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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공장 Jul 11. 2017

<옥자>: 비도덕적 사회에 사는 비도덕적 개인의 자화상

모순의 세계에서 모순과 비틀기의 미학









모순의 시대와 그 미학

봉준호의 영화 <옥자>는 채식주의 장려를 위한 영화인가? 이익을 위해 유전자 조작 식품을 대량 생산하는 자본주의의 비정함을 폭로하는 영화인가? 아니면 산골 소녀와 그 소녀의 하나뿐인 애완동물인 옥자와의 사랑을 그린 동화인가? 이 리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영화를 먼저 보실 것을 권한다. 거기다, 옥자에 관한 내 해석이 여러분의 영화 해석에 영향을 줄 수 있고, 동시에 이 리뷰가 영화를 이해하는 한 프레임으로 작동할 수 있기에 영화를 먼저 보고, 본인의 해석과 이 리뷰를 비교해 보시길 추천한다. 난 봉준호 감독의 영화 놀이에 관해 얘기하려 한다. <옥자>는 인간 세계에 대한 봉준호식 비평으로 보인다. 봉 감독은 나름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지배문화와 대안적 운동 사이 어딘가에 서있는 것 같다. 감독은 이 영화에서 '모순과 비틀기'를 통해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논평을 한다. 어떻게? 영화 장면 곳곳에 인물의 행태와 대사 속에 모순을 배치한다. 감독은 수많은 모순을 드러내면서 그 모순 속에서 스스로 여러 질문을 던진다. 감독은 본인에게도 답이 분명치 않은 질문을 영화 속에 묻기도 한다. 마치 봉준호는 '나에게 답을 가르쳐 줄 사람이 있어?'라고 관객에게 묻는 것 같다.




모순의 미학

모순은 창과 방패라는 뜻이다. 다 아시는 것처럼 ‘모순’이란 말은 어떤 예리한 창에도 뚫리지 않는 방패와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다는 창을 파는 상인에서 유래한 말이다. 옥자에서 봉준호는 인간 사회의 여러 모순과 위선을 자신만의 블랙코미디로 표현한다. 모순으로 가득 찬 사회에서 여러 형태의 불의와 비정함을 비판하는 봉 감독만의 논평 방식이 보였다. 자본주의의 비정함과 여러 불의에 저항하고 싸우는 인물들의 모습에 모순을 심는 방식이었다.




채식주의 vs. 육식문화

내겐 ‘채식주의는 육식보다 더 윤리적인가?'라는 물음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옥자>는 영화의 구성에서 분명 이런 주제를 던줘줬다. 한 번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주제이기에 이 단락에서 다뤄보겠다. '인간이 먹는다.’란 말 자체가 매우 강력한 완곡어법(euphemism)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먹는다는 건 지금 어떤 생명체의 죽은 몸을 먹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뭐든 먹기 위해선 그 죽은 몸을 먹고 있는 사람과 그 죽은 몸을 죽게 만든 사람이 반드시 ‘먼저’ 있어야 한다. 인간이 먹는다는 사실은 생명체의 살해를 전제한다. 우리 인간은 그 죽은 생명체가 가지고 있던 에너지를 약탈함으로서만 생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먹는 행위는 무슨 생명이든 일단 죽이고, 그 죽은 생명체가 가졌던 에너지를 약탈하는 행위다. 에너지는 '없는 것'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생존하기 위해서는 살해를 통한 에너지 약탈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살해와 에너지 약탈의 굴레에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생명을 가진 우리의 운명이다. 우리 인간은 늘 이렇게 살아왔다. 여기서 문제는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도 생명이라는 데 있다.



