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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덕질

오마이걸 정규 2집 <Real Love>

by 엔틸드

극락행 Real Love 항공 328편 기를 타고 사뿐히 이륙하면 멤버들이 촘촘이 쌓은 코러스 레이어가 일곱빛깔 구름처럼 주위를 감싸고 여정을 이끈다. 신나게 여행을 하고 도착한 그 섬에서 마침내 Real Love를 만난다. 한동안 여행을 가지 못해 힘들었던 우리는 이제 30분 남짓한 시간동안 오마이걸과 함께 더 넓고 깊은 세계를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K-Pop의 시대에서 정규앨범이란 팬들을 향한 감사의 표현이자 음악적인 성취를 정리하고 향후 활동의 좌표를 설정하는, 다양한 역할을 감당한다고 할 수 있다. 오마이걸의 이번 앨범은 미라클 팬덤의 정식 출범일에 발매된데다 이전 앨범들을 통해 꾸준히 선보인 '팬송 (Dear Rose)'을 수록했다는 점에서 팬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충실하게 전하고 있다.


음악적 성취 또한 눈여겨볼만한데, 이제는 오마이걸의 분신이라 불릴만큼 오랫동안 협업해 온 서지음 서정아 작사가는 짜임새있는 서사를 구축해야 하는 정규 앨범에 안성맞춤인 가사로 기대에 화답했다. 음악적인 시도는 좀 더 새로운 시도로 방향을 잡았다. 전작인 <Dear OHMYGIRL> 이 "아련 몽환 청순 발랄"에 깊이와 편안함을 섞었다면, 이번 앨범 <Real Love>는 밀도와 무게감을 더했다고 볼 수 있다.


타이틀곡 <Real Love>가 전작의 타이틀 <Dun Dun Dance>와 편안함이라는 정서를 공유한다면, 수록곡들은 이전의 오마이걸 음악과는 다른 시도가 엿보인다. 팬덤 사이에서 이미 더블 타이틀로 거론될 정도인 <Drip>이나 마이클 잭슨과 작업했던 Darkchild가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Blink>가 대표적인 예이며, 클럽 음악으로도 손색없어 보이는 <Replay>, 그리고 <Eden>, <Kiss & Fix> 도 대중들이 생각하는 오마이걸 음악의 스펙트럼을 기분좋게 넓혀줄 트랙이다.




앨범 전체를 살펴보면 "명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서지음 서정아 작사가의 시적인 가사는 명성 그대로이고, 그간 오마이걸 앨범의 뿌리가 되어 주었던 세련된 사운드 메이킹이 그에 적합한 곡과 코러스 레이어링, 보컬 디렉팅과 조화를 이루어 "듣기 좋은 고급스러움"을 선물한다.


개인적으로 이전 앨범들에서는 튼튼하게 잡힌 중저음역 사운드와 잘 짜여진 비트메이킹이 제 역량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아깝게 묻혀버린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었는데, 이번 앨범에 이르러서야 그 역량을 발휘됐다는 느낌이다. 여기에 멤버들의 향상된 곡 소화능력과 과감하고 촘촘한 코러스 편곡이 화룡정점이 되어 곡의 퀄리티를 올려주고 있다. 예전에 이 부분에 대한 아쉬움을 담아 <오마이걸의 스타일리시>라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번 앨범은 그 아쉬움을 깔끔하게 씻어주었다.



a0085897cab5f01571d0617206288e9a5616ac3e_re_1648722811976.jpeg 봄이 오면 오마이걸이 컴백하는 것이 아니라, 오마이걸이 컴백하면 그 때가 바로 봄이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이제 각 트랙을 자세하게 들여다보자.


#1. Real Love


전작의 타이틀 <Dun Dun Dance>를 계승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나 다가오는 봄이 주는 계절감에 집중하여 좀 더 부드러운 이야기로 변모했다. 사랑에 빠지면 경험하게 되는 낯선 세상의 설렘을 상큼하게 담아낸 점이 인상적이다. 다만 <Dun Dun Dance>가 과도할 정도로 많은 테마를 한 곡에 응축하려 애썼다면, <Real Love>는 오히려 너무 절제한 나머지 하나의 테마를 지루하게 끌고 간 면이 없지 않다. 단촐한 사운드 메이킹은 장르적 특성이라 간주할 수 있으나, 타이틀에 대한 대중의 기대와는 어긋나는 툭 툭 끊기는 듯한 편곡과 엔딩 부분의 급한 마무리는 아쉽다. 다만 곡의 내적인 에너지는 "향수처럼 진하게 스며들기"에 모자람이 없다.


#2. Drip


이번 앨범에서 가장 애정하는 곡이다. <Twilight>, <Checkmate>, 게릴라 등에서 가능성을 보인 <오마이걸의 스타일리시>를 완성시켰다고 평하고 싶다. 소녀시대가 <I Got A Boy>에서 시도했던 이러한 리듬 체인지는 분명 위험도가 높은 도전이지만 작곡가 본인이 가장 애정하는 곡이라고 할 만큼 역량을 다한 이 곡에서는 그 위험을 보기 좋게 가장 빛나는 부분으로 변모시켰다. 오마이걸이 곡을 낼 때마다 꾸준히 들었던 사람이라면 이 곡이 오마이걸의 역사에서 갖는 남다른 의미를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3. Eden


이 곡 또한 기존 오마이걸 스타일 발라드의 작법을 벗어났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기존의 오마이걸 발라드에서는 예의 그 소녀소녀한 태도를 유지하며 에둘러 조심스레 위로하는 투였다면 이 곡은 직접적으로 "너 괜찮지 않은 거 다 알아. 걱정말고 펑펑 울어. 괜찮아." 라고 말하고 있다. 늘 나를 조심스레 대하던 누군가가 분명한 위로를 던지는 순간은 특별하다. 이 곡을 들은 눈물을 훔쳤다는 미라클이 한 둘이 아닌 것은 우연이 아니다.


