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때우면서 떠드는 이야기
결혼 후에 지금까지 많은 시간들이 흘러서인지 이전 어떻게 시간을 활용했는지 잘 생각이 안 납니다.
그때와 지금 많이 다른 것 중의 하나는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었고, 외모도 변하고 몸도 변했다는 것.
하지만, 이런 당연한 것들과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의 차이가 발견되곤 합니다.
그때는 그랬었지…
인생을 하나의 30센티미터 막대자라고 한다면 그때는 10센티미터를 조금 넘은 시기였을 것입니다.
그때 그렇게 부픈 꿈을 안고서 중국에 왔고, 아이엠에프를 겪으면서 짓이겨진 우리 산업의 불투명한 미래를 뒤로한 채 한국을 떠나며, 중국의 넓은 땅에 내 작품을 제대로 하나 만들어보자는 꿈이 있었죠. 벌써 2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꿈이 이루어졌을까요? 아주 조금 이뤄진 것도 있습니다.
그때는 꿈과 희망이 있었습니다.
겪어보지 못했던 그래서 겪으면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개념적 사고 속에서 미래를 그렸기에 희망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러합니다….
당시와 같이 커피숍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글을 옮길 수 있는 기계가 생겼고, 커피맛이 달라졌고, 사람들의 옷차림이 달라졌고, 물가가 올랐습니다. 나란 사람은 그대로인데, 이 사람을 구성하는 세포가 그때와는 다르겠죠. 다른 소소한 가진 것들이 많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때의 패기와 의욕이 사라진 건 아닌가 상투적인 말을 꺼내보긴 합니다만,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그렇진 않은 거 같네요. 지금 이 시간에도 아직 패기는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최근 사건을 계기로 제게 게으름과 교묘함만이 남아 있는 건 아닌가 반성해 봅니다.
이런 일이 있었죠.
저번 주 화요일과 수요일 연 이틀 동안 제 나름대로는 매우 중요한 보고가 있었습니다.
아침모임의 발표에서 제 차례가 되었는데 거의 일 년에 한 번 발표를 하는 거라 이전 같으면 한 달 전부터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열정이 넘칠 땐 두 달 전에도 준비하곤 했죠. 요건 그렇고 그다음 날 있는 발표는 또 어땠을까요? 좀 다른 성격이긴 한데 이 역시 업무와 관련된 일이라 보통 두 주 정도의 시간을 두고 PPT를 만지작 거리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자그마하지만 큰 사건이 생겼고 몸도 조금 탈이 나고, 게으름이 밀려오고 결국 발표 전날 준비해서 발표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죠. 두 발표 모두가 그렇게 끝났습니다.
결과는요?
나름 성공했습니다. 잘했다, 수고했다는 많이 준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짜깁기의 결과물입니다.
근데, 맘이 편하지 않습니다.
나이 먹어 교묘함만이 남아버린 느낌이네요.
나름대로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강조해야 하는지 경험이 쌓여 알겠지만, 결국 보고의 전체 틀을 끌고 가는 것은 저 자신이기에 스스로 품질을 알 수 있는 거죠. 그렇게 지나고 나면 좀 더 할 걸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래 이 정도면 됐어… 하는 앙마(?)의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나이 들어감에 따른 체력의 부족과 영민함의 부족 열정의 부족을, 경험에 의해 단련된 세련됨과 능숙함으로 대체할 수 있는 거야.라는 또 다른 앙마(?)의 목소리도 듣습니다.
무엇이 빠져나갔을까?
눈을 감고 암흑 속에서 나 자신을 떠올려보면 수많은 잡생각이 납니다.
어렸을 적 뛰어놀던 느낌과 주변사람들이 떠올려질 때쯤이면 엄마에게 혼나던 모습, 친구와 개구쟁이 짓을 하면서 웃던, 불장난하면서 즐거워하던 추억들이 꼬리를 물고 생각의 파편들로 떠다닙니다.
그렇게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을 땐 아직도 그때의 나인데, 눈을 떠보면 유리에 비친 어떤 중년 남성이 앞에 앉아있습니다.
머리도 희끗희끗하고 무언가 대단한 고뇌를 하는냥 앉아있는데, 그 몸속에 있는 나(!)는 방금 전 상상 속의 아이와 같은 나입니다. 정서적 혹은 정신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거 같은데…….
‘겉모습이 변했을지라도 난 아직 나야 ‘ 애써 주장을 하더라도 별 수 없습니다.
식사 자리에 가면 상석에 앉으라고 합니다. 앞에 사람이 수저를 챙겨놓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술자리에선 상대방이 머리를 돌려 들이킵니다. 커피숍에 가면 알아서 커피잔을 들고 옵니다. 제가 하던 행위들이죠. 이젠 이런 모습들을 지켜보는 상황이 더 많아졌습니다. 분명 무언가가 바뀐 모양입니다.
언제부턴가 중국인들이 저를 부르는 칭호가 달라졌습니다.
옌라오스(严老师) 라고 부르네요.
나이가 좀 있고, 뭔가 배울 점이 있는 지식과 덕망이 있는 이들에게 일상에서는 이런 칭호를 붙인다고 여겨집니다. (딱히 정해진 의미가 있진 않거든요. 꼭 선생님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기에 이렇게 추측해 봅니다. )
한 동안을 상업건축에 대한 나름대로의 고민을 하고 살았던지라 그 과정 속에서 익힌 지식을 주변에 떠들곤 했는데, 그런 것들이 상대방들이 듣기엔 무슨 선생님 ’ 말씀‘으로 여겼나 봅니다. 저 스스로도 부정하진 못할 듯싶습니다. 그런 ‘말씀’들을 의도를 품고 설파하고 다녔으니깐요. 지금 보면 참 웃기죠. 어쭙잖은 지식이기도 하고, 누구나 관심을 갖고 연구를 조금만 해도 알 수 있는 것들인데요.
그렇게 시간에 노출된 제 몸뚱이에서는
무언가가 빠져나가고 또 무언가가 채워지면서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나 봅니다.
그 속에서 평소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이렇게 오롯이 혼자 무언가를 기다리는 시간에 생각나게 하네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줄어들고 짧아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살아갈 날이 얼마일지 모르는 게 삶이지만 그래도 평균적 삶을 계산했을 때, 분명 과거에 비해 지금이 미래라는 희망과 기대는 짧아진 거 같습니다.
어렸을 땐 대통령이 되고 싶고, 과학자가 되고 싶었는데 말이죠.
지금은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졌네요. 그냥 이대로 혹은 더 망가지지 않길 바랄 뿐이기도 하죠.
이러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희망’과 ‘생기’가 빠져나간 모양입니다.
혼자 있으니 별 생각이 다 납니다.
그래서 혼자 있어야 하나 봅니다. 별 생각을 다 해봐야 하니깐요.
별생각 없이, 뻔한 생각만 하는 삶 속에서 벗어나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동의하지 못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전 그렇습니다.
일상의 어떤 쫓김 없이 잠시 혼자 있는 시간.
이렇게 아무런 글을 마구 쓰면서 조금 짜릿함이 밀려옵니다.
두서없는 글 마무리 하려니 뭔가 썼다는 만족감도 생깁니다.
이렇게 또 오늘 하루도 살아가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