인간 중심적인 관점에서 보면 식물은 뇌가 없는 것 같고, 동물이 식물보다는 더 똑똑할 거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식물은 생각할 줄 아는 생명체다. 식물은 주로 꽃을 피워 곤충을 유인하여 번식한다. 운이 지지리도 없는 식물은 어떤가? 이런 불운한 식물이 자리 잡은 토양에는 생존에 필수적인 양분이 없는 경우도 있다. 곤충이 엉뚱한 곳에 씨를 뿌린 결과다. 어쨌든 그 불운한 식물은 결국 생존 방법을 찾아낸다. 곤충을 잡아먹고 생존하는 식충식물이 그 예다. 어떤 식물은 암벌과 똑같이 생긴 꽃을 피우기도 한다. 그러면 수벌이 와서 그 암컷과 똑같이 생긴 그 꽃과 짝짓기 한다. 누가 봐도 그 벌보다는 그 식물이 한 수 위다. 식물의 생각할 줄 아는 뇌가 식물의 뿌리라고 말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왜냐하면 뿌리는 땅속에서 수분과 영양분을 찾아 뿌리를 뻗기 때문이다. 물론 식물의 이런 생각하는 능력은 식물의 유전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유전자는 어떤 환경에서도 생존과 번식에 성공할 수 있게 변화를 거듭한다. 항상 성공하진 않지만, 지금까진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여기까지만 봐도, 식물이 동물보다 더 똑똑해 보이기까지 한다. 어쩌면 인간보다도 지능이 더 높을 수도 있다. 식물은 광합성으로 인간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태양열 에너지를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현명한(?) 인류사회에는 동물은 먹으면 안 되고, 식물은 먹어도 된다는 채식주의자가 있다. 여기에 몇 가지 물음이 생긴다. ‘생각할 수도 있고, 더 지능 있어 보이는 식물을 먹는 행위는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동물도 어떤 동물은 먹어도 되고, 어떤 동물은 먹으면 안 되는가? 가축이면 식용이고, 애완동물과 같이 인간과 정을 나눈 동물은 먹으면 안 되는가? 가축과 애완동물의 경계는 명확한가?’ 육식은 안 되고, 채식은 윤리적이란 생각에 대해 충분히 의심해 볼 이유가 있어 보인다. 봉준호는 육식과 채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옥자에는 이런 답보다는 위와 같은 질문만 있어 보인다. 마치 '이런 문제에 정답을 아는 사람들 있어?'라고 감독이 묻는 것처럼.




실버의 원칙과 미자의 소망 사이



실버는 매우 엄격한 생태주의자다. 식물과 그 열매를 먹는 것도 결국 그 생명을 착취하는 거라는 교리(?)를 가진 인물이다. 그래서 옥자 구출 미션을 수행하는 중에도 시도 때도 없이 소위 '당이 떨어져' 푹푹 쓰러진다. 여기에 봉준호식 비틀기가 보인다. 인간 사회에는 여러 시민운동 단체가 있다. 그 사회나 그 사회의 제도가 가진 결함을 고치고 보완점을 찾아 대안을 제시하는 조직이다. 이런 단체들은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제안하거나 그 사회의 건강성을 향상하기 위해 활동한다. 이들이 제시하는 대안은 보통 정의나 공정함의 가치에 바탕을 둔다. 그래서 단체 조직원인 실버는 자신의 원칙 즉, 생명을 착취하는 행동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말이지 최선을 다한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옥자를 다시 산으로 데려가고 싶어 하는 미자의 소망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봉 감독은 의도적으로 이런 실버의 이중적 혹은 모순적 행태를 연출한 거 같다.




생명존중과 폭력의 절묘한 모순



잔인하고 비도덕적인 도축과 동물 학대를 고발하려는 동물해방 전선이 보여주는 모순 중에 이 장면이 단연 압권이다. 한국계 배우의 고백 장면이다. 동물 단체와 미자와의 통역을 맡은 이 한국계 인물(케이)은 통역의 내용을 조작한다. 옥자가 강제로 실험실에서 짝짓기 당할 때, 고의적으로 통역을 조작한 것을 동물단체 리더와 동료들에게 자백한다. 이때 리더는 마치 그 고백을 이해해주는 척하면서, 동물단체의 원칙 즉, 생명 중시의 원칙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생명 존중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그 고백한 인물을 사정없이 두들겨 팬다. 난 이 장면이 봉준호식 블랙코미디를 보여 준 것이라 생각한다.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생명존중의 원칙과 리더의 폭력은 ‘절묘한' 모순이다. 이에 못지않게 웃겼던 장면은 그 운동단체 조직원들이 '지나친' 공감 능력을 보여줄 때였다. 옥자가 강제로 짝짓기 당할 때, 레드라는 여자 조직원은 자신들이 옥자가 당할 일을 알면서도 잔혹한 실험실에 보냈다고 자책한다. 이렇게 자책하는 장면에서 배우들의 너무 진지한 혹은 과장된 공감 연기도 조직원들의 위선을 드러내는 봉준호의 연출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동물 보호 단체는 보통 윤리적이다. 도덕적으로 선한 지향을 갖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지향을 이루기 위한 수단도 올바른 방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통념이다. 하지만 이 동물 단체는 '과정의 정당성보다는 결과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는 공리주의적 원칙이 갖는 위험성에 대해 고민하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낄 새도 없이 옥자를 잔혹한 실험실에 보내는 결심을 한다. 보내 놓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레드와 그 레드를 위로해주는 조직원들의 과도한 공감 능력이 왜 그리 우스꽝스럽게 보였을까? 감독은 등장인물들의 이런 모순적 행태를 영화 내내 보여준다.