#4. Repaly


이 앨범에서 가장 이질적인 곡이자 그만큼 새로운 시도가 빛나는 곡이다. 클럽에서 틀어놓고 무아지경으로 흐느적 흐느적 흔들다가 갑자기 들려오는 "I wanna repaly"라는 속삭임을 들어버리는 순간 사로잡히는 감정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제목 그대로 계속 리플레이하고 싶어지는 곡이다.


#5. Parachute


앨범 발매 전 공개된 하이라이트메들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곡이다. 시작 부분의 "행운을 빌어~ 빌어~ 빌어~"가 타이틀 곡의 "이 음악을 빌려 이 분위기를 빌려" 라는 가사와 묘하게 맞물리는 느낌이 들며 중독성을 배가시킨다. 시원한 여름날 오픈카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며 듣는 풍경이 떠오르는 곡이다.


#6. Kiss & Fix


미미가 이번 앨범에서 가장 애정하는 곡이라고 밝힌 바 있다. 멜로디와 세션 위주로 들을 때는 분명 새로운 시도로 느껴지는데, 멤버 한 명 한 명 보여주는 보컬의 색깔이나 코러스 편곡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오마이걸을 만날 수 있다. <비밀정원> 앨범의 마지막 트랙 <Magic>이 생각나는 곡이다.


#7. Blink


시작하자마자 터지는 미미의 래핑으로 단번에 귀를 사로잡버리는, 팬덤 사이에서 <Drip>과 함께 더블 타이틀로 거론되는 곡이다. 마이클 잭슨과 협업한 Darkchild가 참여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듣더라도 고급진 팝송 느낌이 난다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곡의 완성도가 뛰어나다. 특히 중간의 주고받는 부분은 이 곡이 콘서트마다 불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콘서트에서 오마이걸과 미라클이 서로 주고받는 감격스러운 장면을 빨리 봤으면 좋겠다.


#8. Dear Rose


팬덤에서는 <B612>와 연결되는 팬송으로 알려진 곡이다. 두 곡 모두 소설 "어린 왕자"를 모티브로 했는데, <B612>가 수줍은 사랑 고백이라면 <Dear Rose>는 "우리 이제 같이 갈까?" 라는 적극적인 초대라고 할 수 있다. <Eden>과 함께 팬덤의 눈시울을 적시는 곡. 발라드가 아닌데도 눈물이 맺히는 이유는 뭘까?


#9. 항해 Sailing Heart


앨범의 대미를 장식하는 곡이자 확실한 발라드 장르의 곡. 지호가 이 곡을 녹음하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Nonstop> 앨범에서 <꽃차>를 작곡했던 모노트리가 다시 한 번 참여했으며, 타이틀곡 <Real Love> 로 둥실 떠올라 시작한 여행의 차분한 착륙을 돕는다.




a19114e6b8e01b5aa872e1be53d1af295742bf09.jpeg 전생에 이어 이생에도 나라를 세웠다고 전해지는 용안 김지호 선생.



케이팝 시장의 순환주기를 고려할 때 이제 8년차 활동에 들어선 걸그룹이 정규 2집을 낸다는 것은 어쩌면 커다란 모험일 수도, 아직 보여줄 것도 많고 갈 길도 멀다는 자신감과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다. 음악 예능 <퀸덤>으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쌓을 기반을 닦고, 그 기대에 대중적인 앨범으로 화답했던 <Nonsop>의 흥행 공식을 염두에 둔다면 이번 앨범은 확실히 결이 다른 선택이다. 게다가 정규 2집에서 이러한 시도라니.


<Real Love>가 타이틀이 된 것은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릴 만큼 논쟁의 여지가 있다. 발매 당일부터 이에 대해 아쉬워하는 팬덤의 여론이 있었으며 나 또한 이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덧붙이자면 다음 앨범에서는 현재 절대적인 분량을 담당하고 있는 특정 작곡가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럼에도 음악방송을 통해 퍼포먼스가 곁들여진 곡을 감상하고 나니 이번 앨범에 대한 아쉬움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소속사가 보이는 앨범 외적인 운영 전략에서는 분명 아쉬움이 많이 남지만, "앨범 하나는 제대로 뽑는" 오마이걸의 명성은 이번 앨범에서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오마이걸은 팬덤이 아닌 케이팝 리스너에게도 특별한 그룹이다. 이 격렬한 케이팝 시장에서 조심스럽지만 확실하게 자신들만의 영역을 넓히며 독보적인 길을 개척하는 그룹이 장수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팬은 아니지만 음악 좋은 것만큼은 확실히 인정한다"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멤버 각자가 가진 진중함과 진정성 있는 태도가 더해져 어떤 장르 어떤 메시지로 돌아오든 오마이걸의 음악은 늘 사랑받을 수 있었다.


미라클로서의 바람이기도 하지만, 케이팝의 다양성과 존재 가치를 위해서라도 오마이걸이라는 그룹이 오랫동안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활동하면 좋겠다. 이런 귀중한 그룹이 오래오래 현실적인 어려움 없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당장의 음원 성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더라도 여기 저기에 이들의 음악을 듣고 즐기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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