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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아책방 Aug 05. 2020

내 마음을 불 질러 놓았다


“난 유령이 지상을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어. 언제나 나와 함께 있어줘. 어떤 형태로든지! 차라리 나를 미치게 해줘! 제발 당신을 볼 수 없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나를 버리지만 말아줘.”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지음      



<폭풍의 언덕>에서 캐서린의 죽음에 히스클리프는 짐승처럼 절규하고 야수처럼 고함친다. 캐서린의 죽음까지, 난 이 책을 틈틈이 끊임없이 읽어나갔었다. 그들의 어렸던 날부터 성인이 되어 복수의 폭풍우가 쏟아지기까지 이야기 줄을 놓을 수가 없었다. 사랑이 뭔지도 잘 몰랐던 어린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마음앓이를 하며 잠 못 이루던 날이 떠올랐다. 동시에 책을 펼쳐 들고 읽고 있는 지금, 마음이 쿵쾅쿵쾅 거리며 욱신욱신 아파온다.        



 어린 시절 같이 크고 자랐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둘은 요즘 시대 말로 하면 그야말로 ‘소울메이트’라는 말이 단번에 떠오르는 둘이다. 하지만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아버지가 주어온 가족도 없고 가문조차 없는 까만 아이다. 캐서린은 그와 같이 있을 때면 허물하나 없는 거침없는 본 모습이 드러날 정도고, 그를 무척이나 아끼면서도 사랑하지면 결혼은 다른 가문의 남자와 하기로 한다. 가정부인 ‘엘렌’에게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면서도 결혼을 할 수 없고 다른 사람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을 들은 히스클리프는 그는 집을 떠난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뒤, 다시 돌아왔다. 둘은 만났지만 서로를 향한 사랑이 변질되어버렸다. 캐서린 가족을 향한 히스클리프의 증오는 복수의 칼이 되어 돌아와 그들의 삶을 파멸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캐서린을 사랑하는 감정만큼은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땐가, 중학교 1학년 땐가 이 책을 처음 읽었다. 그때는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고, 왜 읽는지도 모르게 읽었나보다. 어떤 동기도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에 난 ‘아르센 뤼팽’과 ‘셜록홈즈’ 시리즈를 미치도록 읽고 있었다. 읽을수록 또 다른 ‘단서’를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져있었다. 그랬던 내가 어쩌다보니 브론테 자매의 소설을 읽게 되었다. 읽을수록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겪어보지도 못했던 그런 사랑의 감정을 알게 되었다. 밤새 잠 못 이룰 정도로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감정을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사랑만으로도 이렇게 미쳐 버릴 수가 있는 걸까 궁금하기도 했다. 한동안 그들의 사랑에 나도 휘말려 마음앓이를 했었다.      



어린 나의 가슴을 시리게 했던 이 책이 떠올라 책장에서 꺼내 들었다. 어린 날에 읽었던 후로 펼친 적은 없었지만 늘 그날의 감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토록 내 마음을 ‘처음’ 사랑으로 물들이고 아프게 한 책이 없었다. 읽지는 않았지만 사서 모셔두고 있었다.      



