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고
책을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최근엔 이런저런 이유로 책을 잘 안 읽고 있었습니다.
대신 유튜브 영상에 푹~ 빠져 살고 있는 중이죠.
여기서는 한국 텔레비전을 보려면 IPTV라고 인터넷을 연결해야 겨우 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위성 TV로 봤었는데 어느 날 사람들이 들이닥치더니 베란다에 걸려있던 위성송신접시를 걷어가더군요. 그때 얼마나 열이 받던지... 내가 이런 나라에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엄연히 이 나라에서는 불법시청이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그렇게 쳐들어와서는 전기톱으로 끊어가는 걸 보니 이 나라 정나미가 떨어지더군요.
여러 이유 중에서도 동시간대의 한국방송을 볼 수 있는 것이 그나마 해외생활의 낙이기도 했는데, 그것마저 한순간에 끊겨버리니 속상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무룩한 저를 위로한다고 옆에서 이런저런 말을 하던 아내도 생각나네요.
그래서인지 유튜브는 끊긴 TV를 대신하고 있는 중이죠.
때때로 조금 지난 뉴스나 때로는 실시간의 긴박한 상황 파악을 위해서 유튜브를 보고 있지만 대부분은 제 관심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시간을 정하지 않고 보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상시청을 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렇게 미루다 보니 읽어야 할 책들을 뒤로하곤 했죠.
헤르만헤세의 '싯다르타'는 최근 저의 불교에 대한 관심과 함께 꼭 읽어보고 싶었던 책입니다.
한국 누님의 서재에 꽂혀있던 책을 들고 왔는데 휴대하기 편해서 바깥에 시간 보낼 때 읽던 책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틈틈이 조금씩 읽어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이동할 때 보았는데, 그만 산행 중에 젖은 가방으로 인해 모서리 부분이 같이 젖어버렸지 뭡니까. 빌린 책인데 아마도 새로 사서 돌려줘야 할 듯싶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읽어가다가 어제 비로소 마지막 책장을 넘겼습니다.
개인적 상황이긴 하지만 소설책류를 잘 안 읽었던 거 같습니다.
게다가 이 책은 번역도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고, 문장의 표현도 옛 시구를 읊는 느낌이라 잘 읽히지 않더군요. 하지만 천천히 끝까지 읽을 수만 있다면 문장을 음미하면서 참 훌륭한 문장가는 다르구나 하는 느낌을 들게 합니다. 이 정도는 써야 노벨상을 받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건축가의 최고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은 작품하나에 상을 주는 것이 아닌 건축가의 세상에 대한 도전과 영향력 그리고 시대의 긍정적 공헌에 상을 줍니다. 그만큼이나 '노벨문학상' 또한 그러한 작가에 대한 깊은 들여다봄이 있는 거겠죠. 우리 한강작가님의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깊은 사색은 문학작가들의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와 고민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헤르만헤세의 많은 글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이 '싯다르타'라는 글을 읽으면서 작가가 얼마나 많은 고민과 깊은 사고를 하면서 글을 썼는지가 엿보여 감탄을 하게 되었네요. 동명인의 '싯다르타'라는 주인공을 내세워 '부처 싯다르타'의 고뇌와 세상에 대한 울림을 표현했다고 보입니다. 책장을 넘기기 전 부처님의 전기를 소설로 각색한 것이라고 단순 생각했었는데, 전혀 다른 주인공이 나와 좀 놀라기도 했었죠. 오히려 그런 점이 흥미를 주는 작용이 되기도 했습니다.
내가 작가라면 이런 글을 어떻게 썼을까?
헤르만헤세는 이 글을 쓰다 멈추고 1년 반의 시간 동안 자기 체험 과정을 거치고 다시 집필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들만 본다면 어쩌면 헤르만헤세 자신의 성장과정이 이 책에 투영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두 싯다르타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이미 지혜를 얻는 부처 싯다르타와 주인공 싯다르타는 조우하게 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주인공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완성되어 있고 그렇게 보이는 부처의 제안을 거절하고 스스로 지혜를 얻으러 세상으로 나옵니다. 헤르만헤세는 자기 책에 대한 서평을 직접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는 것. 이 깨달음을 나는 일생에 꼭 한 번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다. 그 시도가 바로 '싯다르타'다."라고 썼습니다. 부처가 얻은 해탈은 가르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지혜는 그렇게 스스로 경험을 통해 얻게 된다는 것.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지혜은 전달할 수가 없는 것. 이것이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울림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이 개념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얼마동안 AI에 대한 생각들을 해보면서, 우리가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과정'들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단 생각을 하게 되었거든요. AI는 빠르게 원하는 답을 주겠지만, 우린 답을 찾는 것에만 몰두하면 많은 것을 잃게 됩니다. 구글 검색을 통해 접하는 수많은 거쳐가는 정보들에서 새로운 지식을 얻고 거기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길을 잘 못 들어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고 새로운 정보를 접하게 되기도 하죠. 앱을 통해서 핸드폰 화면의 선과 점들을 쫓아가는 것이 아닌, 마주치는 분들에게 물어보고 이야기를 나눴을 때 물 한잔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정'은 매우 존귀하고 우리의 인생에 영양분이 됩니다.
