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봄날, 따릉이를 타고 한강공원에 들어섰다. 페달을 힘차게 밟자 봄바람이 한껏 달려들었다. 왼쪽에는 햇빛을 받아 바쁘게 반짝이는 한강이, 오른쪽에는 푸른 나무와 풀숲이 펼쳐져 있었다. 완벽한 봄날의 한 장면이었다.
자전거를 타다 보니 안장이 낮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향을 오른쪽으로 틀어 잠시 빠져 나와 안장을 고쳐 세운 후 고개를 들었을 때, 한 손에 꽃과 풀을 한가득 들고 있는 백발의 할아버지가 보였다. 그는 무성한 풀들 사이에서 꽃을 한 송이씩 꺾어 꽃다발을 만들고 있었다. 봄을 즐기는 낯선 이의 모습이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여 눈을 떼지 못했다. 몇 분을 가만히 서서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을까, 그가 할 일을 마치고 뒤를 돌았다. 먼 거리지만 눈이 마주친 듯했다. 질서 없이 무성하게 자라 있는 풀들과 달리 정돈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꽃다발이 그의 왼손에 들려있었다. 나는 손으로 꽃다발을 가리키고, 엄지를 들어 흔들었다. 웃음이나 인사 정도의 화답이 돌아올 것이라 생각한 나의 예상과 달리, 그는 비어있는 다른 손을 들어 이쪽으로 와 보라고 손짓했다. 이름 모를 플로리스트와의 대화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자전거 도로에서 열 발자국쯤 떨어진, 한산한 풀밭에서 만났다.
“꽃다발이 너무 예뻐요! 직접 만드신 거예요?”
“내가 여기 **아파트에 사는데, 주말마다 나와서 꽃다발을 만들어요.”
“이렇게 만드신 꽃다발은 집에 가져가시는 거예요?”
“아파트 상가에 카페가 있는데 거기 갖다 주면 사장이 그렇게 좋아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토요일마다 산책할 겸 나와서 만드는 거요”
두 사람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는 마주한 내 눈에서 궁금증과 호기심을 읽었고, 자신의 이야기로 그것들에 정확히 답해주었다. 꽃을 고르는 기준, 꽃다발을 만드는 노하우, 한강공원 가까이 사는 일상 등 대화는 꽃다발을 기둥 삼아 중심을 잃지 않고 그 높이와 부피를 더해가고 있었다. 어느새 꽃다발로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바닥을 드러내고, 대화의 출구가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누가 먼저 손잡이를 잡아도 이상하지 않은 산뜻한 마무리의 순간이었다. 먼저 출구에 손을 뻗은 건 내 쪽이었다. “이야기 재미있었어요. 오늘 즐거운 오후 보내세요.”라며 손잡이를 돌리려는 순간, 조금 낮아진 그의 목소리가 나를 붙들었다. “내가 사실 참전용사요.” 새로운 입구가 열렸다. 나는 잡고 있던 손잡이를 놓고 새로운 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앳된 얼굴의 20대 여자와 백발의 나이 든 남자. 겉으로 보기엔 조금 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두 사람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꽃을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내 앞에는 전쟁이라는 역사를 온몸으로 기억하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호기심 많은 따릉이 라이더였던 나도 어느새 그 옷을 벗고 오롯이 나로서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대화는 그의 질문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내가 A에 살았어요. 전라도 A시 알아요?”
“네네. 알아요.”
“거기서 B로 다 같이 가서 전쟁에 참여했거든. 그래서 여기 서울에 집을 받은 거예요. 전쟁 참여했다고 국가에서 준 거라.”
“가수 C 알죠? 그 사람이 그때 응원하러 왔잖아. 내가 그 사람 국민학교 선배요.”
