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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단 Aug 09. 2024

대화의 만찬

사이비 아님, 종교 없어요, only 대화!

영국의 학자 시어도어 젤딘은 자신의 70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자신이 갖고 있던 수많은 명함들에 생일 파티 초대장을 보냈다. 관련 없는 사람들을 무작위하게 마주 앉히고 서로의 뮤즈가 되어 대화하게 만들었다. 이 괴짜같고 특별한 생일파티가 ‘낯선 사람들과의 성찬’의 시작이었다. 영국 옥스포드 지역의 한 공원에서 진행하며, 서로가 서로의 뮤즈가 되어 대화하는 경험을 이끌어내는 이 행사의 주 재료는 ‘대화 메뉴판’이다. 에피타이저부터 메인디쉬, 디저트까지 준비된 메뉴판에는 음식이 아닌 대화 주제와 질문들이 적혀있다. 간단한 취향부터 가슴 깊숙이 품고 있는 이야기까지 다양한 층위와 깊이를 오가며 대화하도록 돕는 질문들로 이루어진 이 대화메뉴판은 나를 완전히 매혹시켰다. 나는 행사를 진행하는 옥스포드 뮤즈 재단의 홈페이지를 들락날락하고, 구글에 ‘conversation menu’를 검색했으며 도서관에 가 시어도어 젤딘의 저서를 뒤적여 그의 자취를 조금이라도 따라가 보려 노력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난 후, 어딜 가든 나와 함께하는 다이어리의 맨 뒷 장에는 직접 만든 대화메뉴판이 꽂혀 있었다.


일상에서 실험해 본 대화메뉴판의 힘은 어마무시했다. 나는 나로, 너는 너로 거리를 유지하며 각자의 추상만을 훑던 일상적인 대화는 나와 너를 이야기로 연결하여 ‘우리’라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 공간 안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다양한 주제가 비춰오는 빛은 한 번도 바라본 적 없는 각도에서 스스로를 보게 만들었다. 저 멀리 단절되어 있던 ‘너’는 어느새 나의 재발견을 돕는 대화의 ‘뮤즈’가 되어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더 이상 할 얘기가 있나 싶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나눈 친구와도 대화메뉴판이 놓이는 순간 모든 게 새로워졌다.


한 해가 지난 후, 세계적 석학의 칠순잔치를 뒤쫓아 엉성하게 만들었던 메뉴판은 다채로운 질문으로 빼곡한 화려한 메뉴판이 되어 있었다. 그 사이 수많은 뮤즈들과 대화를 통해 질문을 갈고 닦은 덕이었다. 추가된 질문들은 한국이라는 공간적 배경과 20대 여성이라는 나의 정체성을 숫돌 삼아 날카롭고 아름답게 벼려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메뉴판을 보지 않고도 말과 말 사이에서 에피타이저와 메인 디쉬를 길어올려 순식간에 대화의 식탁을 차려낼 수 있게 되었다. 900원짜리 삼각김밥도, 5천원짜리 노포 우동도 풍성한 대화만 있다면 순식간에 호화로운 식사자리로 모습을 바꿨다.


종종 들르는 서점에서 문자를 받은 건 그 즈음이었다. 연말에 진행하는 플리마켓의 판매자를 모집하는 홍보 문자였다. 문자를 보는 순간 대화를 팔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골목에 서서 신청서를 제출과 참가비 입금을 마쳤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이 날만을 준비해 온 것 처럼 눈 앞에 계획이 촤르르 펼쳐졌다.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백지의 창에 지금까지 수집하고 만들어 온 질문들을 쭉 나열했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가볍게 두드리며 횡단하자, 흰 창은 인간관계부터 자신의 내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인상적인 경험 등 다양한 영역을 다루는 질문들로 빼곡히 채워졌다. 긴 호흡으로 대화할 수 있는 질문들을 적절하게 엮어 나만의 대화 코스 요리 메뉴판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머지 질문들은 주제 별로 묶어 ‘대화의 간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짧은 시간 동안 대화를 효과적으로 나누기 위함이었다. 질문들은 2023년과 나, 사람, 그리고 고백을 주제로 나뉘어져 각각의 유리병 안에 고이 담겼다.


막상 준비를 마치고 나니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과연 사람들이 올까?’ 일단 대화가 시작되고 나면 질문들이 우리를 이끌어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대화가 시작조차 되지 않는다면? 낯선 사람과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대화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까? 만약 손님이 되어 앉는다고 해도 경계를 내려놓을 수 있을까? 경계를 내려놓지 못한다면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없을텐데? 무언가 준비가 필요했다. 사람들을 가장 경계하도록 만드는 요소는 ‘불순한 목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낯선 사람과의 대화도 대부분 종교 권유, 영업과 같은 상황이기에, 다른 목적 없이 온전히 대화하고 싶은 나의 의사를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나는 다시 컴퓨터를 켜, 큰 글씨로 “종교 X”, “사이비 아님”, “only 대화” 라는 세 문구를 써내려갔다. 대문짝만한 글씨로 포스터를 출력한 후에야 나는 비로소 마음의 준비까지 마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한 해의 끝을 눈 앞에 둔 2023년 12월 30일, 나는 4개의 유리병과 3장의 홍보 포스터, 20장의 대화메뉴판이 든 가방을 등에 메고 연희동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소복히 쌓인 하얀 눈을 밟는 발걸음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서점 앞에 다다랐을 때 나는 여기저기 묻은 눈을 털어내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차가운 손잡이를 잡고 문을 당겼다. 수많은 뮤즈가 기다리고 있는 그 곳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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