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파리를 다시 재현하는 것이 아니에요. 인상에 대한 기록들이지요.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미셸 들라크루아-파리의 벨 에포크> 전시에 다녀왔다. 인기 전시답게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긴 줄이 이어졌고, 전시장 안에서도 관람객들과 서로 가까이 붙어 작품을 감상해야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이 작품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도 알 수 있었다. 전시를 보고 돌아온 뒤, 작품 자체도 인상적이었지만, 내 마음에 더 오래 남은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다른 관람객들의 반응이었다.
관람객들은 작품 외적인 데서 두 번 놀랐다. 하나는 그토록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그림을 그린 작가가 91세 고령의 남성이라는 점이다(2024년 기준). ‘미셸’이라는 이름 때문인지 으레 여성일 거라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인터뷰 영상 속 작가가 노령에도 불구하고 손 떨림 하나 없이 정교한 붓 터치를 하는 걸 신기해했다.
관람객들이 놀란 다른 한 가지는 작가가 1933년생으로, 제2차 세계대전(1939.9.1~1945.9.2)을 겪었음에도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점이다. 전시 안내문에 쓰여있길, 어린 시절 프랑스의 독일 점령기를 살아낸 미셸은 전쟁 중임에도 크리스마스에 소박한 선물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교사였던 아버지가 사냥을 위해 근교 별장에 갈 때 미셸도 동행했다. 전나무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드는 겨울 풍경, 아름다운 대저택 앞에서 사람들이 말을 탄 챈 사냥 채비를 하는 그림, 고풍스러운 자가용을 타고 프랑스 교외 지역 ‘이보르’로 향하는 그림 등에 작가의 유년기 기억이 반영돼있다. 아름답다는 찬탄이 들리는 게 보통이지만, “뭐야? 금수저였어?” 하며 실망감을 내비치는 사람들도 적잖이 있었다.
어째서 관람객들은 작가가 유복하게 살았다는 데에 실망하는 걸까? 눈 내리는 파리, 물랭루주의 빨간 풍차가 돌아가는 환상적인 포스터를 보고 왔을 테고, 그럼 낭만적이고 동화 같은 전시 분위기를 쉽게 예상할 수 있었을 텐데. 아마 작품의 배경이 1930년대라는 걸 모르고 관람해서가 아닐까? 누군가는 나치나 일제에 핍박받고 수탈당하는 시대에, 누군가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이 왠지 상대적 박탈감을 주는 것 같았다. 프랑스의 독일 점령기까지는 한국 사람들이 감정 이입하기 어려워도, 일제강점기는 쉽게 떠올릴 수 있기에 더욱 그렇다. 프랑스가 에펠탑, 개선문 등 많은 유적을 잘 보존하고 있는 것과 달리 우리가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거치며 대다수 유적을 잃은 것을 생각하면 더욱 부러워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셸이 ‘금수저’였다는 데에 실망감을 느끼는 관객들 대부분이 미셸과 달리 전쟁이나 피난을 겪지 않았고, 미셸과 마찬가지로 크리스마스를 챙기고 여가를 즐기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과연 우리가 ‘저 작가는 유복하게 살아서 저런 그림도 그릴 수 있겠지.’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미셸은 “저는 과거의 파리를 다시 재현하는 것이 아니에요. 인상에 대한 기록들이지요.”라고 말한다. 나도 유튜브에서 전시 해설을 듣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가 마냥 풍요롭고 화려한 장면만 그린 건 아니었다. <야반도주>라는 작품은 집세를 못 내서 밤에 몰래 떠나는 가족의 모습을 담았으며, 그의 여러 작품에서 등장하는 가스 등 켜는 남자는 모두가 잠든 겨울밤에도 번거로운 일을 하는 공무원이다. 그의 여러 작품 속, 수레를 끌고 가는 남성은 시시포스 신화에서 영감 받아, 끝없는 노동의 굴레를 진 소시민을 표현한 것이다. 물론 작가는 ‘행복을 그리는 화가’라는 별칭답게 그런 작품들 또한 아름다운 파리를 배경으로 따뜻하게 묘사했다. 그것이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자, 관람객들에게 선사하고 싶은 감정일 것이다.
<미셸 들라크루아 전>의 부제는 ‘파리의 벨 에포크’다. 벨 에포크(Belle Époque)는 불어로 ‘아름다운 시절’을 의미하며 보통 1차 세계대전 이전, 유럽의 평화로운 시절을 말한다. 이 전시에서는 좀 더 확장된 의미로, 2차 세계대전 발발 전인 1930년대 후반을 표현했다. 바꿔 말하자면, 전쟁이 일어났기에 이전 시기가 아름다운 시절로 명명될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의 인식은 상대적이고, 비극 앞에서 이전 시기는 실제보다 미화되기 마련이다. 21세기 초반 현재의 한국 또한 이후 비극이 닥치면 아름다운 시절로, 평화와 번영이 온다면 힘든 시기로 기억되지 않을까? 우리 머릿속에서 자체 편집되어서 말이다.
이 전시의 인기 요인으로는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able; 인스타그램에 올릴 수 있을만 한)하고 쉽다는 점이 꼽힌다. 내가 가장 아름답고 보여줄 만한 사진을 골라 인스타그램에 올리듯 미셸도 편집을 통해 고유의 낭만을 구현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낭만에 깃든 편집의 힘을 알아차린다면 상대적 박탈감이 덜하지 않을까? 그건 내가 오늘을 좀 더 낭만적으로 사는 방법이기도 하다.
당신의 어떤 과거를 낭만적으로 편집하고 싶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