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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공장 Oct 05. 2017

<택시 운전사>, 사도마조히즘과 진정한 대중 예술

사도마조히즘을 즐기는 감독과 대중의 롤 플레이






돌멩이 하나도


택시운전사와 같은 영화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손발 다 묶어 놓고 자신의 가족이 살해당하거나 강간당하는 모습을 보며 처참함과 분노를 느끼게만 할 뿐이라는 생각이다. 권력의 횡포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게 전부라는 의미다. 이 무력감이 우리 스스로를 경멸하게 하기도 한다. 불의에 맞선 정의로운 시민 수백 명을 죽이고 수천 명을 다치게 한 전두환이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하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모습이 영화 보는 내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노한 우리가 전두환과 그 일당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다. 하다못해 돌멩이 하나 그 집 유리창에 던질 수 없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희생자와 유가족의 한,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차별, 사장의 손해 배상 청구권 때문에 파업을 엄두도 못 내는 노동자들의 현실, 정치인의 도움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세월호 유가족이 느꼈던 무력감과 분노, 블랙리스트에 올려져 있던 여러 문화계 인사에 대한 과거 집권 세력의 폭력을 목격해왔다. 이런 비극적인 일들에 대해 아무리 영화로, 드라마로, 다큐멘테리로 만들어도 결국 우리가 깨닫는 사실은 언제나 한결같다. 우리가 이 불의를 일삼는 자들에게 합법적으로 벌할 수단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정치인과 검찰, 그리고 사법부에 모든 징벌 수단이 독점되어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와 같은 현실 인식은 대중이 더욱 불의에 체념하게 할 뿐이다. 우리에겐 우리 스스로 518의 주범들을 다시 제대로 처벌할 수 있게 하는 법률을 만들 권한이 눈곱만큼도 없다(Miller 2003, 47-8). 수백만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손에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차별을 막게 할 법률 제정권이 없다. 헌법이 보장한 노동자의 파업권보다 기업가의 손해배상 청구권에 손을 들어주는 대법원 판사를 탄핵할 힘도 당연히(?) 우리에겐 없다. 세월호 유족도 법을 만들 권리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여서, 자녀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밝힐 특별법 입법을 요구하며 목숨 걸고 단식했다. 하지만 그들의 요구는 무참히 짓밟혔다. 블랙리스트 희생자들은 권력에 밥그릇을 빼앗겨도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정권이 바뀌길 기다리는 것이다. 우린 항상 우리의 어려움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입법권을 가진 국회의원들에게 사정해야 한다. 우리의 운명이 우리 손에 있는 게 아니고, 남의 손에, 남의 결정에 쥐어져 있는 거다(Miller 2003, 40).


그래서 나에겐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권력자들의 횡포를 묘사하는 대중예술은 말 그대로 대중의 무의식에 숨은 마조히즘을 자극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감독과 대중의 롤 플레이다. 감독은 분노, 슬픔, 그리고 절망이라는 고통을 주는 역할을 하고 대중은 이 고통을 느끼는(?), 영화 <택시 운전사>는 말 그대로 사도마조히즘(Sadomasochism)의 전형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전두환과 노태우 일당이 저지른 살인에 분노하고 슬퍼하지만, 영화관을 그저 허탈하게 빠져나온다. 그리고 그 분노와 슬픔을 삭히거나 시간이 이 감정들을 누그러트려 주길 바란다. 아직도 전두환은 자위권 차원에서 군인들 스스로 발포한 것이라 주장한다. 이뿐인가? 우리는 북한이 개입했다는 전두환 잔당들의 망언에 또 한 번 분노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분노를 행동으로 구체화해서 전두환과 그 일당을 벌할 합법적 수단을 그 잘난 정치인들과 검찰, 그리고 사법부 족속들이 독점하고 있다. 현실이 늘 이런 식이어서 우리는 시간의 힘을 빌어 망각하는 수밖에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망각은 우리의 오랜 습관이 되었다. 나에겐 이런 영화를 보고 난 후 광주 시민을 학살한 자들에게 분노로 치를 떠는 관객의 행동은 대중 스스로 자신을 학대하고 비참함을 느끼는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권력자들의 살인과 여러 종류의 갑질을 묘사하는 대중 예술은 그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희생자들을 위해 슬퍼하고 불같이 분노해라. 잊지 마라. 하지만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슬퍼하고 분노만 하되 그냥 그 감정들을 삭여라. 시간이 잊게 해 줄 거다. 마음속에 그 슬픔, 분노, 그리고 무력감을 품고, 또 이렇게 생겨난 한을 품고 그냥 닥치고 사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사는 것이 개, 돼지인 너희가 역사적으로 살아온 방식이니까.’