"누군가 구도를 하는 경우에는, 그 사람의 눈은 오로지 자기가 구하는 것만을 보게 되어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으며 자기 내면에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결과가 생기기 쉽지요. (중략) 구한다는 것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찾아낸다는 것은 자유로운 상태, 열려 있는 상태, 아무 목표도 갖고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스님, 당신은 어쩌면 실제로 구도자일 수도 있겠군요. 목표에 급급한 나머지 바로 당신의 눈앞에 있는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싯다르타가 아직 자신을 못 알아보는 옛 친구 고빈다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헤르만헤세는 이미 어느 정도의 철학적 깊이에 도달했음을 느끼게 되더군요. 헤세는 선교사이자 저명한 인도학자였던 외할아버지 그리고 인도에서 선교사 생활을 하고 인도와 중국의 철학 및 정신세계에 평생 몰두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동양의 문화, 철학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특히 인도에 대한 이해도 높았다고 합니다. 한 작가가 가진 세상에 대한 인식과 철학적 고뇌가 문장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고, 작가 본인도 어쩌면 글을 쓰면서 성장해 갔던 것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싯다르타는 대략 헤세가 45살쯤에 쓰인 책입니다.
어느 정도의 세상에 대해 경험하고 이해하면서 책을 완성했는데요. 그 이후에도 명작들을 많이 남겼죠. 우리에게는 '데미안'으로 더 유명한 작가지만 기회가 닿는다면 더 많은 글들을 접해봐야겠네요.
이 책에서 제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장면은 '강'이었습니다.
강가에서 싯다르타는 한 뱃사공을 만납니다. 뱃사공은 '우리는 강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답니다.'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합니다. 이 뱃사공은 처음 만남에서는 무명의 뱃사공에 불과했지만, 두 번째 만남에서 '바주데바'라는 뱃사공의 이름을 알게 되죠. 그의 말은 싯다르타에게 많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바주데바는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강을 건너면서 이 강은 그들에게 단지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이 강과 같이하며 강물 소리를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다면 강은 성스러운 것이며 삼라만상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그렇게 싯다르타의 고통스러운 삶의 이야기를 바주데바는 강물 소리를 듣듯이 고요히 들어주게 됩니다.
우리는 대부분 말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상대방의 이야기를 끝없이 들어주는 인내력이 많이 부족하죠. 살다 보면 그런 여유도 혹은 존중도 남아있지 않고,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이 뭔데?....'라는 결론만 들으려고 합니다. 어떤 지위에 있고 어떤 조직 시스템에 있어 하위 혹은 갑을로 대변되는 관계 속에서는 대부분 결론을 먼저 말하는 두괄식 보고방식을 선호합니다. 그게 효율이 있다고 생각하니깐요. 하지만 강물은 천천히 흘러갑니다. 삼라만상의 모든 것들을 담고선 유유히 소리를 내기에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듣지 못합니다.
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강물은 인도의 힌두교도들이 성스러운 강이라 여기는 '갠지스강'이 떠올려집니다. 인도인들의 삶과 죽음을 모두 담아내는 이 강물이 갖는 특별한 의미들을 소설에서 차용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이 '물'이라는 것은 노자의 동양철학에서도 다루어졌던 주제이기도 하죠(도덕경 8장 상선약수(上善若水), 수유칠덕(水有七德)). 그만큼이나 물이 우리에게 주는 해석적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사고를 확장해 보면, 우리가 강이라 불리는 곳은 끊임없이 흐르는 물로 인해 분명 어렸을 때 보았던 그 강이 아니고, 어제 배를 탔던 그 강이 아니죠. 불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것은 없다는 무상(無常)의 개념 역시 자연스럽게 떠올려집니다. 공간을 기획하는 제 입장에서는 '장소'라 불리는 곳의 개념도 이와 연관이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강은 하나의 '장소'이기 때문이죠.
오랜만에 생각을 많이 하게 해주는 책입니다.
그리고 다시 읽고 싶어지는 책이기도 하죠.
최근엔 기회를 더욱더 만들어 여행을 하고픈 욕구가 많이 생깁니다.
그 여행 속에서 책 한 권을 지니고 다닌다면 이 책이 적당할 듯싶네요.
주인공 싯다르타가 인생의 여정을 통해서 지혜를 얻었듯이 저 또한 지금보다는 좀 더 정리되고 안정된 사고력을 갖추고 싶기에 말입니다.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는 것. 이 깨달음을 나는 일생에 꼭 한 번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다. 그 시도가 바로 '싯다르타'다._헤르만 헤세."
진리는 지혜는 결국 스스로 깨닫는 것이라는 헤르만 헤세의 울림이 다시금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