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때녀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골때녀를 처음 본 것은 풋살을 시작한 즈음이었다. 국내 최초 여자 축구 예능이란다. 처음 시작은 정규방송이 아니라 시청자의 반응을 보고 계속할지 말지 판단하는 파일럿 방송이었다. 경기에 참가하는 팀은 총 4팀이다. 여자 개그맨으로 이루어진 개벤져스, 가족 중 축구선수가 있거나 본인이 국가대표를 경험한 사람들로 구성된 국대 패밀리, 모델로 이루어진 구척장신, 연기자나 가수 출신 싱글 여성로 구성된 불나방 팀이다. 그들을 도와주는 감독은 황선홍, 김병지, 최진철, 이천수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2002 월드컵 레전드 선수들이다.
전반적으로 축구의 형태를 띠지만, 구장 크기가 작고 한 팀을 구성하는 선수가 5명인 것을 보면 풋살에 가깝다. 재미로 보기 시작했지만, 매 경기 의외로 배울 점이 많아서 어느 순간부터는 챙겨 보게 되었다. 또한 시청자 반응이 좋아 정규 편성이 된 것도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정규편성 이후 팀도 늘어나고 더욱더 보는 재미가 커졌다.
많은 선수 중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사람은 모델로 이루어진 구척장신팀의 이현이라는 선수다. 키가 크고 부리부리한 눈코입이 처음부터 늠름해 보였는데, 첫 경기에서 그녀가 보여준 모습은 허당 그 자체였다. 공을 앞에 두고 헛발질은 기본, 눈을 부릅뜨고 드리블하는 모습은 너무 우스워서 누군가 화면 속 그녀를 봤다면 새로운 개그맨인가 했을 것이다. 정규리그에 와서 몇 번의 경기를 뛴 후 놀랄 만큼 실력이 향상된 그녀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다.
지금까지 내 인생이 그저 살아졌다면,
풋살을 하고 나서는 열심히 사는 인생으로 바뀌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아하 그렇지 하고 무릎을 탁 쳤다. 내 얘기 같았다. 풋살은 매 순간 뛰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저 시간이 흐르기만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지. 이 말이 내 맘 속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날 이후 난 구척장신의 팬이 되었다.
한 번이라도 숨차게 뛰어본 사람은 안다. 100미터를 달리듯 500미터를 달릴 수 없다는 것을. 운동장 한 바퀴를 도는 것은 쉽지만, 두 바퀴, 세 바퀴를 같은 속도로 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쉬지 않고 뛰어야 한다는 것은 마치 등산을 하는데 힘들어서 머리는 쉬고 싶다 말하지만, 다리는 어느새 올라가고 있는 그 상태다. 달리기든 등산이든 일단 시작하면 계속 다리를 움직여야 한다. 우뚝하니 멈춰서 버리면 곤란하다. 정상까지 가지 못해도 어느 순간까지는 부지런히 걸어야 하고, 풋살 전반전이 끝날 때까지는 어쨌거나 계속 움직여야 한다.
골때녀가 인기가 많아지자 우리 안에서도 수다가 끊이지 않는다. 수요일 밤에 골때녀를 본 뒤 목요일에 풋살장에 오면 경기에 대한 평가를 하거나, 선수에 대하여 가차 없는 의견을 나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계셨던 감독님이 조용히 한마디 하신다. 우리 팀 실력을 골때녀에 비유하면 아나콘다 정도 된다고. 그 순간 우리는 아무 말 못 했다. 믿고 싶지 않지만 우리가 그거밖에(?) 안 되나요.
아나콘다는 전, 현직 아나운서들로 구성된 팀이고, 정규리그 이후 나중에 합류했다. 매번 열심히 뛰지만 연패를 이어가는 최약체 팀이다. 연습도 열심히 하고 필승을 다짐하지만, 이상하게 역전패를 하거나 경기 후반 체력이 떨어지는 것이 초보자인 내 눈에도 보일 정도다. 그래서 안쓰럽기도 하고, 마음속으로 제발 한 번만이라도 이겨달라고 응원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그 수준이라니 실망감을 넘어 갑자기 진지해진다.
무조건 열심히 하면 잘될 거라는 순진한 믿음은 풋살에서 통하지 않는다. 마치 열심히 공부하면 누구나 다 일등을 할 수 있을 거라는 헛된 희망처럼 우리는 그것이 거짓임을 다 알고 있다. 이럴 때는 근거 없는 자신감보다 공을 한번 더 차고, 한 번 더 드리블 연습을 하는 게 낫다.
우리가 아나콘다라면,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네요. 함께 뛸 심장은 준비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