 우리도 연애할 때 수십 아니 수백 시간을 수다 떨고 고백을 했던 날이 있었다. 언제나 늘 함께이고 싶고 떨어져있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를 보며 우리 부부의 연애시절, 일주일 중 5~6일을 만나며 사랑에 미쳐있었던 날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너무 춥지 않으면 석촌호수를 돌고 또 돌고, 올림픽공원 곳곳을 걸어 다니며 수다 떨고 별 거 아닌 것에도 깔깔 웃으며 서로에 대한 사소한 것 하나씩 알아가던 날이었다. 히스클리프와 함께 일 때면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와는 달리 허물과 가면을 벗어던지고 명랑하고도 밝은 소녀로 돌아가는 캐서린, 나 역시 그랬다. 첫 만남 때는 줄 서서 기다려야 하는 피자집을 가기로 했지만 배가 너무나 고파서 찜닭을 시켜 포식했다. 보통 처음 만날 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깔끔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선호하는데, 나는 퇴근하고 나면 뱃가죽이 등에 붙을 정도로 배가 고파, 기다리면서 밥을 먹을 순 없었다. 당시를 회상하면 난 밥도 더 먹고 싶었지만 참았고 남편은 밥까지는 들어가지도 않을 정도로 배가 불러 남겼다고 한다. 이제 와서 생각 해 보면 내숭떨지도 않고 왜 그리 잘 먹었나 했지만, 이게 바로 내 모습인 걸 어쩌나. 이런 내 모습을 사랑스럽게 보는 남편을 보며 나에게 푹 빠져있다는 걸 알았다. 남편은 퇴근하고 내가 다니는 회사 근처로 와, 카페에서 매일 나를 기다렸다. 퇴근시간보다 더 늦게 회사에서 나오는 나를 매번 기다리다보니 내 동료들은 남편을 모두 다 알고 있었다.      




사랑해서 결혼한 남편이지만 사랑은 무슨, 이 작은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고된 일상으로 사랑을 잠시 잊어버렸다. 지금은 남편 퇴근시간을 바라보고 집에 오면 아이를 맡기고 나는 못한 집안일 하기 바쁘다. 아이를 재우고 집 정리를 하고 나면 각자의 시간을 찾아 무언가를 하고 있다. 사랑을 운운할 여유도 없지만 있다하더라도 그 모든 사랑이 아이에게로 간 것처럼, 아이를 쳐다만 봐도 웃음이 나온다. 이런 나에게 ‘폭풍의 언덕’은 짙고도 매서운 사랑으로 마음을 휩쓸어버렸다. 캐서린의 죽음을 원망하고도 어디서든 어떤 형태로도 나타나 달라고 하는 히스클리프의 절규에서 내 마음은 마침내 폭발하듯이 터졌다가 가슴이 아려왔다. 그제야 떨리고 사랑으로 짜릿했다. 나도 살아 있음을 느꼈다.      



오로지 캐서린을 향해 있던 히스클리프의 사랑이 그 주변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 변질되어 복수를 하지만 캐서린은 죽었다. 그녀의 죽음으로 종결될 줄 알았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캐서린과 그의 남편 린튼, 린튼의 동생 이사벨라, 그리고 히스클리프. 히스클리프의 날 선 복수는 그들이 낳은 아이들에게서도 이어져 극에 달한다. 그로 인해 악의 고리를 끊지 못한 채 계속 이어진다. 그들의 날카로운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 마지막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 순간 아이가 와서 내 무릎을 ‘탁’ 잡는다. 남편은 이제 집에 가자고 한다.





      


오랜만에 우리 세식구, 키즈카페로 나왔던 날이었다.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와 음악소리가 섞인 이 틈 속에서 책을 폈다. 격정으로 달하는 그들의 치명적인 사랑이야기로 내 가슴은 울렁이고 요동치고 있었다. 남편은 아이 따라다니면서 같이 놀아주느라 피곤해 보이고 아이는 이제 다 놀았는지 엄마를 찾아 왔다. 폭풍우 치는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빠져나오니 ‘뽀로로’ 노랫소리가 신나게 들렸다. 집에 오는 차 안에서 비가 오는 바깥을 보며 히스클리프를 떠올렸다. 꺼림칙하고 으스스하지만 그의 연인을 향한 미친 사랑이 살아났다. 



내가 살고 있는 잠실과 남편이 살고 있는 상암동, 30km나 되는 이 먼 거리를 매일 오갔던 나를 향한 남편의 사랑도 다시 떠올랐다. 사랑에 빠지면 뭔 짓을 못해, 30km 거리를 오가느라 택시비만 한 달에 30만원이 넘게 나온 이 남자의 열정에 놀라곤 한다. 

어린 날의 기억을 회상하고, 우리의 연애시절까지 소환해 준 책 <폭풍의 언덕>. 여전히 책은 내 마음을 불 질러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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