전쟁의 기억을 생생하게 말하는 그의 얼굴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표정은 앳되어 보였고 눈에는 슬픔과 회한이 서려 있었다. ‘얼굴이 말랑말랑해졌네’ 말하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60년이라는 시간과 살아온 지역의 차이가 우리 둘의 거리를 벌려 놓았다. 나와의 연결을 놓치지 않으려 그는 무던히 애썼다. 내가 아는 지식을 확인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천천히, 쉽게 풀어 설명했다. 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지명과 사건, 인물의 등장은 그때마다 뚝뚝 대화를 끊어버렸다. 25년의 배경지식을 몽땅 끌어와 그를 따라가던 나는 어느 지점에서 그 끈을 놓쳐버렸다. 두 사람의 대화가 한 사람만의 웅변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의 나열은 내 눈에 남아있던 듣고자 하는 의지와 흥미를 앗아갔다. 흐릿해진 내 눈이 아마 그에게도 “시간 종료” 알림으로 보였던 것 같다. 그는 하던 이야기를 급히 끝내고 서둘러 한강의 플로리스트로 돌아왔다. 공식적인 대화 종료였다. 우리는 미소로 인사를 주고받고 각자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참 세워져 있던 자전거를 다시 굴리며 문득 지하철에서 만났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비슷한 나이대, 통하지 못하고 쏟아지는 한 사람의 일방적인 이야기, 이내 관심의 불씨가 꺼져버리는 느낌. 분명 닮아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금 전의 대화는 지하철에서의 경험과 달리 내게 불쾌함도 답답함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의 삶 깊숙이 자리한 중요한 것을 보게 되었다는 놀라움,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아쉬움, 더 깊이 알고 싶다는 궁금증이 내 안에 새롭게 들어 찼다. 빠르게 굴러가는 자전거의 속도도, 불어오는 바람도 그것들을 날려 보내지 못했다. 그의 풀어진 얼굴에 떠올랐던 연약한 감정이 내 마음을 간질이고 있었다.
역류성 식도염으로 오랫동안 고생한 적이 있다. 내과에서 처방받은 소화제도, 잦은 구토가 걱정돼 받아 본 위내시경도 도움이 되지 않아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가 한 한의원을 찾게 되었다. ‘역류성 식도염 전문 진료’라는 타이틀을 여기저기 내걸고 있는 병원에 간 날, 나는 처음으로 내 몸을 이해하게 되었다. 1시간에 걸친 긴 상담에서 의사 선생님은 큰 칠판에 몸을 그려가며 열정적으로 설명을 해 주셨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역류성 식도염은 상복부 괄약근이라 불리는 위의 밸브가 잘 잠기지 않아 생기는 질병이었다. 가방끈을 꽉 조이지 않으면 물건들이 쉽게 흘러나오고 쏟아지듯이, 물통의 뚜껑을 꽉 조이지 않았을 때 물이 새어 나오듯이 위의 밸브가 잠기지 않으면 미처 소화되지 못 한 것들, 위에 부담되었던 것들이 역류한다는 것이었다. 이 모든 증상이 신체의 밸브 하나가 느슨해서 일어나는 일이라니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어릴 때 까랑까랑했던 목소리가 청소년기를 지나오며 낮고 쉰 소리가 된 것도 식도염이 원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숨을 쉬기가 어려웠던 것도, 가슴을 누가 바늘로 찌르듯 콕콕 쑤셔오는 것도 모두 식도염 증상이었다. ‘역류성 식도염 전문가’를 만나고 나는 26년 만에 내 몸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밸브가 열리면 소화되지 못한 것들이 올라온다.” 내가 찾은 질병의 새로운 정의였다.
육체에 밸브가 있듯 마음에도 밸브가 있다면? 그 밸브가 열릴 때도 미처 소화되지 못 한 것들이 올라오지 않을까. 내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충분히 해석할 시간을 갖지 못한 것, 그래서 온전히 소화되지도 흡수되지도 못하고 응어리째 마음 안에 남아있는 이야기. 그런 것들은 도저히 혼자서는 소화해 낼 수가 없다. 혼자 복기하는 이야기 속에서는 주인공도 서술자도 관찰자도 모두 일인칭이기에. 일인칭에 매몰되어 있을 때 화자는 그 이야기의 위치도 이야기 속 무늬와 결도 볼 수가 없다. 언제나 같은 각도로 같은 장면이 되풀이될 뿐이다. 하지만 그 장면의 앞뒤와 좌우를 살펴주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일인칭의 자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 바로 그때, 사건은 경험으로 소화되고 삶으로 흡수된다.
‘어쩌면 그 순간, 마음의 밸브가 풀렸는지도 몰라’. 나는 생각했다.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템포가 너무 빨라서... 밸브를 잠궈야 하는 이유는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낯선 이와의 눈 맞춤, 서두르지 않는 대화, 마주한 눈 속의 순수한 호기심, 그리고 때마침 불어오는 따스한 봄바람. 그런 것들이 그의 밸브를 풀어놓은 건 아닐지 상상해 본다. 그리하여 밸브가 풀렸을 때 올라오는 이야기는 자식 자랑도 젊은이에 대한 훈계도 아닌, 아직 소화하지 못한 젊은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었을지. 눈에 어른거리는 그의 표정을 떠올리며, 나는 주제넘은 상상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