둘 사이에 껴서 밥을 먹었다. 손해인 씨는 시간과 장소를 려원 언니와 나에게 맞춰줬다. 저녁 7시라는, 보통의 직장인들은 퇴근했을 시간에 만나서 9시경 헤어졌으니 그는 야근을 불사한 것이다.


손해인 씨는 려원 언니에게 자기가 받는 채용 및 영업 수당을 보여주며 열심히 설득했다. 거절을 잘 못 하는 게 고민이라던 려원 언니는 예의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설득될 듯 말 듯 한 모습을 보였다. 거절하는 연습을 할 겸 손해인 씨를 만나겠다더니, 언니의 목적은 실패한 걸까나.

우리 셋은 각자의 꿍꿍이와 손익이 있었다.


나: 5만원 + 글 소재 vs 3가지의 불쾌감
려원 언니: 10만원 + 거절하는 연습 vs 속았다는 불쾌감
손해인 씨: 얻을지도 모르는 채용 수당 vs 야근, 다른 사람을 속여야 함


이렇게 따져보니 나도 아주 밑지는 장사는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번드르르한 공고에 속았다는 것과 ‘인상 면접’에서 떨어졌다는 불쾌감을 떨치기 위한 자기 합리화인 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는 남았다.

나도 모른 채 면접을 당하고 탈락하는 일에는 과연 어느 정도의 보상이 합당할까?




나도 모른 채 면접을 당하고 탈락하는 일에는 어느 정도의 보상이 합당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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