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주단 Aug 21. 2024

세 명의 법칙

첫 손님을 보내고 난 후, 나는 부리나케 1층에 계신 사장님께 달려갔다. 대화 내내 한 손님을 어정쩡하게 서 있게 만든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상황을 말씀드리고 추가 의자를 얻어와 나의 맞은편에 가져다 놓았다. 아직 플리마켓이 오픈한 지 30분밖에 되지 않아서인지 카페는 전반적으로 한산했다. 다른 부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구경할 겸 나는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직접 그린 그림이 담긴 엽서와 중고물품들, 모자와 폰케이스를 파는 부스들을 지나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발길이 닿은 곳은 떡볶이와 장난감을 파는 부스였다. '나도 이따 사 먹어야지'라는 생각을 하며 몸을 돌렸을 때, 화장실 앞에 서서 컵떡볶이를 먹고 있던 두 사람을 보았다. 성공적인 첫 판매가 불어넣은 자신감 덕일까, 나는 능숙하게 두 사람에게 말을 붙였다.

"제 부스로 가서 편하게 앉아서 드세요. 같이 이야기도 나누고요!"

그렇게 두 번째 손님이 자리에 착석했다.


올해의 괴로움은

두 사람은 카페 가까이 위치한 대학의 학생들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함께 입시를 준비했던 두 사람은 같은 대학의 미대생이 되었다. 두 사람 모두 디자인과로 진학했지만 한 친구가 조각과로 전과를 하며 전공이 달라졌다고 했다. (이하 '디'와 '조') 조는 큰 목소리로 말하고 복식호흡으로 웃는 사람이었다. 큰 눈과 코에 박힌 반짝이는 피어싱, 풍성한 파마머리가 시원시원한 그녀의 성격을 나타내는 듯 했다. 반면 디는 수줍은 표정을 띠고 작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행동이 크지 않고 입을 떼기 조심스러워 했지만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면 자기만의 속도로 말을 이어갔다. 두 사람의 모습은 극과 극처럼 보였지만, 엄지에 콕 박힌 점과 분위기는 묘하게 닮아 있었다.


처음 쪽지를 뽑은 디를 시작으로 돌아가며 답변을 말하고 다음 쪽지를 뽑아가며 대화가 진행되었다. 부끄러워 하면서도 한 질문 한 질문 진지하게 받아들여 내밀한 속내를 보여주는 디와 달리, 조는 ‘아무렴 상관없어~’ 하는 식의 호탕함과 쿨함을 대화 내내 보여주었다.


그러다 셋 중 누가 뽑았는지 기억할 수 없는 쪽지가 우리 앞에 펼쳐졌다.

“올해의 괴로움은?”

입을 떼기도 전에 조의 짧은 대답이 들려왔다.

“전 없어요. 진짜 괴로운 게 없는데?”


디와 나의 눈이 빠르게 마주쳤다 동시에 조를 향했다. 그럴 리 없다는 표정으로 답을 요구하는 두 쌍의 눈알을 번갈아 보며 조는 다시 한 번 딱 잘라 말했다.

“저는 진짜 없어요! 다 행복한데 진짜?“


디와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돌렸고, 다음으로 입을 뗀 것은 나였다. 당시 직장 내 일련의 사건을 처리하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 괴로운 감정을 막힘 없이 풀어냈다. 디 또한 졸업을 앞둔 대학생의 고뇌와 작업에 대한 괴로움을 나눠주었다. 그려지지 않는 졸업 후의 삶과 ‘나중의 내가 책임질 거야’ 라는 긍정회로로 도피할 수 밖에 없는 결론까지. 나도 디도 서로의 일을 경험한 적 없었지만 마음을 기울여 최대한 그 상황을 헤아리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 마음은 직장인과 대학생, 교육종사자와 예술인이라는 정체성의 차이를 엮어 서로에게 닿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대화는 각각의 사례를 지나 감정노동의 고통으로 이어졌다. 조용히 떡볶이를 먹고 있던 조가 입을 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 저도 그런 일 있어요” 라는 말로 운을 뗀 조는 자신이 고등학교 졸업 직후 시작해 아직까지 하고 있는 미술학원 알바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어렵게 트인 말은 쉬이 멈추지 않았고 그녀의 입은 쉴 새 없이 알바에서 겪은 작고 큰 사건과 다양한 감정을 토해냈다. 십여분 전만 해도 괴로움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했던 그녀가 어느새 핸들이 고장난 8톤 트럭처럼 자신의 알바 인생을 거슬러 질주하며 수많은 괴로움을 외치고 있었다. 디와 나는 흥미롭게 조를 바라보며 “괴로움이 많았네...“ 라고 맞장구를 쳤고, 우리의 응원에 힘 입어 그녀는 더욱 힘차게 엑셀을 밟았다. 한참 후 말을 맺은 조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지만 어딘가 개운해 보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일을 겪지만 그것을 모두 소화해내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바쁘게 돌아가고 시계는 똑딱거리며 얼른 이 일을 해결하고 다음으로 나아가라고 채근한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내 마음을 들여다 보고 구체적인 감정으로 소화해낼 기회는 많지 않다. 하지만 대화 속에서 우리는 시계를 거꾸로 돌려 지나간 일을 꼭꼭 씹어보고, 듣는 사람의 관심이 깃든 눈빛과 질문을 통해 내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된다. 마치 괴로움은 내 감정이 아니라 단언했던 조가 한참 후 자신의 괴로움을 마주하며 질주했듯이 말이다.


“말하다 보니 나 괴로움이 많았네...”

나지막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는 조를 보며 며칠 전 알게 된 ‘세 명의 법칙‘이 떠올랐다. 아무리 힘든 일도 세 명에게 말하고 나면 어느 정도 해소가 된다는, 친구의 직장동료가 알려준 법칙이었다.


“저도 세 명의 법칙 아는 거 있어요!”

디가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mz 스타일인데... 예쁜 사람, 말 잘하는 사람, 똑똑한 사람 셋이 모이면 못 할 일이 없다는 법칙이에요” “그럼 우리도 세 명의 법칙 해 볼까요?”

세 사람은 웃음을 터뜨리며 역할을 하나씩 맡았다. 조는 말 잘하는 사람, 디는 예쁜 사람, 그리고 나는 남은 하나인 똑똑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럼 우리 사진 한 번 찍어요. 세 명의 법칙~“


어쩌면, 아니 거의 확실히 다신 모일 일 없는 세 사람이었지만 함께 뭔가를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는 자신의 괴로움을 소화해냈고, 디는 처음보다 훨씬 크고 밝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으며, 나는 좋은 대화에 가슴이 충만해졌기 때문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