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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공장 Dec 25. 2017

<스타워즈>와 차악(次惡)의 화장법

선의 수호자 vs. 차악








선한 우리, 그리고 그들은?


선악의 대결을 그린 영화는 그 영화를 보는 사람과 그 사람이 속한 사회는 선하고, 그 사회가 아닌 곳은 악이라고 은밀히 속삭인다. 특히, <스타워즈>를 비롯한 할리우드의 영웅 영화(배트맨, 슈퍼맨, 어벤저스, 닥터 스트레인지, 전쟁영화, 그리고 스타워즈 시리즈,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등)는 선과 악의 주제를 줄기차게 다뤄왔다. 왜 이렇게 제목이나 소재만 바꾼 영화가 수없이 쏟아질까? 대중은 이런 똑같은 주제의 영화에 질릴 만도 한데 정말이지 한결 같이 사랑한다. 이런 영화가 쏟아져 나오지만, 참 이상할 정도로, 선악의 대결을 다룬 영화가 미치는 이념적 영향에 관한 고민과 토론은 또 쉽게 보이지 않는다. 평론가들은 미디어나 언론에 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이어서 그럴까? <스타워즈>의 영화평을 보면 감독의 스토리텔링이 어쩌고, 대단한 반전, 영화 촬영의 기법, 배우의 연기, 그리고 스펙터클에 대한 평가 등이 전부다. 영화 평론가나 영화 전문 기자는 할 말은 있으나, 돈의 힘 앞에 아무 말 못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할 정도다.


영화는 텍스트다. 영화는 의미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해석의 대상이다. 영화를 보는 사람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해석한다. 영화 비평은 어떤 해석이든 그 해석이 가지는 이념적 영향을 포함해야 한다. 해석이 갖는 이념적 영향이란 무엇일까(Freeden 2003, 114-5)? 영화에 대한 해석이 그 해석자의 태도와 행동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한 분석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에서 영화 주제에 관한 관객의 해석이 본인들의 신념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에 대한 분석을 하려 한다. <스타워즈>에 있는 다양한 영화적 기법에 관련한 세부적인 것들은 따로 평하지 않겠다. 다음, 네이버, 그리고 유튜브에도 넘쳐나니까.






선악의 대결, 이건 누구에게 이득일까?


선과 악의 대결을 다룬 영화는 관객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완전하진 않지만, 현재 우리 사회가 다른 사회보다 선하다.' 실제로는 현 사회의 여러 제도(status quo)도 상당히 불공정해 차별적이거나, 상대적으로 덜 선할 뿐이다. 정치 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그랬다. "사회의 제도와 법이 그 사회의 불평등을 합법적으로 보호한다."(Wokler 2001, 51-2)라고. 하지만 선과 악의 대결을 다룬 영화는 상대적으로 덜 악할 뿐인 현 사회를 더 선하게 보이거나, 덜 악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악당과 그 세력이 더 악하면 악할수록, 관객이 사는 현재 사회는 더 선하게 보이거나 덜 악해 보인다. 예를 들어, 사회적 약자의 관점에서 문재인 정부는 국정농단으로 탄핵당하거나 뇌물 죄로 수감된 '이명박근혜' 정부보단 상대적으로 선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판의 여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선한 정부는 아니다. 오히려 유럽이나 북유럽의 정부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악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권력을 가진 자들은 절대적인 악(히틀러와 스탈린 같은 파시즘 정권)을 교묘히 활용한다. 문재인 정부가 적폐 청산으로 과거 보수 정권을 때리면 때릴수록, 현 정권은 상대적으로 그 보수 정권에 비해 선하게 보인다. 반면에, 부패와 친한 보수 권력이 정권을 잡으면, 자신들보단 상대적으로 더 깨끗한 진보 진영 세력보다는 북한 정권을 활용한다. 자신들을 상대적으로 더 선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보수 정권의 대북 강경책은 자신을 선한 세력으로 위장하려는 혹은 살아남으려는 전략이다. 보수 정권이 진보는 아니지만, 소위 진보로 일컬어지는 진보 정치인이나 정치 세력을 종북으로 규정하는 것도 같은 전략이다. 북한 정권과 종북 세력을 혐오하는 특정 계층이나 연령층엔 북한 정권만큼 악한 정권은 없기에, 이들과 대척점에 서 있는 친일 기득권 세력이 상대적으로 선하게, 심지어 의롭게 보이기까지 한다. 자신들을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보수로 자리매김시킬 수 있으니까. 그러니 우리 사회의 친일 보수세력의 기득권 연장을 위해선, 북한 정권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이들은 북한 정권을 활용해, 선함과는 한참 거리가 먼 자신들을 현 체제를 수호하는 세력으로 신분 세탁한다.


