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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공장 Sep 07. 2017

<시인의 사랑>과 실존주의

하이데거와 자크 라캉의 철학으로 비평








시인은 슬픔을 재료로 시를 쓴다.

시인은 슬픈 사람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다.

시인은 슬프지만 그래도 괜찮단다.

영화에서 시인은 자신의 사랑을 선택하지 않는다.

억누를 수 있다고 생각한 슬픔이 차올라 시인은 다시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그 눈물은 다시 시가 된다.

                                - 영화 <시인의 사랑>에서 -






그 눈물로 감지되는 슬픔이 또 한 편의 아름다운 시를 써낼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려는 듯했다.

어쩌면 그 슬픔 때문에 피어났던 수많은 시로 인해 그나마 이렇게라도 세상이 굴러갔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당히 좋은 영화였다.

한편으로, 내 세상 같지만 절대 내 세상이 아닌 곳에서 내가 아닌 타인으로 사는 부자연스러움과 고통을 이 영화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사회는 이성애가 절대다수고, 동성애는 소수다. 이런 문화에서 시인은 결국 자신이 아닌 수많은 사람처럼 이성애자인 척하며 살아간다. 영화 <시인의 사랑>에서 아쉽고 안타까웠던 점은 자신의 사랑을 부여잡지 못하고 마치 숙명처럼 그 사랑을 포기하며 슬픔을 선택한 결말이었다. 대신 울어주어야 한다는 시인의 의무를 감당하려는 것처럼 성적 소수자로서의 본연의 내가 아닌, 그들(they)처럼 타인(이성애자)의 인생을 사는 모습을 보이며 영화가 끝났다. 여기에서 문화가 정한 규범대로 사는, 그래서 자신의 소망과 욕구를 억누른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내 머릿속에 계속해서 떠올랐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대로가 아닌, 문화가 욕망하라고 정해 준 대로 욕망하는 사람들(타인)처럼 사는 우리가 어찌 보면 영화 속 시인의 모습이지 않았을까? 시인은 자기 욕망을 억누르며 진정한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는 대부분의 현대인처럼 문화가 정한 규범과 트렌드에 맞추어 살다 진정한 자신을 잃어버린 한 전형으로 보였다. 시인은 자신을 부정하면서까지 남들처럼 사는 전형의 극단을 캐릭터화 한 것 같았다. 상당수의 동료 시민이 성적 소수자를 이상하거나 변태로 보는 편견이 우리 사회에선 여전하다. 그러니 이렇게 안전하게 보일 만큼만 영화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현재로선 의미 있는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성적 소수자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낀 감독들이 더 과감하게 이 문제를 영화라는 장르로 풀어나갔으면 좋겠다.





절대 권력인 문화의 영향 아래서 타인으로 사는 시인, 그리고


시인뿐만 아니라 우리도 욕망하는 대로, 몸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고 싶지만 사실 그렇게 살지 못한다. 현대인은 문화가 제시한 수많은 '금지 사항'에 복종하면서 사회화된다. 이 과정에서 '진정한 혹은 본연 그대로’의 자신을 잃어버린다. 자크 라캉은 문화 속에 사는 인간을 주체(a subject; 주체; 신하의 의미도 갖는)로 설명했다. 라캉에게 인간은 행동을 하는 주체다. 하지만 인간은 문화가 강요하거나 제시한 수많은 규범을 따라야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즉, 백성 혹은 신하 (a subject)처럼 문화라는 군주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Culler 2000, 108-9). 문화 속에서 주체로 성장하면서 진정한 자아인, 욕망을 가진 유기체적인 나를 점점 잃어버린다(Belsey 2002, 57-9). 인간은 완전한 자유가 있는 자연이 아니라, 문명사회에 산다. 그 사회를 보이지 않게 지배하는 문화 속에 현대인은 살아간다. 우리의 많은 욕구와 욕망은 문화가 제시하는 여러 규범과 충돌한다. 그래서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것을 스스로 억압한 채 문화가 요구한 대로 순응하며 산다. 다르게 표현하면, 그 문화의 요구에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는 수많은 사람들(they; 타인들)처럼 내 삶이 아닌 '그들'의 삶을 산다. 자크 데리다는 ‘문화는 제국주의적이다.’라고 말했다. 현대인은 문화가 정한 규범과 관습에 갇히거나, 이것들과 갈등하는 존재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가진 욕망과 문화가 요구하는 규범들을 잠깐만 비교해 보면,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단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한 사람이 두 사람 이상을 사랑할 수 있는 감정 상태(polyamory)와 일부일처제(monogamy)의 결혼 제도, 같은 성을 사랑(a same-sex relationship)할 수 있는 우리와 압도적인 다수가 이성애자인 문화, 젊은 여성을 사랑할 수 있는 노인의 마음과 그 노인을 부끄럽게 여기는 우리 문화, 아내와 남편 외에 같은 사무실에 있는 이성에게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우리의 본성(an open relationship)과 그 사랑을 불륜으로 보는 우리 문화와의 갈등을 생각해 보게 만드는 영화가 <시인의 사랑>이 아닐까? 이성애가 지배하는 문화에서 성 소수자인 시인이 갈등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모습에서 문화와 여러 측면에서 갈등하는 수많은 현대인과 내가 보였다.






