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작가 with 공동체공간
여름이면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끈질기게 자리를 지키던 해가 슬그머니 물러날 때쯤이면, 달뜬 반가움으로 가득해지던 집 앞마당의 풍경. 동네의 작은 슈퍼였던 우리 집 앞에는 평상이 있었고, 저녁을 먹고 티브이 앞에서 뒹굴 거리는 것도 지겨워진 사람들은 우리 집 평상을 찾았다. 수박을 반으로 쪼개어 숟가락을 부딪혀가며 먹고 있는 우리 남매에게 누군가는 공부 잘하고 있느냐며 뻔한 안부를 묻기도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빠와 얼음 띄운 믹스커피를 나누기도 했다. 그야말로 동네였고, 이웃이었다.
한 동네라는 감각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 물음에 따라오는 대답은 사람마다 제각각이겠지만, '함께하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다. 어렸을 적 평상처럼, 학교 운동장처럼 이웃의 누구나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동네가 동네다워진다. 키가 큰 아파트들이 멋있게 자리 잡은 창5동에 <창오랑>이 자리 잡은 것도 그 때문이다. 아파트가 많은 동네다보니 이웃을 만나는 게 쉽지 않았다. 주민들이 오고가며 더 자주, 더 친근하게 만날 수 있도록 <창오랑>이 만들어졌다.
주민들의 동네사랑방
<창오랑>은 2018년 12월에 문을 열었다. 이제 겨우 만 6개월에 접어든 '신상' 공간. 어쩐지 새 것 같은 화사함이 공간 곳곳에 아직도 스며있다. 개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공간인데도 벌써 찾는 주민들이 꽤 많다. 하루에 30명에서 50명은 창오랑을 찾는다. 집에서 걸어오기 딱 좋은 거리에, 오래 앉아 있어도 마음에 부담이 없으니 동네 친구들과 수다 떨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집으로 초대하는 일이 생경해진 아파트 시대에 이웃들을 만나기 위해 동네 카페를 기웃거리곤 했는데, 이제는 <창오랑>이 있으니 어디서 만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모임공간이 필요하던 여러 주민모임들에도 <창오랑>은 반가운 공간이다. 주민센터에서 운영하던 동네 어르신들을 위한 무더위쉼터도 올해부터는 <창오랑>에서 열린다.
주민들이 자주 찾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특별히 주방시설에 힘을 쏟았다. 의자나 테이블에 들어갈 돈을 아껴 커피 반자동 머신을 들였다. 사람들이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다과가 빠질 수 없기 때문. 예상대로 커피머신의 인기는 눈부시다. 커피머신이 있어 가볍게 음료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러 찾는 사람들이 많다. 커피머신과 주방시설을 활용한 <동네배움터>도 반응이 폭발적이다. 목적에 맞게 갖춘 시설 덕분에 처음 기획했던 동네 사랑방으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가장 작은 이웃을 위하여
주민시설을 이용하는 이용자를 생각했을 때 왜인지 4-60대의 여성이 쉽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창오랑>을 자주 찾는 주민들의 면면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4, 50대의 여성과 더불어 어린이들이 많이 찾아온다는 것은 <창오랑>만의 특별함이다. <창오랑>에 들어서서 왼편을 바라보면 신발을 벗어야만 입장이 가능한 <상상이야기>가 눈에 들어온다. 입구부터 넓게 자리 잡은 <상상이야기>는 바로 동네 아이들을 위한 곳이다. 한쪽 벽면에 가득한 책들과 아기자기한 장난감들의 면면을 보면 공간의 주인이 대번에 그려진다. 공간 안쪽으로 들어가면 조용하게 마련된 수유실도 있다. 아이들과 아이들의 보호자를 위해 공간 한편을 꾸며놓은 정성이 새삼스레 반갑다. 이런 시설이 당연한듯하지만 놓치기 쉬운 디테일이다. 어린아이도 동네의 주민이라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있으니 자연스레 <창오랑>을 찾는 아이들의 발걸음도 잦다. 어린이집에서 단체로 오는 경우도 종종 있단다. 한 공간에서 여러 세대가 오고가며 함께 만나는 모습이 그려져 마음이 훈훈하다. 젖을 채 떼지 못한 갓난아이가 있는 엄마들이 찾아오기에도 편하다. 아기와 단둘이 집에만 있기는 답답하고, 나가면 불편한 게 엄마들의 슬픈 현실 아닌가. 젖을 먹일 곳도, 기저귀를 갈 곳도 마땅치가 않아 '독박육아'를 자처할 수밖에 없었던 엄마들에게는 아기 친화적인 동네 공간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수유실에 어린이를 위한 시설까지 갖춘 공간을 찾으려면 번화가로 나서야 했는데, <창오랑>이 생겨 멀리 나가지 않아도 숨 쉴 구멍이 생겼다.
다양한 연령과 계층을 아우르는 공간에 대한 꿈은 <창오랑>을 기획하는 워크숍에서부터 나온 이야기다. 사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경계 없이 모이는 마을공간에 대한 꿈은 누구나 꾸지만 실현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창오랑>은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어린아이들에게는 넉넉한 공간을 제공하고, 다른 한편으로 마을의 시니어들을 위해서 <동네배움터>를 열고 있다. 어르신들이 자기 주소를 영문으로 적을 수 있도록 가르치는 실용적인 영어 배움터가 개설되기도 하고, 역사에 관심 있는 어른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역사 배움터를 진행하기도 했다. <동네배움터> 덕에 <창오랑>의 문턱은 조금 더 낮아지고 입소문은 빠르게 번졌다. 앞으로도 <창오랑>에서는 다양한 취미와 관심사를 담은 동네배움터가 열릴 예정이다. 어르신들뿐만 아니라 여러 주민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장이 되어 주리라 기대하고 있다.
주민을 위한, 주민이 만든, 주민의 창오랑
<창오랑>을 만들기까지 총 8번의 공간 기획 워크숍을 진행했다. 적지 않은 횟수다. 공간 기획 워크숍에는 주민, 공무원, 전문가가 함께했다. 주민의 다양한 요구를 품어야 하는 마을활력소 <창오랑>을 짓기 위해서 많은 목소리가 담겨야 했다. 여러 사람들이 오랜 기간 머리를 맞대어 단단하게 <창오랑>을 지었다. <창오랑>이 완성될수록 자신들의 공간을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자부심이 주민들에게 생겼다. 워크숍 기록만 보아도 공간에 대한 기획에서부터 공간 구성이며 인테리어, 더 나아가 운영규칙까지 주민들의 아이디어가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서혜련 대표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만들었다는 경험이 <창오랑>에 대한 애정의 근원이라 이야기했다.
로컬공간기록 프로젝트 도시작가 시즌2, 김인아 작가
본 글은 서울시공동체공간 X NSPACE with 도시작가 프로젝트로 쓰였습니다.
창오랑
서울 도봉구 도봉로136나길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