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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우드 Aug 28. 2020

삽질의 추억

쓸모없음의 쓸모


우기가 끝나고 폭염이 이어졌다. 알면서도 모래판에 나온 것은 순전히 나의 욕심이었다. 아이의 욕구와 나의 욕심이 절묘하게 만난 그 지점에 모래판이 있었다.


아이가 병설 유치원에 들어간 순간, 설마 했던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나의 방학은 이제 나만의 방학이 될 수 없음을. 방학이 좋았는데, 이제는 방학조차 좋아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이놈의 직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사가 좋은 게 연금과 방학 때문인데, 연금은 이미 끝장났고, 나만의 방학은 앞으로 10년 후에나 가능할까. 모래판은 집에서 차로 40분을 달려가야 했다. 바다도 아니고, 고작 작은 모래판이라니. 힘들게 와서 모래판에 발을 들여놨을 때, 휴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래가 생각보다 깨끗하고 고왔다.


며칠 전 큰 맘먹고 바다로 갔는데 모래 알갱이가 커서 적지 않게 당황했다. 아이는 모래성이 쌓아지지 않는다면서 울먹이듯 나를 쳐다봤고, 난 애써 모른 척했으니. 모래가 고운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아이는 처음 보는 환경에 낯설어서 엄마 같이 놀아요 10번은 말했다. 나는 주문한 아이스 초코와 빵에 눈이 멀어 잠깐만을 13번 외쳤다.

더워도 괜찮아. 크림치즈 빵과 아이스 초코가 있으니까.

더워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이스 음료가 있어서였다. 거기다 빵도 의외로 맛있어서 더위 따위는 물렀거라였다. 주문할 때 '놀이터에서 드시면 더우실 거예요.' 말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얼음이 녹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서 한번 쭉 들이키면 반 이상이 없어질 것 같았다. 아껴 먹어야지.


모래성에 크롱이도 새겨주렴.

아이는 삽으로 흙을 퍼서 노랑 통에 담아 끊임없이 성을 쌓고 부쉈다. 성을 제대로 쌓으려면 모래를 담은 후에 팡팡 두들겨 모래 사이의 틈을 없애야 한다. 그러고 나서 살포시 뒤집어서 비로소 성이 완성된다. 그 지난한 과정을 반복하며 다시 부수고 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삽질의 기억이 떠올랐다.

흙이 고와서 성이 단단해 보인다.

삽질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쓸모없는 일을 하다는 뜻이란다. 지나고 보니 살면서 여러 가지 삽질을 많이 했다. 당시에는 무작정 열심히 했던 그 일이 삽질인 것을 깨달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매 순간 열심히 성실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삽질의 추억 또한 그만큼 쌓였다. 자다 가다 이불 킥해서 이불이 저 멀리 날아갈 정도로 부끄러운 순간도 많았다. 왜 그랬을까. 그 순간 내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다.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떠오르는 몇 가지 기억.


그런데 이상했다. 그 쓸모없는 일들이, 그런 삽질이 결국 온전한 나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실함으로 가장한 무기도 있지만, 알게 모르게 지나쳤던 삽질의 기억.


삽질 안 해본 인생 있을까? 그저 멍하게 아이를 바라보다 쓸모없는 일도 결국은, 언젠가는 그 쓸모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순전히 더위 탓이라 믿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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