나도 그들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만의 소망과 욕망에 맞추어 살아가고 있나?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은 가능성 그 자체라고 했다. 하지만 인간이 가진 수많았을 가능성은 남들이 사는 대로 즉, 문화가 정한 규범과 관습에 맞춰 고분고분하게 살아갈 때, 그 무한한 가능성은 소멸한다고 한다. 남들이 사는 대로 문화에 순응하며 사는 것은 진정한 자신을 잃어버린 비 진정한(an inauthentic self) 자아라 하이데거는 주장했다(Flynn 2006, 70). 하이데거는 이런 비 진정한 자아는 선택의 순간에 직면했을 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묻는다고 한다. “남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그리고선 그 질문의 답에 따라 그 선택한다고 한다. 하지만, 자기 삶의 문제에 이런 식으로 선택하는 건 자기 운명에 대한 결정권을 타인에게 넘겨버리는 것과 같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Inwood 2000, 26-8). 그러고 보면 우리는 내 맘대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방식으로 선택하며 사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타인이 살았던 혹은 사는 대로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내 선택인 것 같지만, 그 선택의 기준은 남이 정하거나 문화가 정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름답지만 아쉬운


<시인의 사랑>은 약간의 편집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부인이 남편 시인에게 떠나지만 말라고 애원하는 장면은 조금 급작스러웠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매끄럽게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영화의 주제도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너무 아쉬웠던 점은 시인도 자기 자신만의 삶보다는 타인처럼 살아가는 방식으로 결말을 보여준 부분이었다. 이성애적 문화에 순응하며 사는 시인의 모습을 보이며 영화가 끝났기 때문이다. 물론 시인은 슬픈 사람을 위해 울어주는 사람이고, 그 슬픔으로 아름다운 시를 지어내는 사람이라고 감독이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자신의 말대로 타인으로 살 때 일어날 수밖에 없는 슬픔을 안고 살기로 실존적인 선택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슬픔으로 시를 쓰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거대한 문화, 수많은 다수가 걷는, 어쩌면 뻔한 그 길을 좋아하지 않는다. 압도적인 문화와 그 문화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엄청난 수 때문에 시인처럼 체념하는 건 더 싫어한다. 그래서 시인이 이성애가 지배하는 문화에 당당히 맞서기를 바랐다. 진정으로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으로, 고유한 자신을 드러내며 당당하게 사는 그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이렇게 편견의 벽에 맞서며 사는 과정에서 생긴 아픔과 슬픔을 시로 승화시키는 결말로 영화가 쓰였다면 더 아름답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정도여도 좋았다. 대중성은 있지만, 저질인( Kitsch) 영화가 대부분인 한국 상업 영화시장에서 보기 드물게 주제의식이 선명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거의 데뷔작에 가까운 <시인의 사랑>은 시작치고 참 좋은 영화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 더 대담한 영화를 찍어주길 기대해 본다.







타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도 시인


시인만 타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타인으로 산다. 그래서 늘 원인도 모르게 아프고 결핍과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낀다. 이런 것들이 나에게 슬픔이 된다.  그래서 그 슬픔 때문에 우리에게서도 시가 피어오른다. 그 시는 다시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해 대신 울어주고, 또 그 울음은 또 한 편의 시로 태어난다. 그래서 내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이 세상에서 진정한 내 욕망을 억누르며 남들이 사는 대로 살아간다. 이렇게 내가 아닌 타인으로 살아가는 것 때문에 슬픈 나도, 그리고 나처럼 사는 우리도 시인이 된다. 직업적 시인과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린 시간과 공간이란 종이 위에 몸의 궤적으로 시를 쓴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Bibliography

Belsey, C. (2002), ‘Poststructuralism’,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Culler, J. (2000), ‘Literary theory’,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Inwood, M. (2000), ‘Heidegger’,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Flynn, T. (2006), 'Existentialism',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이 글에 사용된 모든 사진은 다음 (daum)에 게시된 <시인의 사랑>의 공식 사이트에서 가져온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http://movie.daum.net/moviedb/photoviewer?id=108946#1167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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