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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단 Aug 20. 2024

잊는 것과 웃는 것 중 당신은


준비한 안내문과 홍보물을 내 자리에 붙이고 판매자 목걸이를 착용했다. 첫 번째 손님이 되어 마수걸이를 해 주기로 한 친구와 마주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둘 사이에 대화 메뉴판을 놓고 애피타이저부터 천천히 질문을 음미하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번갈아 메뉴를 고르며 질문과 답을 주고 받다 보니 대화가 점점 깊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한참 달아오르던 분위기를 멈춰 세운 건 부스에 들른 낯선 이들의 인기척이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안내문을 살피는 그들을 슬쩍 쳐다 본 친구는 “잘해봐!” 라고 입모양으로 말하며 진짜 첫 손님에게 서둘러 자리를 내어주었다.


멀찍이서 안내문을 보던 두 사람은 친구가 떠나자마자 의자를 끌어 자리에 앉았다. 아직 앳된 얼굴의 두 사람은 같은 중학교를 나와 다른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고생들이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는 반가움과 창밖에 내리는 하얀 눈이 주는 설렘, 낯선 사람과의 대화라는 새로운 경험을 앞둔 기분 좋은 긴장감이 두 얼굴을 채우고 있었다. 그 얼굴들을 보며 내 마음을 채우고 있던 두려움이 설렘으로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리에 앉은 두 손님에게 내가 판매할 상품을 소개하기에 앞서 고민이 들었다. 여러 질문들이 코스 요리처럼 구성되어 있는 대화메뉴판과 주제 별로 질문을 뽑아 그에 대한 각자의 답을 나누는 대화의 간식 중 무엇을 소개하는 것이 적절할까? 대화메뉴판은 긴 호흡으로 서로의 레이어를 살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그만큼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조금 전 나눴던 친구와의 대화처럼 부스를 찾은 다음 손님에 의해 흐지부지 마무리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너무 긴 시간 동안 대화가 이어진다면 다른 손님들을 한참 기다리게 할 수도, 그러다 떠나가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낯선 이들과 대화해보고자 했던 나의 참가 목적과 구경과 체험을 기대하는 손님들의 마음을 고려했을 때, 이번 플리마켓에서는 대화의 간식을 주력상품으로 판매하는 게 적합하겠다는 판단이 섰다. 짧은 시간 고민을 마친 나는 활짝 웃으며 책상 옆에 준비되어 있는 대화의 간식을 소개했다.


"각각의 유리병에는 주제에 맞는 질문이 있어요. 하나씩 뽑아서 질문에 대한 답을 하며 이야기 나눠볼게요!"


잊는 것과 웃는 것 중 당신은


의자가 하나밖에 준비되지 않았던 관계로 한 손님은 앉고, 한 손님은 옆에 서 있어야 했다. 이 곳에 오자고 제안한 사람이 앉고, 따라온 친구는 서 있기로 했다. 대화의 간식에 대한 안내를 들은 두 학생은 부끄러워하며 뽑기를 서로에게 미뤘다. "니가 오자고 했으니까 니가 뽑아" 라는 친구의 말에 앉아있던 학생이 유리병으로 손을 뻗었다. '2023년의 기쁨', 그것이 우리의 첫 번째 간식이었다. 부끄러워하던 모습도 잠시, 두 학생은 자신의 이야기를 서스럼 없이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평가될 지 고민하거나 재지 않는 답변에는 맑은 솔직함이 배어 있었다. 어느새 우리는 앉아있는 손님의 짝사랑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오랜 시간 이어온 짝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대화 속에서 내가 목격한 것은 앞에 앉은 두 사람의 우정이었다. 친구가 말하는 짝사랑 타임라인의 모든 상황을 기억하고, 말하는 중 누락되는 감정과 상황을 마치 자기 일처럼 메꿔주는 다른 손님의 모습에서 나는 끈끈한 우정을 느낄 수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나를 알고 있다는 믿음, 나는 이 친구를 잘 알고 있다는 자신감이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훈훈하게 달궜다.


두어 개의 질문을 더 뽑은 후, 마지막 질문을 뽑을 시간이 되었다. (대화를 진행하며 질문은 3-4개가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고백' 유리병으로 손을 뻗은 손님이 뽑은 질문은 "잊는 것과 웃는 것 중 당신은 무엇을 더 잘하나요?" 였다. 앉아있는 손님도 나도 말 없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친구를 앉히고 어정쩡하게 서 있던 17살 소녀가 대답했다.

"전 잊는 거요. 잊어야 웃을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앉아있던 손님이 놀란 얼굴로 친구를 올려다 봤다.


서로가 서로에게 뻔한 사이, 내 마음을 대신 말해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에도 한 사람을 다 안다는 건 없다. 단지 '다 안다'고 착각하고, 그러다 아님을 깨닫고, 알아가기를 노력하는 일이 반복될 뿐이다. 익숙한 환경과 반복되는 주제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안다는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서로에게 보여준 적 없는 면, 겹쳐지지 않은 이야기, 다 표현되지 못한 감정들은 '안다'는 완결된 상태에 틈을 만든다. 그리고 그 틈을 마주할 때 우리는 착각에서 깨어나 상대를 새롭게 마주하게 된다. 눈이 펑펑 내리는 한겨울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무료>라는 두 글자에 호기심이 일어 나의 부스로 향했다. 그리고 낯선 주제가 담긴 쪽지를 뽑으며 그 틈을 마주하게 되었으리라.


그 질문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마무리했다. 부스를 떠난 후, 작게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너 뭐야..?“

똥그래진 눈으로 서 있는 친구를 바라보던 손님의 표정이 떠올랐다. 오늘 이 곳에서 발견된 틈은 두 사람을 어디로 데려갈까? 잔잔한 기대감이 마음에 일었다. 성공적인 첫 판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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