막대한 경제 권력을 가진 자들도 선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물론, 이들은 이윤추구나 성장을 '선'으로 여기기에 자신들을 선하다고 믿을 것이다. 문제는 선에 관한 그들의 기준과 우리의 기준이 다르다는 데 있다. 우리 사회 경제 권력자들도 외국 자본, 소위 다국적 투기 자본의 악함을 강조한다. 이들은 외국 자본에 대해 다 같이 대항해 우리 경제의 주춧돌 역할을 하는 자신들을 지켜야 한다고 외친다. 자신들의 탐욕과 악함을 가리기 위해 더 나쁜 놈을 강조하는 이 전략 얼마나 탁월한가? 아이폰의 높은 마진율을 강조하면 할수록, 국내 스마트폰 제조사나 통신사의 '전 국민 호구 고객 만들기' 행태는 덜 악해 보이거나, 슬그머니 가려진다. 이런 방식은 어릴 적 친구들과 싸워 선생님에게 혼날 때, 우리가 즐겨 썼던 방법 아닌가? '저놈이 더 나쁜 놈이에요!' 우린 성인이 되어서도 이 전술에 똑같이 속아 넘어간다. 난 이런 걸 개인적으로 '스펙트럼을 이용한 착시 전술'이라 부른다. 이것이 선악을 다룬 영화가 노리는 꼼수다. 너무 얕은 수지만, 효과는 탁월하고 지속 가능하다. 이 꼼수가 현재의 악을 덜 악하게 보이도록 하거나 상대적인 선으로 위장하는 데 상당히 효과적이다. 그동안 선과 악의 전쟁을 소재로 하는 즉, 스타워즈 같은 이런 부류의 영화가 이 역할을 아주 성실히,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사정이 이러니, 각 사회의 권력자들이 선과 악의 대결을 다룬 영화를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나?






<스타워즈>를 보면 관객의 의식에서 어떤 감정과 생각이 일어날까?



또 한편으로, 이런 영화에선 주인공은 끊임없이 절대 악에서 무엇인가를 지키려 한다. 항상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선은 승리한다. 그러면 현 사회에 누가 선이고, 누가 절대적인 악인가? 란 질문이 관객의 의식에 일어날 수 있다. 질문이 여기서 주로 멈춘다. 그래서 관객은 외부의 적이나 더 악한 세력에서 그리 정의롭지 못하더라도 우리 사회나 그 제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이런 논리적 귀결을 활용하기 위해, 더 많은 영화 속에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애국주의) 이념이 담기게 된다. 이런 영화를 자주 보다 보면 소위 '애국 청년'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해석자인 관객의 질문은 더 나아가야 한다. 이런 영화가 그토록 지키고자 노력하는 현 사회는 진정 선한가? 그렇게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사회와 그 제도인가? 문제는 선과 악의 갈등을 다룬 영화가 이런 물음 자체를 차단한다.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견딜만한 현 사회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드니까. 현 사회는 그리 선하지 않다. 하지만, 현 사회는 영화에서 보여주는 절대적으로 악한 세력과 그들이 만들려는 사회보단 또 상대적으로 선하다. 그래서 우린 상대적으로 선한, 동시에 상대적으로 덜 악한 이 사회를 왠지 지켜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를 본 관객 다수가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누가 좋을까? 대중이 현재의 여러 제도와 규범을 착실히 지킬 때, 어떤 사람들이 혜택을 볼까? 현재의 제도와 규칙으로 인해 성공한 소수가 아닐까? 역설적으로, 현재의 제도로 성공하지 못한 다수가 소수를 성공하게 한 그 제도를 지켜야 할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 소수가 대략 편당 3천 억 원이 드는 블록버스터 영화의 제작비를 대는 사람들이 아닐까? 거기다가, 그들은 이런 영화의 막대한 흥행으로 보너스까지 챙긴다. 이런 보너스로 다시 그들의 지위는 더 굳건해진다.