정말 이상하게도 감독과 대중의 생각이 여기서 마법처럼 멈춘다. 시민이 기소권을 검찰과 일정 부분 공유하거나 견제할 방식, 동료 시민의 서명을 받아 시민 스스로 특별법을 만들 수 있게 하는 제도적 방법, 그리고 판사가 자의적으로 법을 해석하는 권한을 시민 다수가 견제할 제도적 수단에 관해 고민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러한 권한을 가지게 된다면, 권력자들을 고발하는 영화나 다큐멘터리가 제작돼서 시민이 분노하면 바로 징벌적 수단을 시민들 스스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데도 말이다. 항상 한계는 감독은 가학 하고, 이어 관객은 피학적 즐거움을 느끼는 딱 여기까지다.






수많은 감독들에게


난 한국의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이 이런 비극적인 결과를 반복적으로 일으키는 구조적 문제보다는 현상에만 계속해서 집착하는 것을 이제 그만하라고 권하고 싶다. 이런 문제의 근원인 정치, 경제와 같은 여러 제도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눈감아버린다면 난 그 작가와 감독들을 앞으로도 계속 사디스트라 부를 거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관객은 마조히스트일 테고. 물론, 자발적인 SM관계를 문제 삼는 건 아니다. 그건 개인의 성적 취향이니 존중받아야 한다.

어쨌든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배우들은  아무 생각 없는 소 떼에 불과하다.” 난 이런 SM류의 영화를 찍은 감독을 자기가 무슨 짓(분노, 슬픔, 그리고 무력감으로 대중을 학대)을 하는지조차 모르면서 멍청한 소 떼에게 디렉션을 주는 소 치는 사람이라고 앞으로 계속 조롱할 거다. <택시운전사>는 대중이 즐기는 피학적 쾌락을 매우 성공적(?)으로 자극한 저열한 대중문화의 전형이라고 난 평가한다.







진정한 대중 예술


최근에 방송장악, 전직 대통령에 대한 비자금 추적, 그리고 세월호 다큐멘터리 등이 계속 나오고 있다. 이런 모든 대중문화 콘텐츠도 본질에서 <택시 운전사>와 같은 부류다. 진정한 대중 예술가가 되고 싶은 영화나 다큐멘터리 감독에게 권한다.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사법 등의 여러 제도를 장악한 권력자들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이에 분노하는 관객들에게 아래와 같이 조롱하는 결말을 가진 콘텐츠를 만들어 보라고.

“개, 돼지인 너희가 뭐 어쩔 건데? 너희는 우리한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너희는 뭘 해도 우리한텐 안돼. 너희는 법을 만들 권한도 없고, 우리를 수사하고, 기소할 권리도 없잖아. 그리고 재판에서 법을 해석할 권한도 우리랑 친한 판사들이 갖고 있거든. 너희가 어쩔 건데?”



진정한 대중 예술은 대중의 습관이 돼버린 망각과 멍청함을 조롱해야 한다(Cottington 2005, 11-3). 예술은 늘 그래 왔다. 뜻있는 예술가들은 대중이 가진 상식, 심지어는 건강한 변화마저 거부하는 반동적인 생각과 그 생각에서 비롯된 대중의 멍청하고 반성 없는 태도를 조롱해왔다. 그래서 진정한 예술은 대중의 그 멍청함을 극복하게 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손으로 부도덕한 권력자들을 합법적으로 벌할 수단이 정말 없는 거야? 란 질문을 스스로 묻게 해야 한다(Miller 2003, 47-8). 이런 질문이 나와야 비로소 사회적 토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시민 집단이 갑질하는 자들을 시민 스스로의 힘으로 징벌할 합법적 권력을 되찾아 오게 하는 데, 마중물이 될 대중 콘텐츠가 나와야 한다. 이런 콘텐츠를 창작할 예술가가 이제 나올 때가 되었다! 아니 지나도 한참 지났다.











Bibliography     

Cottington, D. (2005), ‘Modern art’,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Miller, D. (2003), ‘Political philosophy’,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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