    





신성한 통역?



한국계 인물인 케이는 의도적으로 그 단체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미자와 그 단체 조직원들을 속인다. 그리고 개 패듯이 맞는다. 동물단체 리더가 개 패듯 케이를 때린 후, 이렇게 일갈한다. ‘통역은 신성하다고.’ 이 사건 이후 케이는 단체에서 쫓겨난다. 그런데도 영화 말미에 미자와 그 조직 리더를 구하기 위해 케이가 트럭을 몰고 다시 등장한다. 그리고 '여긴 어쩐 일이니?'라고 묻는 그 리더에게 자신의 팔에 새긴 문신을 보여준다. 그 문신의 글귀는 '통역은 신성하다.’다. 역시 봉준호식 개그다. 이 장면에서 국내 한 언론사가 벌인 번역 왜곡 사건이 떠올랐다. 2~3년 전에 한국의 한 경제신문사가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학자의 저서를 자본에 유리하게 오역한 사건이 있었다. 이 링크는 해당 사건을 자세하게 다룬 한 언론사 기사다. (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713967.html). 저자가 이런 의도적인 번역 조작을 알게 되면서 그 언론사는 망신당하고 책을 다시 번역해 출판했다. 물론, 언론사는 저자에게 사과했고, 고의로 오역된 책을 이미 산 독자들에게 다시 번역된 책을 나누어 주는 일이 있었다. 우리 사회 기득권 집단의 민낯이 드러난 낯부끄러운 사건이었다. 봉 감독도 이 사건을 생각하고 이 장면을 찍었을까? 지식인의 정직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사례는 넘쳐난다. 뉴욕타임스는 싱크 탱크와 언론, 그리고 정치인의 야합을 폭로하기도 했다. 미국의 주요 싱크 탱크가 연구 보고서를 어떤 의도로 만들고, 이 싱크 탱크를 후원한 대기업은 그 보고서를 어떻게 부도덕한 방식으로 활용하는지에 관한 탐사 보도다. 여기에 이 기사 링크를 첨부한다. (https://www.nytimes.com/2016/08/08/us/politics/think-tanks-research-and-corporate-lobbying.html).




미디어가 비추는 인간의 단면성, 그리고 우리의 환상



쇼 호스트이자 동물 애호가인 닥터 조니라는 캐릭터는 정말 매력적인 인물이다. 프로 의식하며, 똘구 같은 과장된 연기 그 어느 것 하나 비판하고 싶지 않다. 조니의 캐릭터 표현은 봉준호의 연출력에 비롯한 것 같다. 어쨌든 압권은 옥자의 고기, 정확히 말하면 살점을 추출하는 장면이었다. 우리의 이중성뿐만 아니라 소위 유명인사들의 이중성, 아니 다중성을 폭로하는 장면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이중을 넘어 다중적이다. 개인은 각기 다른 상황과 다른 관계에 맞는 여러 인격(페르소나; 연극에 사용되는 가면에서 유래한 페르소나는 개인이 가진 여러 인격적 특성을 의미함; persona; a theatrical mask)을 가진다. 우리는 여러 관계와 상황에 맞는 마스크(인격)를 번갈아가며 바꿔 쓴다. 가족, 친구, 직장 상사나 윗사람, 학교 후배나 직장 동료, 그리고 멘토에게 보이는 내 모습과 태도는 각기 다르다. 우리에게 수많은 다른 가면이 있다는 말이다. 봉준호는 우리가 쓰고 있는 이런 가면을 유명인사도 똑같이 쓰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 것 같다. 아니, 이들은 훨씬 많은 수의 마스크 컬렉션을 가지고 있단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거 같다. 물론 봉준호 본인도 포함해서다.





