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보고 있으니 홈쇼핑에서 건조기를 팔고 있다. 안 그래도 건조기가 사고 싶었는데 잘 되었다 싶어, 유심히 봤다. 너무나 장점이 많은 건조기. 어차피 내년에 살려고 했던 것, 지금 살까? 고민하며 집 안에 둘 곳을 찾아 유심히 보게 되었다. 집이 작아서 뭔가를 치우고 건조기를 둬야 하는데,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지금 세탁기도 건조기능이 되는 드럼세탁기인데. 건조기가 성능이 워낙 좋아서 쓰고 있는 세탁기를 잊고 있었다. 세탁기도 부피가 크고 건조기도 만만치 않고. 집 안을 둘러보니 생각보다 많은 공간을 가전제품에 내주고 있었다. 아하 깜짝 놀랐다! 가전제품 속에 둘러 쌓여 살고 있는 게 아닌가. 다 필요한 것들인데… 필요한 만큼 잘 쓰고 있는 건가?
가장 눈 앞에 크게 보이는 건 냉장고였다. 냉장고를 필요한 만큼 잘 쓰고 있을까? 그래도 냉장고를 잘 비워가면서 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열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지금 먹고 있는 것과 먹다 남은 것, 앞으로 먹을 것들 것 가득 차 있었다. 냉장고의 1/3 정도 쓰고 있긴 한 걸까?
냉장고 안에는 사고 싶다는 욕구와 먹고 싶다는 욕구가 터질 듯이 가득 차 있다. 인간의 욕망은 멈출 줄을 모르고, 한번 들어간 대부분의 음식은 두 번 다시 꺼내지 지도 않은 채 생을 마감한다. 음식은 이제 더 이상 음식이 아니다.
냉장고는 세상에 처음 나올 때에 비하면 믿을 수 없을 만큼 비대해졌다. 사람들의 욕망이 확대되어가는 모습 그 자체이다.
<그리고 생활은 계속된다> 이나가키 에미코
정말로 그랬다. 지금의 냉장고는 무척이나 비대하다. 채우고 채우다 보면 어느새 가득 찬다. 처음 살 때는 넉넉하게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지만, 가득 찬 냉장고를 보면서도 먹을 게 없다고 장 보러 간다. 처음 냉장고가 집에 왔을 때는 물론 텅 비었었고, 장을 보고 또 보면서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비대하고 가득 찬 냉장고만큼이나 나의 쓸데없는 욕망도 커지고 있었다. 냉동실엔 언제든지 먹을 거라 생각하고 넣어둔 여분의 식재료가 많았다. 1년이 넘은 생선도 있고 건어물도 많고. 갑자기 스스로 부끄러워졌다.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음식들로만 보면 한 달은 넘게 먹고도 남을 것 같았다. 장보기 횟수를 줄이고 냉동실 음식을 하나씩 먹기로 했다. 요리하기 귀찮아서 넣어두었던 것들도 꺼내어 시간 날 때마다 반찬으로 만들고 있다. 냉장실에 있는 유통기한이 지난 소스들은 모두 버렸다. 장 보러 가지 않아도 반찬과 국이 많이 생겼다. 내 요리실력이 점차 늘고 있지 않을까.
TV도 마찬가지다. 하루에 많이 봐야 2시간 정도. TV를 켜지 않는 날도 많다. 드라마를 즐겨보지 않고 밥 먹으며 어쩌다가 예능 프로그램을 보거나,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한 두 개정도 볼뿐이다. 결혼 전에 TV를 사야 한다고 주장했던 남편은 요즘에 TV 없으면 우리가 집을 더 넓게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내가 TV 사지 말자고 했던 건 잊어버리고 살다가 이제는 필요 없음을 느끼고 있나 보다.
그럼 건조기는 어떻게 하지? 집에 있는 초록이 식물들을 모두 저리 치우고 건조기를 둬야 하는데, 잘 살아있는 아이들을 옮기거나 처분해야 하거나 한다는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아프다. 게다가 가전제품을 하나씩 하나씩 더 들일 때마다 왠지 부피가 큰 전자제품을 모시고 사는 기분이다. 분명 지금 건조기가 없어도 잘 살고 있는데. 아기가 생기면 빨래를 자주 해야 해서 건조기가 필수라고는 하지만, 빨래를 하고 탈탈 털어서 건조대에 너는 그런 순간은 아마도 없어질 것이다. 빨래를 하면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인데. 집 안에 은은한 섬유유연제 향이 가득해지면서 싱그러워지는 순간인데. 또 건조기를 들이면 옷이 줄어드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고 한다. 단점도 확실히 보인다. 옷이 줄어들면 금방 새로 사야 하고 이 순환이 반복될 것 같다. 그래, 건조기도 일단은 사지 말고 살아보자. 진짜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 그때 사자.
새 제품이 예전 것보다 좀 더 쓰기 편해졌다는 이유로 미련 없이 내다 버린 우리의 헌 세탁기, 에어컨, 자동차는 지구의 한구석에서 쓰레기로 쌓여 공기와 물을 오염시킨다.
<시크하다> 조승연
이사를 하고 새로운 가전을 탐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작은 가구라도 버리고 새 걸로 사고 싶어 하는 내 욕망이 부끄러워졌다. 이 상태에서 여태까지 잘 살아왔는데, 조금 더 편리하자고, 조금 더 수납하자고, 조금 더 예쁜 디자인으로 쓰고 싶다고 가구 사이트나 가전 사이트를 뒤지고 있는 내 모습이 잘못되었단 생각도 들었다.
분명 하나를 사면 다른 것도 사고 싶다. 무엇을 하나 산다고 해서 내 욕망과 목표는 다 채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새롭고 더 좋은 것을 갈구할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가전이 모두 다 해버린다면, 내가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가지 않을까. 작은 소일거리 하나 가전에게 맡겨버린다면 내가 많이 움직이지 않고도 집안일이 돌아간다면, ‘산다’는 것을 조금은 포기하는 일이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 삶을 더욱 편리하게 하고자 했던 노력들이 환경을 파괴하고 자원을 무자비하게 낭비하면 사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린 지금 여기저기서 야기되는 환경과 에너지 문제에 대해 우린 경각심을 갖고 살 필요가 있다. 전기 자원을 아끼려는 노력, 새로운 것을 더 사지 않으려는 노력, 냉장고 안을 비우려는 노력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일을 가전에게 모두 맡기려고 하고 새로운 기능이 있는 가전을 사지 않으려는 노력도 지금 할 수 있다.
사물과 가전에 내 만족감과 욕망을 일치시키려 하지 말고, 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삶의 가치에 중점 두기를 먼저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