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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단 May 10. 2024

66? 77?

손에 땀을 쥐게 했던 첫 경험부터, 서로의 입체성을 알아보게 해 준 30분의 대화는 내게 자신감을 붙여 주었다. 큼직한 성공 경험으로 나는 말 걸기에 날개를 달아, 작고 큰 시도들을 이어갔다. 돈까스 맛집에서 함께 줄 서 있던 교복 차림의 고등학생 무리에게 "오늘 학교 일찍 마쳤어요?" 라고 가볍게 물어보며 대화의 물꼬를 텄고,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회를 먹다 사 온 아기게 튀김을 가리키며 사러 갈지 말지 고민하는 옆 테이블 사람들에게 "조금 드실래요?"라며 수북한 튀김을 들이밀기도 했다. 행인에 지나지 않았던 주변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가진 다채로운 존재로 비춰지고 있었고, 나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숨길 수 없었다. 몇 달 사이에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는 나의 일상이 되어 있었다.


작고 큰 성공의 경험들은 나의 바이블과도 같은 책이 말했듯, 타인에 대한 신뢰감을 높여주었다. 나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맥락과 역사를 갖춘, 밀도 있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무의식에 무게감 있게 자리 잡았다. 아마 그 이유일 것이다. 내가 그날, 한 번도 대화해 본 적 없는 나이대의 그에게 말을 건 것은.


취미로 활동하고 있는 직장인 밴드 합주를 마치고, 환승역에서 대학원 수업을 마친 동거인을 만났다. 각자 다른 이유로 모두가 지쳐있는 목요일 밤 11시였다. 지옥철을 자랑하는 2호선도 한산하게 비어있는 시간, 우리는 각자 손잡이를 잡고 말없이 차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보였다. 내 눈길이 향한 곳은 내가 서 있는 곳 바로 앞에 앉아있는 한 남성이었다. 별이 그려진 하얀 셔츠에 흰 바지를 입고 뾰족한 스터드가 박혀있는 벨트를 찬 그는 70대쯤 되어 보였다. 늦은 시간임에도 선명한 눈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있는 그의 모습에서 형용할 수 없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다른 곳을 향하고 있던 그의 시선이 정면을 보는 순간, 그를 바라보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작은 미소를 지어 눈맞춤에 응답했다. 그리고 그는, 그 에너지 넘치는 눈을 나에게 고정하고 눈인사로 화답했다. 낯선 이와의 우연한 눈인사 후에 내가 무슨 행동을 했을지는 뻔하지 않은가? 그렇다. 나는 말을 걸었다. “스타일이 너무 멋지세요” 한 번 쳐 본 대사는 목구멍에서 어떤 저항도 받지 않고 능숙하게 튀어나왔다. “you too!” 생각지 못한 영어가 힘찬 목소리로 들려왔다. 대화의 신호탄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부천에서 운영 중인 라이브 카페의 평수로 시작해 자신이 하는 일, 80대임에도 일을 계속하는 이유와 늙음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까지 자유롭게 주제들을 넘나들며 비행했다. 잠깐 숨을 고른 그는, 다시 입을 뗐다. 자신을 향하던 이야기는 이제 고개를 틀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젊음을 대하는 태도, 젊은이가 갖춰야 할 소양, 젊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때 꼭 필요한 자질 같은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분명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들이었다.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경험의 축적들, 자신만의 렌즈로 찾아낸 세상의 진리 같은 것은 내가 낯선 이와의 대화에서 가장 바라고 고대해 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물 흐르듯 흘러가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가슴은 거대한 벽을 마주한 듯이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대답할 틈도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그의 앞에, 나는 없었다. 그는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나의 눈을 잘 닦인 거울 삼아 자신을 비춰보고 있었다. 나의 끄덕임과 작고 큰 호응들은 반주가 되어, 그가 자신의 멜로디를 마음껏 펼치도록 하고 있었다. 우리는 꽤 좋은 합주를 펼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반주에 귀 기울일 줄 알았다면. 그러나 그는 자신만의 멜로디에 심취해 큰 소리로 연주를 이어갔다. 우리의 대화는 어느새 불협화음이 되어 있었다.


목적지까지 대여섯 역 정도 남았을 때, 그의 옆 사람이 내렸다. 그는 얼른 앉으라며 빈자리로 나를 끌었다. 그와 나의 거리가 더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고개를 힘겹게 돌려야 꺾어야 볼 수 있는 내가 아니었다. 앉은 자세에서 편하게 닿는 시선 끝에는, 지친 나의 동거인이 서 있었다.

“친구 위에 앉아요.” 그가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앉으면 무겁잖아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동거인이 답했다.

“흠... 66입지? 아닌가 77?”

정적이 흘렀다. 싸늘하게 식는 공기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젊으니까 66 입겠다. 나이 든 사람들은 그 몸매면 77 입는데.”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동거인의 얼굴을 쳐다봤다. 피로로 물들어 있던 눈에 분노가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는 동안에도, 내 옆의 무뢰한은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런 말씀 하시는 거 아니에요!”라고 말했다.

“66이고 77이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런 말은 하는 게 예의가 아니죠.”

하지만 그는 나의 말을 귀여운 처녀가 하는 앙탈 정도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는 져준다는 듯이 “알았어요. 알았어”라고 답하고는 다시 자기 이야기를 이어갔다. 화자는 있으나 청자는 없는, 공허한 말의 배설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거인과 함께 지하철에서 내렸다.


지하철 문이 닫히고, 우리는 말 없이 걸었다. 무례함으로 점철된 말을 아무 이유 없이 들어야만 했던 동거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몰려왔다. 잘못된 대화 상대를 골라 그런 일을 당하도록 판을 깐 게 다름 아닌 나라는 생각에 죄책감이 무겁게 가슴을 채웠다. 아직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 그녀에게 나는 아무 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미안해. 나 때문에 그런 일 당하게 돼서...”

집으로 향하는 마을 버스 안에서 나는 용기를 내 입을 뗐다.

사과를 하는 나를 보고 그녀는 알았다는 듯 눈을 마주쳤지만, 지금은 어떤 얘기도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내비치며 시선을 돌렸다. 다시 찾아온 정적은 한층 더 무거워져 있었다. 먼저 걸어가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나는 뒤따라 걸었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만이 건물을 울렸다.

‘삑 삑 삑 삑, 띠리링~’ 문이 열렸다.

먼저 집에 들어선 그녀는 뒤를 돌아 아직 신발을 벗고 있는 내게 말했다.

“앞으로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금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철컥’ 도어록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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