생명의 가치, 그리고 그 등급



옥자가 미국에 끌려간 후 성적, 육체적 학대를 당하고 뉴욕의 쇼에 끌려 온다. 그래서 옥자는 미자를 보고도 한동안 알아보지 못한다. 급기야 미자를 공격하기까지 한다.  그때 그 동물 보호단체 리더가 미자를 공격하는 옥자를 지팡이 같은 것으로 내려친다. 미자의 날렵한 손이 그 지팡이를 붙잡는다. 동물 보호와 생명존중을 외치는 리더는 옥자가 미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주저 없이 옥자를 때리는 장면에서 묘한 모순이 보였다. ‘생명에도 등급이 있구나.’ 하는 리더의 위선이 드러나는 순간으로 내겐 보였다. 과연 슈퍼 돼지인 옥자의 생명과 미자의 목숨의 가치에 차이가 있을까? 봉 감독도 이 장면을 연출할 때 나와 같은 질문을 떠올렸을까?




옥자와 백숙



우여곡절 끝에 미자는 아기 슈퍼 돼지까지 데리고 옥자와 함께 산골 마을에 돌아온다. 다시 평온한 삶을 되찾았다. 영화의 결말이 이보다 더 해피할 수 있을까? 미자의 할아버지 변희봉이 마루에 앉아 있고 마실을 마치고 미자가 제일 먼저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옥자가 들어온다. 그다음에 새끼 슈퍼 돼지가 들어와서 마당에 놀고 있는 백숙이 될 잠재성을 가진 닭들을 놀라게 한다. 새끼 슈퍼 돼지가 백숙이 될 여러 닭에게 장난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봉준호는 이런 질문을 했을까? '옥자 살은 안되고 닭살은 먹어도 되나? 인간은 어디까지 먹어야 할까?, 정답을 아는 사람 있으면 나에게 얘기해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영화 <옥자>에서 감독은 모순과 위선으로 가득 찬 세계를 비판적으로 그려낸다. 그 비판 방식 또한 우리가 갖고 있는, 하지만 쉽게 드러나지 않는 모순과 위선을 보여줌을 통해서다. 소비주의를 비판하는 앤디 워홀의 작업 방식 또한 소비주의를 가능케 한 대량생산 방식이었던 것처럼 말이다(Arnold 2004, 101-2). 사회뿐만 아니라 우리도 여러 자기모순을 가진 채 살아간다. 사회도, 그 속에 사는 봉준호도 다 그렇게 산다. 그렇다고 우리도 모순이 있으니 사회나 그 사회의 권력자들의 모순과 위선을 눈감아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모순도 하나씩 고쳐가야 한다. 특히, 기득권자들의 모순의 정도, 그리고 그 모순 혹은 위선이 만들어 내는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 항상 경계해야 한다. 그래서 영화감독과 나를 포함한 시민도 강자의 위선과 모순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감독은 동물해방 전선의 모순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더 강력하고 거대한 악과 모순은 수정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 모순적인 인물은 봉준호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일 수 있다. 어쨌든 사회의 위선과 모순을 바로 잡으려는 시도는 계속되어야 한다. 개인이 자기모순이 있다는 것 때문에 그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의 모순은 하나의 상식이나 관행으로 굳어지게 된다. 그 관행은 심지어 법으로 제도화되어 우리를 짓누를 수도 있다.   




봉준호식 비틀기의 절정



영화 <옥자>의  갈등구조는 처음부터 돈에서 비롯했다. 미자와 옥자에게 일어난 모든 불행의 시작은 돈이었다. 결국, 이윤에 환장한 기업이 옥자와 미자를 불행한 상황 속으로 처박았다.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갈등 대부분이 아마도 돈에서 비롯하지 않았을까? 감독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생명 경시, 환경과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무분별하고 무자비한 이익 추구, 옥자와 미자의 사랑보다 돈을 중시하는 이기심과 비정함, 동물을 사랑하면서 학대하는 동물 박사(닥터 조니)와 같은 부끄러운 인물과 이와 비슷한 사회적인 현상들의 원인이 모두 돈이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 같다. 봉준호는 추하게 연출된 인물과 그 인물로 가득 찬 사회에 대해 <옥자>를 빌어 비평한 것 같다. 특히, 옥자를 되찾는 장면에서 봉준호는 자본주의 사회와 그 사회에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 문제는 간단해, 돈으로 생긴 문제는 돈이면 풀 수 있잖아. 이렇게 쉬운 문제를 왜 못 푸는 거야.’ 미자가 옥자를 사기 위해 금 돼지를 던지는 장면과 이 거래 조건을 예상외로 흔쾌히 받아주는 장면이 봉준호식 비틀기의 절정으로 내겐 보였다.











Bibliography     

Arnold. D (2004), ‘Art History’,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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