선악의 이분법 vs. 선악의 스펙트럼, 그리고 상대적 선과 차악

 

이젠 흑백 논리, 선악의 대결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현재의 악에서 선으로 조금씩 이동해 나가는 자세가 바람직해 보인다. 선과 악의 스펙트럼에서 더 긍정적이고, 더 선한 방향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절대적 선과 악이란 게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존재할까? 극악으로 묘사되는 테러단체 리더도 자국민에겐 독립투사일 수 있고, 경찰국가라며 으스대는 미국도 타국의 관점에서 깡패 국가로 보일 수 있다. 어쨌든 현 사회는 그리 선하지 않다. 영화가 묘사한 절대적인 악을 보며, 현 체제를 지켜야 한다는 속임수에 이젠 넘어가지 말자. 당연히, 현 사회나 그 제도를 수호할 가치가 있는 사회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사회는 항상 개선되어야 한다. 인간 사회엔 늘 지배가 있었다. 언제나 여러 기준(성별, 인종, 고용의 형태, 신분, 거의 모든 분야에 서 있는 기준으로 위장한 진입 장벽)에 따른 차별이 있었다. 그 차별에 그치지 않고, 차별받는 사람을 향한 폭력과 살인도 있었다. 인류에 평등했던 사회는 거의 존재한 적이 없다. 그 불평등을 그 사회가 가진 여러 제도가 합리화하고 지켰다.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 대다수는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니 <스타워즈> 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절대적인 악의 묘사가 주는 착시 현상에 속으면 안 된다. 현재 인류(북반구)는 절대적인 악은 어느 정도 극복했다. 과거에 극복한 악이 무서워, 현 사회가 가진 상대적인 차악을 선으로 보는 어리석음을 이젠 범하진 말자. 그런 원시적이고, 절대적인 악은 이제 무시하자. 문명화된 사회에 숨은 악을 응시하자. 폭행이나 신체적 살인이 아닌, 경제적 살인(정리해고), 경제적 모욕과 차별(갑질 행태와 비정규직)과 같은 악에 주목하자. 21세기의 우리 사회에도 이런 부류의 악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민낯이다. 선과 악의 대결을 그린 영화를 해석할 때, 현 사회의 상대적인 악(현 사회의 민낯)과 그 형태가 숨겨지고, 심지어 이런 차악마저 지켜야만 할 것 같은 현재의 것들에 편승한다.






우리 사회의 제도가 숨기고 보호하는 상대적인 악


선악을 다루는 영화를 볼 때마다, 과연 '누가 악인가? 그리고 무엇이 선인가?' 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외부의 적보다는, 우리 사회 내부의 악, 그 악에서 비롯한 지배와 차별의 관행을, 그리고 선으로 위장한 차악을 경계해야 한다. 악과 싸우는 것으로 보이는 선의 투사도 실제로는 그리 선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차악과 큰 차이가 없는 존재일 수도 있다. 우리가 선과 악으로 인식한 것이 진짜 선하고 악한 것인지 한 번 쯔음 의심해 봐야 하지 않을까?    











Bibliography     

Freeden, M. (2003), ‘Ideology’,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Wokler, R. (2001), ‘Rousseau’,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 사진은 다음 영화(http://movie.daum.net/moviedb/photoviewer?id=77272#1034629/PhotoList)에서 가져왔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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